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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비평_홍명섭의 'Running Railroad(2004)' 展
미술비평_홍명섭의 'Running Railroad(2004)' 展
  • 김현화 숙명여대
  • 승인 2004.03.1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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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착된 메타의 세계...자기 해체 필요

“시간, 공간, 관념, 모두 해체시키고 싶다. 해체의 해체, 또 해체, 그리고 해체의 parasite까지 해체시켜 無로 돌리고 싶다. 그런데 나는 有形의 예술을 멈출 수가 없다. 얼마나 모순인가.” 홍명섭의 자조어린 고백은 지난 전시회(2004.2.16-2.21)에서 보여준‘Running Railroad’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번역하면 단순히 ‘달리는 철도’다. 이게 무슨 문제인가.

홍명섭의 전략은 달리는 철도가 점령하고 있는 시간의 흐름과 공간상의 거리에 대한 타성적 인식과 고정관념을 해체시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기차가 달려가는 목적지를 앞의 공간으로 인식하고, 시간도 앞으로 흘러간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과거는 뒤, 미래는 앞이라는 고정관념을 갖고 있다.

그러나 홍명섭은 언어학적으로 시간과 공간의 구조가 다르다는 것을 발견했다. 예를 들어 ‘10년 전’, ‘10년 후’라고 했을 때, 前은 공간적으로는 ‘앞’을 의미하지만 시간적으로는 ‘뒤’를 의미한다. 後는 공간적으로는 뒤를 의미하지만 시간적으로는 미래를 지칭한다. 따라서 홍명섭은 시간과 공간의 구조체계를 해체시키고자 한다.

사실 'Running Railroad'는 이미 1982년 베니스 비엔날레에 출품된 것과 제목뿐 아니라 형태도 동일하다. 아무 것도 달라진 게 없다. 시간과 공간의 해체 그리고 모반을 꾀했을 뿐이다. 작가가 똑같은 작품을 반복, 재생산한 것이 아니라 과거와 미래, 현재라는 해체된 시간 속에서 의미가 달라지는 것이다. 홍명섭은 이것을 ‘메타'라는 용어로 설명한다. 텍스트(작품)는 외형적으로 동일하게 보일지라도 시간에 따라 의미를 유보하거나 달리한다.

즉 기표는 사방팔방으로 흩어질 수 있어도 시간에 의해 기의는 동일하지 않다. 메타변이가 일어나는 것이다. 이것은 데리다의 ‘차연’(la differance)' 개념을 연상시킨다. ‘차연’은 ‘차이’(la difference)와 ’연기‘(延期, le delai)를 복합시켜 만든 조어다. 불어로 ‘differance’ ‘difference’의 발음은 같다. 단지 a와 e의 문자상의 차이가 있다. 시간에 의해 의미가 유보되거나 달라지는 차연은 당연히 이분법적인 구조를 해체시켜 탈중심화, 탈주체화를 유도한다.

홍명섭은 ‘차연’, ‘탈중심’ 등의 철학적 용어 대신에 결정, 고정되지 않으며 끊임없이 변화되는 현상을 meta, para, ana 등의 접두어로 설명한다. 시공간이 해체돼 반전, 역류, 모반, 굴절되면서 형태도, 마음도, 조각도 고정되지 않는다. 즉 meta-form, meta-mind, meta-sculpture가 된다.

홍명섭은 고정되거나 영구적인 재료, 결정적인 형태를 피한다. ‘Running Railroad’를 생성시키는 것은 마스킹 테이프다. 벽면과 바닥을 스쳐지나간 마스킹 테이프를 전시가 끝난 후 떼어내면 아무 것도 남지 않는다. 마스킹 테이프는 전시장 공간과 만났고 그리고 헤어진다.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홍명섭은 이것을 無記性으로 설명한다. 해체는 끝없이 meta, para, ana를 만들어내고 無로 돌아간다.

그러나 헤어짐이 언젠가 다시 만남이 될 수 있듯이 無 역시 원천이거나 결론일 수 없다. 헤어짐과 만남, 시작과 끝, 有와 無 등 이분법적 구조가 해체되고 끝없이 回向이 일어난다. 홍명섭은 圓形을 해체의 형태로 생각한다. 원형 테이블에서는 지위상의 높고 낮음이 구별되지 않듯이 원형에는 시작도 끝도 없다. 홍명섭은 종이 발의 작품들 ‘脫?題’에서 parasite라는 언어적 구조체계의 이중성을 지시한다.

종이는 언젠가 썩고 소멸된다. 인체인 발도 종이와 마찬가지로 결국 썩어서 대지로 돌아간다. 무엇인가가 썩을 때 기생충(parasite)이 생겨난다. 해체는 parasite를 발생시킨다. 그러나 parasite를 para와 site로 나누어 분절하면 para는 수정, 변화를 의미하는 접두어고, site는 위치, 공간을 뜻한다. 그러면 의미는 ‘공간(위치)의 변태’로 바뀌게 된다. 이렇듯 홍명섭의 해체는 메타변이다. 

도대체 홍명섭은 무엇을 하는 사람인가. 언어의 유희, 개념의 장난을 일삼는 사람인가, 미술가인가. 개념적으로 질서의 해체를 부르짖으면서도 조형적으로는 질서에 집착하는 모순을 보이는 것으로 보아 분명 그는 미술가다. 그의 개념적 놀이에 흥미를 갖는 건 전적으로 그의 조형예술이 보여주는 탁월한 미적가치 때문이다.

그러나 미술과 철학의 인식체계가 다름에도 불구하고 홍명섭은 관념을 신격화시켜 놓고 노예처럼 고착돼있다. 절대중심을 해체시켜 자유와 민주를 지향하는 듯한 이론이 역설적으로 절대자인 숭배의 대상이 돼버렸다. 그토록 해체와 해체변이를 원한다면 해체에 대한 집착과 숭배로부터 스스로 해체돼야 한다.

홍명섭뿐 아니라 미술계, 사회전반도 마찬가지다. 해체란 용어로 절대권력의 중심화, 탈식민주의란 이름으로 신식민주의를 조장하고, 다원주의의 개념으로 약자를 신음하게 하고 있다. 진정한 해체라면, 노숙자가 매타변이 돼 대통령이 되고, 분절된 para/site로서 서울역 지하도와 청와대가 동격이 돼야하지 않을까.

김현화 / 숙명여대 미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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