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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훈의 조선근대 경제사④]고조선 시대 한민족의 경제활동
[이정훈의 조선근대 경제사④]고조선 시대 한민족의 경제활동
  • 교수신문
  • 승인 2020.07.30 1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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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근대화와 전환기의 지식인들
문화와 역사의 지평에서 바라본 생산성

◇ 연재 구성
Ⅰ. 연재를 시작하며
    Ⅰ-1. 생산성의 인문학
     Ⅰ-2. 공동체와 공공성
Ⅱ. 생산성의 인문학
    Ⅱ-1. 주체성·생산력
     Ⅱ-2. 공동체·창조성
Ⅲ. 생산성과 공공성
     Ⅲ-1. 자본주의 체제에서의 공공성
     Ⅲ-2. 근대화 과정에서의 공공성
Ⅳ. 조선은 왜 가난 하였는가 ?
Ⅴ. 조선의 자생적 근대화 1 : 북학파 지식인
Ⅵ. 조선의 자생적 근대화 2 : 동학
Ⅶ. 대한제국기
Ⅷ. 일제 강점기
Ⅸ. 대한민국 건국의 설계자
Ⅹ. 한국, 세계와 만나다
Ⅺ. 경제개발의 설계
Ⅻ. 중화학공업화 추진 
ⅩⅢ. 한민족경제공동체
ⅩⅣ. 국가전략
ⅩⅤ. 시대정신과 지식인   끝.

《네 번째 주제 : 조선은 왜 가난하였는가 ? 》

인간은 생존을 위해 자신을 둘러싼 세계와 관계를 맺으며 생산 활동을 한다. 생산이란 인간이 생존과 번식을 위해 자연을 자신이 향유할 수 있는 것으로 변형시키는 활동이다. 생산력이란 어떤 대상을 변형시키는 능력이다. 이 능력은 생산이 조직되는 방식 즉 생산관계에 따라 달라진다. 개개의 인간은 그를 둘러싼 이웃관계에 의해서 그리고 이웃한 것들과 어떤 관계 속에 들어가는가에 따라 달라진다. 인간이란 그를 둘러싼 관계에 따라 다른 본성을 갖게 된다.

마르크스는 한 사회의 생산력 발전 수준을 역사와의 관계 속에서 파악하였다. 인간과 자연과의 관계가 노동이며, 생산에 관여하는 인간이 형성하는 관계를 생산관계라 정의한다. 마르크스는 정치적 요소로서의 생산관계를 경제적 측면으로서의 생산력 내부 요인으로 위치시킨다. 즉 생산력은 생산관계가 어떤 형태를 띠는가에 따라 변하는데, 생산관계는 힘의 구조화(국가 또는 경제법칙을 통한)와 힘에 대항하는 대응력이 구조화되는 메카니즘이다.

한 민족국가가 이룩한 경제력은 그 민족이 어떤 자연 환경 위에서 어떤 사람과 어떤 유산을 과거로부터 전승 받았는가에 의해서 결정된다. 과거란 축적된 문화와 정신적 자산을 총칭하는 개념이다. 현재의 한국 사회가 이룩한 경제발전은 어떤 자연환경 속에서 어떤 민족에 의해 어떤 역사를 거쳐 이룩하였는가 하는 과거와 관련된다. 조선은 경제근대화의 출발선에서 어떤 유산을 과거로부터 물려받았는가 하는 점을 고찰된다.


Ⅳ-1. 조선의 과거 : 생산력과 생산관계 (1)
○ 고조선의 생산력

마르크스의 역사발전단계설을 조선의 역사에 적용한 연구로서 대표적인 것은 북한의 역사학자 리지린이 1962년 북경대학에서 박사학위논문으로 저술한 『고조선연구』를 들 수 있다. 리지린의 연구는 신채호가 조선의 강역과 민족형성에 대하여 정리한 연구를 계승하여, 고조선의 정치·경제·사회·풍속에 대하여 학술적으로 체계화하고 대국주의가 지배하는 중국 역사학계에서 승인받으면서 식민지사관을 청산하는 계기를 마련하여 주목받았다.
이 연구에서 리지린은 선진(先秦) 시대의 사서에서 청대(淸代)의 금석학까지 중국의 사료를 망라하여 섭렵하고, 사료비판을 가하면서 BC 5세기부터 BC 2세기 초 기간에 조선의 지리와 국경은 어떠하며, 어떤 모습의 사회를 구성하고 있었던가를 개관하였는데, 고조선 사회의 생산력에 관한 연구가 포함된다.

