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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성’에 집착하는 작가들…'일탈‘까지도 담아내야
‘일상성’에 집착하는 작가들…'일탈‘까지도 담아내야
  • 이은혜 기자
  • 승인 2004.04.01 00:00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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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분야에서 ‘일상성’은 유행으로 등장했다는 점에서 문제가 된다. 근대의 거대담론에서 내려와 비로소 ‘일상’을 다루게 된 건 매우 중요한 일이지만, 어느 작가나 ‘일상성’을 표방하면서 피상적인 일상성만 넘칠 뿐, 깊이 있는 문제의식이 없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먼저 미술 쪽을 보자. 큐레이터 전승보는 ‘일상성에의 주목’이란 글에서 “요즘 젊은 작가들에게서 일상에서 퍼온 단순한 행위들을 많이 볼 수 있다”고 지적한다. 이를테면 자신의 은밀한 침대생활을 고백하거나 자기의 삼류청춘을 고백하는 등 사생활을 가감 없이 드러낸 작품들이다. 서진석 경원대 교수(전시기획) 역시 이런 일상성에 대해 “과거 민중미술 때와 달리 이슈가 없어지자, 목표를 상실한 작가들이 일상의 문제를 과도하게 다루는 것 같다”고 비판한다. 예컨대 “일상적인 소재인 머리카락을 차용한 어느 작품은 하찮은 일상소재를 다룬 점에선 신선했지만, 계속 머리카락만 다루는 데 의문이 간다”는 것. 또한 ‘플라잉시티’처럼 한국의 감춰진 일상과 아이덴티티를 드러내는 일은 의미있는 일상성의 작업이지만, “궁극적으로는 한국적 일상에서 벗어나 보편적인 일상을 담아내야한다”고 덧붙인다.

건축은 다른 어떤 분야보다 ‘일상성’과 떼어낼 수 없다. 우리가 살아갈 현실적인 환경을 만들기 때문이다. 건축에서 ‘일상성’이란 흔히 일컬어지는 아파트, 빌딩, 병원, 기숙사 같은 주거물을 지칭하는 게 아니다. 진경돈 백제예술대 교수(건축사)는 “일상성은 생태주의나 자연주의와 등치되는 개념이다. 근원적으로는 맑시즘에서 나온 것이기에 현실 비판적이다”라며 ‘일상성’에 대한 오해를 푼다. 즉 자본, 지역, 공간이 강요하는 것에서 벗어나 자연주의를 추구하는 흐름이라는 것. 하지만 과연 인위적인 도시 구조물들 속에서 일상성의 건축이 얼마나 어울릴까. 진 교수는 단지 친자연적인 건축을 표현했다 해서 일상성의 건축은 아니라고 설명한다. 즉 “건축은 건축구조물 자체뿐만 아니라 외부공간과의 조화도 고려해야 하는데, 건축법이나 행정상의 문제가 이런 것을 제한 한다”며 일상성의 건축에선 제도가 가장 걸림돌이라고 지적한다.    

영화는 ‘일상성’이 가장 광범위하게 퍼졌던 분야다. 얼마 전까지 영화계에선 ‘일상성’이 지배적인 코드였다. 이런 가운데 영화평론가 허문영은 '한국영화의 이상한 경향, 코드-오인된 일상성‘이란 글로 “일상성 포착은 이제 그만”이라고 비판한 바 있다. 그에 따르면 국내 일상성 영화는 홍상수 감독 등 몇몇을 제외하곤 ’쇄말주의(trivialism)'에 불과하다는 것. 그런데 요즘엔 이상하게도 일상성의 영화가 주춤거린다. 허문영은 이런 현상에 다시 제동을 건다. 왜냐하면 이제야 제대로 된 일상성의 영화가 나와야 할텐데, 대세는 조폭영화로 기울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지난 해 ‘바람난 가족’을 제외하곤 ‘지금, 여기’의 문제를 다루는 일상성의 영화를 찾아볼 수 없다”며, “유행으로서의 일상성의 영화는 비판받아야 하지만, 새로운 주체를 찾는 일상성의 영화들은 더 활성화돼야한다”는 아쉬움을 나타낸다.

