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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이 장소로 이동할 때…한국문학 39곳 ‘명작의 공간을 걷다’
공간이 장소로 이동할 때…한국문학 39곳 ‘명작의 공간을 걷다’
  • 김재호
  • 승인 2020.09.17 08:5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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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제의 책_『명작의 공간을 걷다』(이경재 지음, 소명출판, 437쪽)

 

문학은 공간을 빼고 논할 수 없다. 그런데 공간과 장소는 구분된다. 공간이 추상적이고 객관적이라면, 장소는 구체적이고 주관적이다. 어떤 공간은 누군가에게 특별해진다. 왜냐하면 그곳에서 나고 자라며 개인의 정체성이 형성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작가 김연수에게 경북 김천이라는 곳은 자신의 자전 소설에 등장하는 특별한 곳이다. 최신작 『명작의 공간을 걷다』는 이렇듯 문학에 등장하는 39곳을 저자 이경재 숭실대 교수(국어국문학과)가 직접 다녀오며 집필한 책이다. 


김연수 작가는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부모님이 운영하던 김천 역 앞 ‘뉴욕제과점’이 소중하다. 이경재 저자는 “특히나 자신이 태어나고 어른이 될 때까지 살았던 ‘뉴욕제과점’과 같은 곳은 ‘장소 중의 장소’이자 ‘장소의 원형’에 해당한다”며 “고향의 집은 인간 정체성의 토대이자 실존의 중심으로서 마음의 안정을 가능케 하는 절대적인 장소이기 때문이다”고 적었다. 

 

이육사 시인을 기리는 기념비

 

 

장소 중의 장소는 정체성의 원형이 된다

 

현진건 작가는 「운수좋은 날」에서 1920년대 경성의 풍경을 제대로 펼쳐보였다. 이 작품이 현진건의 대표작이긴 허나, 그는 대구에서 태어나고 자라며 문학적 소양을 쌓았다. 현진건의 또 다른 작품인 「고향」에서 그에게 대구가 장소의 의미를 얻는 경로를 엿볼 수 있다. 


17살에 대구를 떠나 9년 만에 돌아온 고향 대구는 폐허 같은 곳이었다. 집과 사람, 심지어 개도 한 마리 없는 고향. 그 길에서 우연히 만난 고향 길의 한 여인. 그녀와는 어릴 적 혼담이 오간 적 있다. 하지만 그녀는 17살이 되던 겨울, 대구 유곽에 팔려가 십년 동안 일하다가 병이 들어 나왔다. 또한 작품 속 ‘나’는 대구에서 서울로 가는 열차의 맞은편에서 한·중·일 삼국의 특징을 한 몸에 갖고 있는 ‘그’를 만난다. ‘나’는 ‘그’를 처음에 쌀쌀맞게 대했으나 ‘그’가 일제의 탄압에서 서간도를 시작으로 일본 등으로 이주해야 했던 사연을 듣고 함께 신세를 한탄한다. 

 

일제의 탄압 속 폐허간 된 작가들의 고향

 

저항시인 이육사에게도 장소는 중요했다. 그의 항일투쟁은 안동, 대구, 일본, 서울, 중국에서 이뤄졌다고 한다. 이경재 저자는 이육사의 시들을 지탱하는 힘으로 ‘선비정신’과 ‘미적 전통’을 꼽았다. 퇴계 이황의 14대손이기도 한 이육사는 경북 안동권 도산면 원촌이 고향이다. 이곳은 이황의 5대손이 터를 잡은 공간이다. 


이경재 저자는 이육사가 가장 아낀 시 「청포도」나 우리에게 잘 알려진 「광야」, 고향의 변화를 안타깝게 노래한 「자야곡」을 ‘육사의 고향 3부작’으로 규정했다. 이육사는 「청포도」에서 ‘자연의 법칙처럼 오고야 말 광복’을 노래했다. 이경재 저자는 「청포도」에 등장하는 ‘고장’과 ‘마을’을 특정 공간으로 한정짓지 말자고 했다. 즉, 이육사의 고향인 원촌이나 이육사가 방문한 후 영감을 얻은 포항의 미쯔와 포도원으로 간주하는 건 본질적인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시의 공간은 언젠가 맞이할 해방과 숭고의 공간으로서 조선이었다.  

   
이 외에도 책에는 이효석의 봉평, 한흑구가 사랑한 포항, 김동리와 박목월의 경주, 김사량의 도쿄와 가마쿠라 등 특별한 공간들이 나온다. 문학은 공간을 누비고, 공간은 장소로 이동하여 작가들의 정신을 누빈다. 지금도 어느 거리, 어느 역 앞에서 어떤 작가가 자신의 정체성을 갈고 닦아가고 있을 터이다. 그렇게 공간은 장소로, 또 다른 문학의 심연을 드리운다. 

 

김재호 기자 kimyital@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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