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덜 다듬어진 대동민주주의 구상…방법론 분명치 않아
덜 다듬어진 대동민주주의 구상…방법론 분명치 않아
  • 이상익 영산대
  • 승인 2004.03.31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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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쟁서평 : 『유교담론의 지형학』(이승환 지음, 푸른숲 刊, 2004, 382쪽)

▲ © yes24
이상익 / 영산대·동양철학

저자는 “제1세계를 중심으로 진행되는 전방위적 제국주의에 항거하려는 저항의 몸부림”으로, 나아가서는 “신자유주의적 세계화 추세에서 심화되어가는 사회 해체와 물신화를 성찰”하고자 새로운 유교 담론을 꾀하고 있다. 저자는 이러한 목표 아래, 근대 서양에서의 유교 담론, 오늘날 대만과 중국에서의 유교 담론, 그리고 최근의 ‘유교자본주의’와 ‘아시아적 가치’를 둘러싼 담론들을 비판적으로 고찰하고, 자신의 전망을 제시한다. 저자는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다양한 문명에 내재된 차이와 가치를 승인하면서 이들을 함께 아우를 수 있는 원대하고 거시적인 서사를 만들어내는 일”이라 했다. 평자는 저자가 기획하는 ‘원대한 서사’에 대해서만 몇 가지 문제들을 제기해보려 한다.

'私'를 부정하는 '公'이 의미가 있나

첫째, 저자의 ‘원대한 서사’는 목표 상으로는 ‘大同 민주주의’로 귀착된다. 저자는 대동사회를 “자연 안에서 節欲하는 삶, 均平과 公有를 통한 공동체 안에서의 조화, 공동선의 추구를 통한 구성원들의 유대와 화목, 자아수양을 통한 인격의 완성, 그리고 노동과 여가의 융합”으로 설명하고, 이것을 우리가 지향해야 할 미래상으로 제시한다. 저자는 또한 곳곳에서 ‘자유’와 ‘생태’의 중요성을 언급하고 있다. 이러한 내용들을 종합해 볼 때, 저자는 아마도 ‘자유’와 ‘공동체’ 그리고 ‘생태’라는 핵심가치들을 하나로 포괄할 수 있는 ‘아나키즘적 생태 공동체주의’를 지향하는 것으로 보인다.

저자는 오늘날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에 수반된 악성 부산물을 그대로 방치할 수 없다는 문제의식에서 ‘공공성’의 표상으로 대동사회의 이상을 주목하는 것 같다. 공공의 이익을 위해 봉사해야 할 공기업이 민영화돼 오히려 사익을 추구하는 기업으로 변해 가고, 절대적으로 유한한 공공재가 소수 사기업가의 손에 의해 장악되는 현실에 대해 그는 곳곳에서 분노를 표한다. 저자의 문제의식과 분노를 충분히 공감한다고 하더라도, 또한 우리는 현실의 경제논리를 마냥 외면할 수도 없을 것이다. 저자는 공기업이 부실화돼 적자경영을 면치 못하고, 사회복지의 확대로 인해 국가적 경쟁력이 저하되는 현실에 대해서는 별로 주목하지 않는 것 같다. 저자가 지향하는 ‘공공성의 회복’이 이뤄지기 위해서는 자유주의 경제학에서 주장하는 ‘효율성’과 ‘경쟁력’의 논리에 대해 어떤 식으로든 설득력 있는 답변을 내놓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저자의 대동민주주의 구상 중, 평자를 가장 놀라게 한 대목은 ‘공유’였다. ‘公’은 저자의 구상에서 매우 중요한 개념인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공유’란 ‘사유’를 부정한다는 의미까지 담고있는 것일까. 만일 그렇다면 공유제는 저자가 강조하는 ‘개인의 다양성·정체성’과 어울릴 수 있는 체제인가. 평자가 생각하기에, 개인의 다양성과 정체성은 필연적으로 개인의 자유를 요구하며, 개인의 자유는 신체의 사유를 통해 실현되고, 신체의 사유는 사유재산제로 귀결되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면, 자신이 자유롭게 처분할 수 있는 사유재산 없이 개인의 다양성과 정체성이 실현될 수 있겠는가. 따라서 저자는 공유제에 대한 자신의 구상을 명확히 밝혀야 할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공동체적인 유대는 역시 저자가 강조하는 ‘다양성의 존중 및 관용’과 어울리는 것인가. 평자가 생각하기에, ‘다양성의 존중과 관용’은 ‘공동체적인 유대 또는 공동선의 추구’와 어울리는 개념이 아니고, 오히려 ‘자유’와 어울리는 개념이다. 저자는 ‘같음을 중심으로 사유하기보다는 다름에 대한 배려를 강조한다’는 관점에서 특히 장자의 철학을 주목하는데, 그렇다면 장자에게서 공동체적인 유대나 공동선의 추구를 찾아볼 수 있는가. 이러한 점들과 관련해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전망을 제시하지 않는다면, 저자의 ‘원대한 서사’는 하나의 유토피아적 이상에 그칠 수도 있다.

"동도서기론은 성공할 수 없는 기획"

둘째, 저자의 ‘원대한 서사’는 방법론적 구상이 명확하게 제시돼 있지 않다. 저자는 ‘미래 한국철학의 방향’을 “근대성이 성취한 찬란한 성과를 받아들이면서 전통의 우수성을 접목한 和爭의 철학”으로 제시했다. 저자는 최근 대만에서 활동하는 ‘현대 신유가’의 입장을 유교의 인문정신을 체로 삼고 서구의 과학과 민주를 용으로 삼는 中體西用論으로 규정하고, 경제발전과 정치적 민주주의가 뒷받침된다면 문화적 전통의 우수한 부분과 서구적 근대성의 긍정적 성과를 잘 융합해 낼 수 있으리라고 전망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자면, 일견 저자의 방법론적 구상은 東道西器論이 아닐까 짐작된다. 그렇다면, 東道와 西器는 성공적으로 융합될 수 있는 것인가. 일찍이 한 세기 전에 '體用一原'의 논리에 입각해 동도서기론을 비판했던 선례가 있듯이, 평자는 동도서기론을 성공할 수 없는 시도라고 본다. 아마 저자도 과거의 단순논리를 그대로 답습하자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저자의 구상은 ‘동양과 서양’ 그리고 ‘전통과 현대’의 이종교배를 통해 도와 기를 변증법적으로 상승 발전시키자는 주장일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논법은 마치 카오스 이론에서 우주를 ‘복잡계’로 상정하는 것만큼이나 복잡하고 불명확하게 들린다. 문명상호간의 교류와 영향, 그리고 한 문명 안에서 도와 기의 변증법적 발전과정에 대해 보다 명료하고 체계적인 설명이 필요하다.

평자는 이상과 같은 맥락에서 저자가 추구하는 ‘원대한 서사’는 이론적으로는 보다 정밀하게, 전략적으로는 보다 구체적으로 보완돼야 할 것이라고 본다.

필자는 성균관대에서 '韓末 節義學派와 開化派의 사상적 특성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방았다. '朱子學에 있어서 理와 氣의 相互主宰와 그 의의', '儒敎에 있어서 家族과 國家' 등의 논문이 있고, '서구의 충격과 근대 한국사상' 등의 저서를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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