연극에서도 한때 ‘일상성 연극’이란 게 있었다. 근대의 ‘재현 권력’에 대해 반발로 등장했던 것. 안치운 호서대 교수(연극평론)는 이런 흐름이 유행하게 된 건 “예술의 민주화, 문화상대주의와 맥을 같이 하며, 일상의 소소한 이야기 거리들이 재현의 헤게모니에 대한 조준 역할을 했다”고 설명한다. 물론 일부에선 ‘일상성’을 두고 “누구나 다 연극을 만들겠다는 건가”, “연극은 아무렇게나 만들어도 된다는 건가”라고 비판하기도 한다. 하지만 안 교수는 “연극분야에서 일상성은 좀 더 많이 다뤄져야한다”며 아쉬움을 표한다. 박근형과 같이 그나마 있던 몇몇 연출가들도 일상성 연극에서 떠났기 때문이다.

오늘날 ‘일상성의 미학’에서 가장 놓치고 있는 건 오히려 ‘지금, 여기’의 문제를 다루면서 꿈꾸는 ‘일탈’이 아닌가 싶다. 있는 그대로의 현실이 ‘일상성’인 게 아니라, 작가라면 ‘일탈’을 반복함으로써 지금의 일상을 전복시킬 수 있음을 보여줘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 의식 속에서 비로소 새로운 ‘일상’이 생겨날 수 있을 것이다. 

이은혜 기자 thirteen@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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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udaeppo 2004-04-02 21:17:41
mudaeppo.com
강영민 (2004-04-02 20:59:35)

기사中
서진석 경원대 교수(전시기획) 역시 이런 일상성에 대해 “과거 민중미술 때와 달리 이슈가 없어지자, 목표를 상실한 작가들이 일상의 문제를 과도하게 다루는 것 같다”고 비판한다. 예컨대 “일상적인 소재인 머리카락을 차용한 어느 작품은 하찮은 일상소재를 다룬 점에선 신선했지만, 계속 머리카락만 다루는 데 의문이 간다”는 것. 또한 ‘플라잉시티’처럼 한국의 감춰진 일상과 아이덴티티를 드러내는 일은 의미있는 일상성의 작업이지만, “궁극적으로는 한국적 일상에서 벗어나 보편적인 일상을 담아내야한다”고 덧붙인다.

>서진석님의 이 비판에 몇가지 질문을 던집니다.
1.이슈가 없어지자, 목표를 상실한 작가들이라고 했는데, 그렇다면 작가들의 목표가 이슈-메이킹(혹은 이슈로부터의 모티베이션)이라고 생각하는 것인지?
그렇다면 현재 한국사회의 핫이슈인 탁핵정국이나 촛불집회를 다룬다면 목표가 생기는 것인지?

2.일상의 문제를 '과도하지않고', '적당하게' 다루는 것은 어떤 것인지?

3.'예컨데 하찮은 일상소재'를 계속 다룬다면 그것이 과도하다는 것인지?

4.(작가나 개인의)머리카락=일상적 소재, 일제시대나 70년대의 단발령의 머리카락=거대담론의 등식이 성립한다고 보시는지?

5.한국적 일상은 보편적인 일상이 아니라고 생각하는지?

이 기사의 서두는 '예술분야에서 ‘일상성’은 유행으로 등장했다는 점에서 문제가 된다'라고 시작되는데
이은혜기자님과 전문가들에게 질문드립니다.

1.유행으로 등장했다면 그 유행의 선구자(유행을 이끈 리더Leader)가 존재한다는 걸 가정한다는 점인데 누구라고 생각하시는지?

2.어떤 성(여기서는 일상성)이 정말 '유행'으로 등장 할 수 있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