리지린의 연구에 따르면, 고조선의 강역은 요동 요서 하북성 북부를 포괄한 지역으로서, 압록강 이북으로부터 열하 내몽고 일대에 이른다. 그 근거로서 관자(管子)의 발조선(發朝鮮), 산해경의 열양(列陽), 전국책의 조선(朝鮮)요동(遼東) 기록을 들었다. 한초(漢初)의 요수(遼水)는 현재의 난하(灤河)이고, 패수(浿水)는 현재의 대릉하(大陵河)임을 고증하였다. 고조선의 수도 왕검성은 개모성(蓋牟城 현 요동 개주시)로 비정하고, 위만조선의 수도였던 요동군 험독(險瀆)은 창려(昌黎) 부근으로 비정한다.

고대 조선의 민족과 경제활동에 대하여 조선은 BC 10세기경 예·맥·한의 세 개 종족을 형성하였고, 언어와 풍습이 같았다. 예와 맥은 기원전 3천년 경에 정착 농경 생활을 시작했다. 내몽고 적봉 지역에서는 기원전 3천년경에 농경 종족이 거주했는데 동호(東胡)의 선조이다. 마르크스가 분류한 아세아적 고대 노예제 경제에 해당한다. 고조선이 통일 국가가 되기 전에 몇 개의 작은 나라를 이루었는데, 개국(蓋國), 청구국(靑邱國), 숙신국 등이 그것이며 나중에는 고조선과 진국을 이룬다. 맥족은 기원전 3세기 초까지 내몽고 열하지역과 북방 산간지대에 거주했다. 맥족은 고리국(高離國)을 형성하였고 부여는 고리국으로부터 갈려져 나왔다.

고조선인과 맥국인은 기원전 12세기 이전에 청동기를 사용했다. 조선은 평야지대에 위치하여 농업이 발전했다. 요양 유적에서 철제 농기구가 발굴되었다. 148건의 농업생산도구와 10건의 수공업 도구가 포함되는데 이들 철제도구는 조선의 높은 생산력을 반영한다. 맥족의 후예는 송화강 이남으로 이동하여 부여를 건국하는데, 하호(下戶)는 생산대중으로서 국가재정의 기초였다. 부여와 고구려는 모두 고리국(맥족)의 후신국이다. 고리국에는 아시아적 공동적 생산관계가 형성되었다. 하호는 농노적 형태의 민으로서 생산계급이었다. 고조선에도 기원전 1천년 경에는 총체적 노예제가 존재했다.

전국시대 동란기에 조(趙), 제(濟), 연(燕)으로부터 수만 명의 한인들이 전란을 피해 고조선으로 이주하였다. 한인의 이주는 고조선이 살기 좋은 나라였음을 반영하는데 높은 농업생산력이 배경이다. 즉 고대 조선의 여러 국가는 철기문명의 농업국가로서 고대노예제적 생산관계가 지배적이었다. 한반도에 거주한 삼한인 역시 철제화폐를 사용하고 해외무역을 할 만큼 상업경제가 활발하였다.

