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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비평] : 일상적 파시즘론의 공허함
[문화비평] : 일상적 파시즘론의 공허함
  • 교수
  • 승인 2001.04.1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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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04-11 14:41:29

최근 ‘진보적’임을 표방하는 한 대중 잡지가 몇 차례에 걸쳐 한국사회의 ‘일상적 파시즘’(또는 ‘우리 안의 파시즘’)론을 제기한 이후, 이를 둘러싸고 대학 강단 지식인들 사이에 벌어져온 일련의 논쟁은 그 동안 점입가경의 경지를 넘나들더니 이제 바야흐로 알쏭달쏭한 요지경의 세계로 접어들고 있는 듯 하다. 언뜻 보기에 이 논란을 둘러싼 풍경은 다른 통상적인 지적 논쟁들의 그것과 크게 달라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일상적 파시즘’ 또는 ‘미시 권력’의 개념에 관해 얼마간의 기초 지식을 갖고있는 사람들이라면 이 논쟁뿐만 아니라 그것을 애초에 촉발시켰던 일상적 파시즘의 문제 제기 그 자체가 전혀 기대 밖의 엉뚱한 지점에서 출발하여 점점 더 요령부득의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는 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을 것이다.

어설픈 ‘한국제’ 담론의 지적 만용

‘일상적 파시즘’ 또는 ‘미시 권력’은 이제 우리에게도 그리 낯설거나 새로운 용어가 아니다. 주지하다시피, 그것은 1980년대 말 이후 마르크스주의를 대체할 새로운 급진적 사회 비판 이론으로서 우리 사회에서 본격적으로 도입되고 지속적으로 수용되어온 후기구조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 등 서양의 주요 사상적 조류와 경향들`-`특히 푸코, 들뢰즈, 가타리 등의 담론에서 비롯된 개념들이다. 그런데, 지금 논란이 되고있는 일상적 파시즘론의 불행은, 이 개념이 생겨난 근대성 비판 또는 탈근대성의 이론적 맥락과 내용은 거의 완벽히 사상시켜버린 채 그 이름만 따다가 어떤 현실적 요구에 긴급히 부응하기 위해 서둘러 만들어낸 껍데기뿐인 담론이라는 점에서부터 시작된다. 물론, 제목이야 어떻든, 소설을 쓰든 만화를 그리든, 대한민국에서 창작의 자유와 권리는 누구에게나 보장되어 있다. 또한, 외국에서 수입된 탈근대적 담론들이 뭐 그리 대수냐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한국제’ 담론의 더 큰 불행은 그처럼 어설프게 급조된 빈약한 이론 틀에 맞추어 우리의 일상적 삶의 거의 모든 것을 획일적으로 설명하고 재단하려는 지적 만용과 횡포를 부리고 있다는 데 있다. 예를 들면, 국민교육헌장을 열성적으로 암송하는 어린 학생들에서부터, IMF 이후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에 대한 투쟁과정에서 관료적이며 남성 국수주의적 태도를 적나라하게 드러냈던 소위 ‘진보 진영’의 노동자들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밖에서는 페미니즘에 대해 열변을 토하다가도 집에 오면 “남편의 식사 준비와 재떨이 시중까지 들거나 고분고분 시집살이를 하는” 여성들에서부터, “1999년 국가의 호명에 따라 불과 두 달만에 열 손가락 지문 날인을 하고 스스로의 인권을 짓밟은 2천 5백만의 대한민국 성인들”에 이르기까지, 이 일상적 권력 개념은 종횡무진 無所不在, 無所不爲의 힘을 휘두른다. 그리하여, 우리는 강제와 억압에 기반한 군부 독재의 거대 파시즘에서 벗어난 이후, “내면화된 규율과 가치를 통한 합의와 자발적 복종”을 통해 일상의 구석구석까지 지배를 관철하는 미시 권력의 덫에 걸려들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왕성한 식욕, 모자란 소화 능력

모든 것을 설명하면서도 결국은 아무 것도 설명하지 못하는 공허한 함량미달의 이론 틀로써 이끌어낸 이 비장감마저 감도는 심각한 결론 앞에서 우리는 울어야할지 웃어야할지 알 수 없는 난감한 처지에 빠지지 않을 수 없다. 아마도 이 일상적 파시즘론을 제기한 논자는 푸코와 들뢰즈 또는 가타리를 너무 심각하게 읽었거나, 아니면 대충대충 읽었던 것 같다(아니면 두 경우 모두일 거라는 혐의가 짙다). 육체/욕망/무의식, 주체화, 근대 자본주의, 미시 권력의 기능과 작용 및 행사 방식, 저항과 투쟁 및 변화의 실제적 가능성 등등, 탈근대적 담론이라 불리는 ‘햄버거의 그 푸짐한 살코기는 어디에 있는가?’ 이런 점에 비추어 볼 때, 일상적 파시즘론을 진보 허무주의 또는 지나친 좌파 자성론으로 보는 견해들 역시 탈근대적 문제설정에 대한 이해 부족에서 나온, 핵심을 비켜간 비판에 지나지 않는다. 오늘날 급변하는 역사적 정세 속에서 새로운 급진적 사회 비판 이론에 대한 모색이 시급히 요구되는 이 시점에, 이 진지하게 빗나간 지적 소동, 또는 왕성한 식욕에 비해 소화능력은 한참 떨어지는 데서 발생한 이 학문적 소화불량은 편협하고 척박한 우리 ‘당대’의 학문적 지평과 토양만을 새삼 떠올리게 하여 우울할 뿐이다(또 다시 흐린 봄이 오려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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