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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이사: 학문의 사대주의
학이사: 학문의 사대주의
  • 오장미경 성공회대
  • 승인 2004.03.26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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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한국영화가 대박을 터뜨리고 있다. 헐리우드와 유럽영화의 우수성에 자신감을 잃고 숨죽여오던 한국 영화계가 드디어 가슴을 펴고 한국인의 정서와 가치, 혼이 깃든 영화를 해외시장에 대거 수출하며 자부심을 드높이고 있다. 그런가 하면 한복 디자이너인 이영희씨가 디자인한 한복들이 프랑스 디자이너들의 눈을 매혹시킨 바 있으며, 김덕수 사물놀이패는 일찍이 우리 문화의 우수성과 독특성을 세계만방에 알린 바 있다. 이런 소식들은 마치 초등학생처럼 한국인으로서의 긍지와 자랑스러움에 어깨를 으쓱하게 한다. 大國들 사이에 끼어서 여러 가지 역사적 시련과 애환을 겪어온 조그만 나라, 우리나라에 대한 자연스런 애정과 애국심이 발동되는 순간이다.

그러나 다음 순간, 내가 서 있는 현실, 나를 둘러싼 생활과 공간 속에서 한국인으로서의 자긍심은 여지없이 무너진다. 내가 내 전공과 관련해서 읽고 말하며 강의하고 인용하는 대부분의 내용은 서양의 시각에서 서양 학자가 발전시켜온 서양 학문이며, 우리 학문적 풍토 속에서 한국적 가치와 감수성이 깃든 학문의 자취는 찾아보기 쉽지 않기 때문이다. 전공에 따라 다소 차이는 있지만, 대부분 우리는 학술적 훈련을 할 때 서양 학자들의 지식이나 학문, 방법론들을 익히는 데 더 시간을 할애해왔고 서양 학문에 더 익숙한 실정이다. 공부에 뜻을 둔 똑똑한 학생들은 너도나도 미국 유학길에 들어섰고 한국의 대학원은 전업 학문을 하려는 학생들이 더 이상 들어오지 않는 파리 날리는 상점과 같은 형상이다. 영어로 잘 읽고 말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콤플렉스는 끊임없이 국내에서 학위를 받은 우리들을 괴롭힌다. 그렇게 국내에서 어렵게 박사학위를 마쳐도 미국박사 우선 분위기에 밀려 교수 되기는 하늘의 별따기다.

교수와 학생, 대학과 대학원 내에서 ‘학문’을 매개로 모인 사람들 모두는 그렇게 미국을 위시로 한 선진국 일순위/한국 이순위라는 위계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다. 또한 우리 모두는 그런 위계에 따라 순위가 매겨지는 것에도 더 이상 흥분하지 않게 됐다. 선진국병, 사대주의가 이미 뇌리에 깊이 박혀 ‘비정상’이 ‘정상’의 모습을 하고 있는 상황, 그게 오늘 우리 학문, 학계의 모습이다.

한국 영화의 대박붐, 수출붐으로 즐거운 최근 소식은 내가 처해 있는 공간, 나의 관심사들과 오버랩되면서, 잠시 잊었던 의식 깊이 숨어 있던 우리 학문에 대한 문제의식을 되살려내고 있다. 왜 우리는 우리 학문을 수출하는 데 지나치게 소극적이었으며, 여전히 소극적인가 하는 점이다. 나를 알리는 작업이 선행되지 않는다면, 학문의 사대성과 종속성 그리고 식민성은 쉽게 청산될 수 없다. 나를 아는 이가 나밖에 없다면 어찌 국제무대에서 경쟁력을 갖겠는가. 우리 영화감독이 감독상을 받은 것도, 우리 한복이 찬사를 받는 것도 외국인이 접해봤기 때문에 가능해진 일이다.

그러므로 우리 학문을 국제적으로 알리는 것은 국내에서의 우리 학문을 발전시키고 한국인 학자로서의 자긍심을 되살려내기 위해서도 절대적으로 필요한 일이다. 외국 도서관에서 한국을 알리는 책, 한국인이 지은 책은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고 한다. 그나마 있는 것도 몇몇 유명 작가의 소설책에 불과하며 학술적인 책들은 더욱 발견하기가 어려운 실정이다. 우리 학문을 외국어로 번역해서 외국 도서관에 진열시키는 작업을 하루빨리 해내야 한다. 외국인들이 한국을 알고, 우리 학자의 학문을 입에 오르내리며, 국제무대에서 논의의 대상으로 삼는 일들이 더욱 빈번해진다면 우리 학문은 국제적으로 성장의 토대를 마련할 수 있을 것이고, 그것은 국내 학계에도 영향을 미쳐 ‘사대주의’나 ‘식민주의’도 사라지게 할 것이다.

오장미경 / 성공회대·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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