○ 역사적 시대구분
농업국가 조선의 사회성격을 결정하는 요소로서의 생산관계에 주목하여 한국사의 시대구분을 살핌으로써 역사발전과정을 개관하는 연구가 1960년대 남한의 역사학자에 의해 행해졌다. 농민의 존재형태, 토지지배관계, 공동체적 유대관계와 얽히는 생산조건 등이 종합적으로 고려되어야 한다. 이와 관련된 한 연구는 전근대사회에서 일반 농민이 사회적 생산의 주된 부분을 담당한 시기를 고대노예제사회로 설정한다. 노예제가 구현되는 양식은 해당 민족의 역사적 조건과 상황에 따라 다르다. 신분적으로는 노예가 아니었으나 특정 시기 일반농민이 당하는 사회경제적 수탈의 본질이 노예제적인 것이라면 이들 농민의 사회경제적 지위는 노예와 다를 바 없다. 토지를 소유하여 자영하는 고대노예제적 농민은 아시아적 노예의 형태이다.
고구려의 하호나 신라의 부곡민 등은 국가에 예속되었다. 신라통일기 농민은 공동체적 유대관계에 얽힌 촌락으로서 국가에 예속되었다. 고려 전기에도 생산관계에서는 변화가 없어 농민의 노동력 수탈에 초점을 두었다. 고려 무인정권이 출현하기 전에는 사회적 생산관계는 농민 대 토지소유자의 관계가 주류를 형성하지 않았다. 토지에 대한 지배는 자영농민이 자기 땅을 경작해서 생계를 마련하고 잉여를 국가가 수취하는 형태로 이루어졌다.
수취양식은 농민 대 국가권력이라는 생산관계에 의해서 규제되는 것으로 보았다. 국가가 농민 노동력을 노동력 자체로서 수탈하는 방식과 토지를 매개로 일종의 지대 형식으로 농민을 수탈하는 방식이 있었다. 동아시아는 농업사회였으며, 국가재정은 조·용·조(租·庸·調)에 의해 충당되는 공통점을 지닌다. 고려시대 이후 조세(租稅) 공부(貢賦) 역역(力役)으로 명칭이 바뀌지만 내용적으로 국가가 농민에게 지대를 징수하는 성격이다.
시대구분은 국가권력이 농민을 수탈하는 방식 변화를 기준으로 한다. 전근대사회에서의 생산관계는 국가권력 대 농민관계가 주축을 이루고 사회적 생산을 담당하는 계층은 농민이다. 농민에 대한 국가권력의 관계가 주된 생산관계를 이룬다. 생산관계는 사회계층을 결정한다. 생산관계에 있어 농민에 대한 국가권력의 지배는 국가가 지주로서의 의제적 기능이 발휘된 것이다.
삼국시대 이래 고려중기 무신집권기까지가 고대노예제적 사회구성이 지속되며, 무신집권기 이후 고려말기에 이르는 기간이 고대노예제적 사회구성이 중세봉건제적 사회구성으로 전환되었다는 주장이 역사학계에서 제기되었다. 연구에 따르면 변환의 배경으로 농업기술에서의 변혁에 따른 생산력 발전을 지목한다. 농작기술의 발전 즉 모내기, 건식 직파법, 한전(旱田) 다모작의 농업기술이 보급되어 생산력이 증대된 결과이다. 농민의 독자적 농사가 노예농업보다 생산력에서 우위에 있음으로 해서 변화의 여건이 마련된다.


Ⅳ-2. 조선을 가난하게 만든 요소 : 성리학과 선비

한민족은 전통으로부터 인간존중과 지혜를 소중히 여기는 태도를 물려받았다. 민족 지도자들은 이러한 민족 특유의 정신을 바탕으로 위기에 대처하고 공동체 구성원의 삶이 풍요로워지는 방안을 도모한다. 고구려·백제·신라가 한(漢)·수(隨)·당(唐)에서의 지역패권 추구에 대항할 수 있었던 국가 역량은 농업부문에서의 높은 생산성이었다. 그러나 천년 후 조선 말기에 이르러 조선의 농업생산력이 일본의 절반 수준, 중국의 65% 수준으로 낮아져 있었다. 서인과 노론이 국정을 주도하는 인조 이후 200년 동안 조선의 생산력은 감퇴한다.

○ 반유교적 지배체제
조선 건국세력은 이상적 사회를 건설하자는 개혁의지에서 출발했으나 세조 대에 토지제도의 근간이 변질되고, 선조 대 이후 사림파는 “고상한 이야기, 훌륭한 말”을 들먹이며 붕당을 결성하는데, 권력 다툼 과정에서 국가제도가 정쟁의 도구로 전락한다. 제도의 공공성이 훼손되어 국정을 비생산적 정쟁으로 소모시키고 통치의 효용성과 실용성이 낮아졌다. 인조 대에 이르러서는 조세제도가 계층적 수탈 도구로 변질되어 조선사회는 저생산성의 구조 하에 처한다. 이어서 세도정치와 민란의 시대로 접어들면서 조선에는 부패의 구조가 유교 질서의 찌꺼기로 남는다.

조선 중기 이후 조선의 지도체제는 유교의 가르침과 상반되어 반유교적이었다. 유학 경전에서 말하는 선공후사(先公後私)라든지 서(恕)가 현실세계에서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유학에서는 다른 사람에게 어짊을 베풀고 그것을 확대하여 사물에까지 사랑함을 베풂으로써 인간은 스스로를 실현한다고 가르친다. 반면 현실세계에서는 유학자 자신의 정치적 사회적 특권을 유지하기 위하여 서얼차별을 제도화하였다. 정승이 서적의 유통을 가로막는 결정을 내리고, 지주가 국가권력과 결탁하여 농민의 생산품을 수탈하였다. 차별과 배제, 수탈이 가능한 사회구조는 반유교적이다. 이는 유학자에 의해 행해지는 유교의 찌꺼기였다.

비변사(備邊司)는 붕당이 국가기구를 무력화시키고 노론이 권력을 독점하는 매개체로 쓰였다. 비변사는 외적의 침입 시 국경 수비를 맡은 관찰사에게 군국기무의 권한을 위임하는 비상대책기구로로서 국왕은 비변사의 결정에 순응하는 것이 관례였다. 임진왜란 이후 비변사는 상시 조직이 되어 의정부를 거치지 않고 국정을 운영하였다. 정규 정부기구는 역할 수행을 하지 못했고 비변사를 장악한 노론이 국정을 독단적으로 이끌었다.
         

 

대원군 이하응(1820-1898)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대원군 이하응(1820-1898)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숙종 대 이후 지방관이 권한을 남용하여 국가제도를 농민 수탈 도구로 전락시켰다. 농민은 높은 세금에 시달렸으나, 납부된 세금은 국가재정으로 유입되지 않았다. 조선 말기 중앙정부는 토지와 인구에 대한 정보를 갖추지 못하여 국가재정을 조달하는 능력을 상실하여 만성적 재정적자로 어려움을 겪었다. 조선의 지방 수령직(군수 현감)은 300여 개이고, 고위직은 20-30개였는데, 유력 가문이 대를 이어 차지하는 세습 경향이 뚜렷했다. 정부가 국가재정을 건실하게 유지하는 것은 300개 지방관과 20여 개의 가문을 집중 관리하면 해결할 수 있는 목표였다.

조선의 경제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조세제도의 전면적 개혁이 필요했다. 사대부와 대지주가 소유하면서 세금을 내지 않는 토지에 대하여 징세를 하거나 토지를 재분배하는 방법이 대안이었다. 대원군은 지주계층과 정면 대결하여 토지개혁과 조세개혁을 통해 통치체제를 개편하고 국가재정을 건실하게 유지하는 기회를 회피하였다. 이를 통해 조선은 자생적 개혁을 이루어 제국주의 침입에 대한 대항할 수 있는 국가역량을 축적할 수 있었다.

희생이 따르는 개혁이었겠으나 천주교 박해보다 많은 피를 흘리지는 않았을 것이며, 동학전쟁 시 일본군에 의해 학살된 농민과 대한제국의 소멸과 함께 순국한 의병을 감안할 때 대원군이 지주계층과의 정면 대결을 통해 국가역량을 회복하지 못한 기회의 상실은 근대사의 어두운 그림자를 남겼다. 한의 침략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연개소문의 패도가 등장하였듯이, 구한말 제국주의의 침략에 대응할 수 있는 조선의 힘은 대원군의 패도정치가 유일한 대안이었다.

○ 역사변조

역사에는 민족에게 작용하는 의미와 어느 곳으로인가 향하는 정신이 담긴다. 역사정체성은 시대를 역사에 비추어 해석하는 정신인데 유학자는 한민족의 역사를 변조하여 위축시켜 주체성을 훼손시켰다. 조선 민족의 기원과 그 성장에 관한 조선 고유의 사화(史話)를 무시하였다. 동아시아 고대사에서 커다란 위상을 차지하였던 고조선의 역사를 자진해서 축소하고 단군조선은 물론 고구려 · 백제 · 신라가 중국 대륙에서 패권을 다투던 역사기록을 축소하여 역사 계통(史通)을 변조하였다.

조선의 왕 가운데에는 세조처럼 어린 조카를 축출하고 왕위를 차지하거나, 반정(反正)을 통해 왕위를 차지한 중종과 인조 그리고 스스로 자신의 왕위를 불안하게 여긴 선조는 정통성 시비를 불식시키기 위해 명 황제에게 과대하게 사대하였다. 조선역사에 대한 이러한 인식과 모화사상은 중국 대륙을 단군과 삼국이 지배했다는 역사기록이 불충하다고 여겨 사서(史書)를 수거하여 불태우고, 역사서를 변조하였다.

한민족의 활동 영역을 협소한 범위에 가두어, 대륙의 다른 민족과 다른 문화와의 교류를 단절시키고, 사고 범위를 아시아의 외진 구석에 한정시켜, 폐쇄적 문화 형성을 자초하였다. 유학자의 무리가 조선을 중국에 종속되는 존재로 꾸미자  조선인은 ‘자기가 누구인지’, ‘어디서 왔는지’, ‘다른 민족과 어떤 관계를 지니는지’,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가늠하지 못하는 무기력한 존재가 됨으로 해서 현실 대응력을 잃었다. 조선인은 동아시아 한쪽 구석에서 다른 세계와 교류 없이 편협한 사상과 태도로 지배계층의 뜻에 복종하며 살아가는 것 이외의 다른 삶의 대안을 생각하지 못하는 허약한 조선인상을 형성하였다.

○ 선비의 퇴락

조선조에 유학이 변질되는 것은 고려조에 불교가 이익추구의 수단으로 변질된 것과 성격상 동일하다. 고려조에 불교 사원이 거대하고 화려해지었듯이, 조선조의 서원도 유학자의 사회경제적 이익을 지키는 수단으로 변질되었다. 이처럼 유학자는 고려 말 새로운 이상국가를 건설하고자 했으나 세조 대를 거치면서 제도 본연의 취지는 실종되었다. 사회 중심부로서 전통적으로 지도력을 행사하는 선비는 공동체의 복지를 위하기보다는 기득권을 훼손되지 않는 데에 목적을 두었다. 즉 지배질서가 바뀌지 않도록 잠재적 변화의 계기를 차단하였다. 이를 위해 균등(均等)이란 명분으로 인간 욕구를 억제하고, 가난을 당연시하는 행태가 피지배계층에게 강압적으로 작용하였는데, 논리체계는 인간은 하늘의 이치를 따라야 한다는 전제 위에서 사변(思辨)으로 조작되었다.

인간 활동에서 발전의 계기를 차단하였다. 그 시대를 대표하는 착한 선비가 백성의 삶을 걱정하며 해결방안을 제시한 것은 무능이다. 백성들의 삶을 깊은 배려심에서 살핀 결과 ‘생산성을 높이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 것이 행복하게 사는 길’이라 제시한다. 조선에 선비가 늘어났지만 백성의 삶에 대한 기여도는 변화가 없었던 것은 선비가 이러한 관점으로 민생(民生)을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선비는 균등한 생산(均産)이 바람직하므로 생산수단까지도 고르게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며 생산성을 높이는 도구 사용을 반대하였고 의도적 무능을 보편화하였다. 오히려 이익은 ‘물자가 항상 부족하고, 자신이 천하다고 생각해야 힘든 일을 마다하지 않고 열심히 일한다’ 고 주장한다. 즉 모두가 가난하고 미천한 평등 상태가 인간이 부유하고 풍족하게 사는 방법이라는 사고이다. 백성의 삶을 피폐하게 만드는 누추한 사고이다.
사람은 하늘의 뜻에 따라 살아야 한다는 선비의 주장은 나라를 의미 없는 전쟁에 휘말리게 하여 백성의 생활을 피폐하게 만들었다. 요컨대 선비가 지칭한 하늘이란 그들이 권력을 행사하는 논리였고, 타당하지 않은 정책을 밀어붙이는 논리적 정당성의 근거였으며, 그들의 이익을 지켜주는 배타적 사변(思辨)의 근거였다.

조선 선비들은 농민이 부를 축적하지 못하도록 억압하였다. 경제주체의 역량이 증대되지 않으면, 생산성은 높아지지 않는다. 조선의 선비는 의도적으로 무능을 추구한, 생산성에 반하는 존재였다. 조선의 선비는 농업사회에서 근로의욕을 자극하는 동기는 굶어죽을 수도 있다는 공포라 여겼다. 저생산성의 생산구조에서 비롯되는 문제를 개인에게 떠넘겨, ‘부지런해야 살아 남는다’ 는 협박이 일상적으로 이루어졌다.

하늘을 본받아 산다는 고귀한 이상은 정치 세계와 경제 영역에서 가장 위험하고 우둔한 결과를 가져왔다. 생소한 외부세계에 대하여 적대시하는 가운데 인간의 욕구를 경계하고, 생산 증대를 통한 욕구의 충족과 재화 축적이 가져올 사회변화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과 과도한 경계심이 선비로 하여금 현실성과 실용성이 결여되는 판단으로 이끌었다. 농업생산력은 인조반정 이후 200년 동안 위축되어 백성의 생활수준이 궁핍해졌다. 생산 활동을 하찮게 여기고, 생산성은 낮고, 농민은 가난하고, 정부는 무능했다. 그 한 가운데에 선비가 위치했다.

 

 

이정훈 /
이정훈 / 전 관동대학교 교수. 한국생산성본부 생산성연구소장, 노동연구실장을 역임했다. '패러독스 경영연구' 등의 책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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