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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희숙의 숨겨진 그림 이야기] 권력과 노동자 누구를 선택할 것인가? 벨라스케스와 쿠르베
[박희숙의 숨겨진 그림 이야기] 권력과 노동자 누구를 선택할 것인가? 벨라스케스와 쿠르베
  • 박희숙
  • 승인 2020.07.21 10:0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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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녀들'--1656년, 캔버스에 유채, 318*276, 스페인 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 소장
'시녀들'--1656년, 캔버스에 유채, 318*276, 스페인 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 소장

요즘 신문이나 방송에 많이 등장하는 용어 중에 하나가 진보나 보수냐다. 정치적 성향에 따라 유행가 가사처럼 종로로 갈까요 영등포로 갈까요다. 

정치적 성향은 화가에게서도 나타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예술가는 정치와 별개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예술가도 자신의 신념에 따라 행동하는 인간이다. 그들의 선택은 예술가의 인생이나 예술작품에 막대한 영향은 끼쳤다. 

먼저 권력 지향적인 화가를 꼽으라고 한다면 스페인 황금시대를 열었던 벨라스케스다. 그는 귀족이 되고 싶어 평생 끊임없이 지위를 향상시켰다.  

벨라스케스는 하급 귀족 출신으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뛰어난 재능을 보여 화가가 되기로 한 벨라스케스는 프란시스코 파체코의 도제로 들어간다. 파체코는 천부적인 재능은 없었지만 당대의 화가들과, 지식인, 귀족들과 친분이 두터웠다. 

파체코는 일찍이 벨라스케스의 재능을 알아보고 그에게 많은 지참금을 주면서 딸과 결혼을 시킨다. 결혼 후 벨라스케스는 장인 파체코의 자문을 받아 초상화에 전념을 한다. 파체코가 벨라스케스에게 초상화에 전념하라고 자문한 까닭은 초상화를 그리면서 인맥을 쌓을 수 있고 더 나아가서는 권력의 중심에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역사 속에서 화가의 역할은 현대 화가의 역할보다 더 사회적으로 책임이 컸다. 과거의 왕족의 초상화는 지금의 정치 포스터 같은 역할을 했기 때문에 어떤 예술가에게 맡기느냐에 따라 이미지가 달라졌다. 그래서 왕족이나 귀족들은 자신이 원하는 이미지를 창출하는 화가가 필요했고 화가는 수입의 안정을 위해 궁정에서 일하기를 원했다. 그때부터 궁중 예술가라는 직업이 등장하게 되었다. 왕족들은 유능한 화가들 곁에 두고 자신의 이미지를 관리하기 위해서다. 

또 화가에게 궁정화가의 자리는 놓칠 수 없는 매력적인 직업이다. 궁정화가가 되면 다른 화가보다 뛰어난 능력(예술가로서)이 입증되는 것은 물론이고 돈 많은 의뢰인을 고정적으로 확보할 수 있어 경제적으로 안정되었기 때문이다. 

벨라스케스는 장인의 도움으로 권력의 중심부에 다가가기 위해 마드리드로 이주한다. 마드리드에서 훌륭한 후원자를 찾아 기반을 잡고 싶었던 벨라스케스는 드디어 1623년 펠리페 4세에 의해 드디어 궁중화가로 임명된다. 펠리페 4세는 벨라스케스의 재능을 믿어 의심치 않았고 많은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를 궁정화가로 임명한다. 

벨라스케스의 주요 임무는 펠리페 4세의 초상화를 그리는 것이었다. 그는 왕의 욕구에 완벽하게 수행했다. 

벨라스케스는 사회적 지위를 획득하기 위해 그는 끊임없이 직위를 쌓아 올렸다. 그는 자신의 지위를 흔들 수 있는 화가들을 경계해 주변의 화가들을 너그럽게 봐주거나 재능 있는 화가를 키우지 않았다. 자신만이 스페인 왕가의 초상화를 담당하기를 원했던 것이다.

벨라스케스의 정치성은 당시 사람들에게 시기심을 불러일으키지만  그의 높은 지위 때문에 반대하지는 못했다. 그는 기사단 제복을 펠리페 4세에게 하사받을 정도로 평생 야망을 실현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벨라스케스가 자신의 야망을 드러낸 작품이 '시녀들'이다. 

화면 왼쪽 팔레트와 붓을 들고 서 있는 남자가 벨라스케스다. 작업실로 꾸민 알카사르 궁전의 한 방 안에서 대형 캔버스 앞에 서서 그림을 그리고 있다. 

화면 중앙에는 왕위 계승자인 마르가리타 공주가 드레스를 입고 벨라스케스를 외면한 채 서 있다. 마르가리타 공주는 펠리페 4세의 딸로서 당시 4세다. 

왕비의 시녀 도나 마리아 서르미엔토가 무릎을 꿇고 공주에게 물 잔으로 건네고 있고 시녀 도나 이사벨 데 벨라스코는 공주의 뒤에 서 있다. 그녀 뒤로 희미하게 서 있는 사제와 수녀는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화면 오른쪽 검은색 드레스를 입고 일그러진 표정의 여자 난쟁이 마리 비르볼라가 있다. 여자 난쟁이의 뚱뚱한 몸과 어린 마르가르타의 공주의 몸과 비교되고 있다. 

그녀 옆에는 남자 난쟁이 니콜라시코 페르투사가 졸고 있는 개의 등에 발을 얹어 놓고 있다. 당시 유럽의 궁정에서는 난쟁이가 광대의 역할을 하고 있었는데 그들을 궁전에 두는 것이 유행이었다. 

작업실 뒤편에는 대형 그림이 두 개가 걸려 있는데 벨라스케스의 사위 마소가 루벤스의 작품을 모방한 그림이다. 

그림 아래 검은색 프레임으로 된 거울에는 펠리페 4세 내외의 모습이 보인다. 거울 오른쪽 출입구 옆방으로 이어지는 계단에는 왕비의 시종 호세 니에토가 서 있다. 

미술사에서 논란이 되는 장면은 거울 속의 국왕 내외의 모습이다. 이 작품은 실제로 펠리페 4세가 국왕 내외가 그림의 모델을 서고 있는 마르가르타 공주를 위로하기 위해 작업실을 찾았던 일상을 그린 것이지만 화면 속에서는 국왕 내외는 거울 속에만 있다. 

당시 스페인의 궁정 회화에서는 부부의 초상화는 거의 그리지 않는 것이 관례였기 때문에 벨라스케스는 국왕 내외를 직접 보여주지는 않지만 거울 속의 국왕 내외를 빛으로 둘러싸인 모습으로 표현했다. 빛은 군주의 존엄성을 나타낸다. 거울은 지혜를 상징하는 도구로서 국왕 부처의 지혜를 암시한다. 

디에고 벨라스케스(1599~1660)는 이 작품에서 그의 가슴에 그려진 붉은색 십자가는 성 야고보 기사단의 문장이다. 하지만 실제로 벨라스케스는 이 작품을 제작하고 2년 후에 기사단의 문장을 받았다. 

권력자의 확고한 후원 덕분에 화가의 신분을 뛰어넘어 당대 최고의 영광을 누렸던 벨라스케스와 달리 노동자 편에 섰던 쿠르베는 화가로서 성공보다는 자신의 신념에 따라 사회 개혁을 꿈꾸었다. 

프랑스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난 쿠르베가 사회 소외 계층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사회주의자 프루동 때문이다. 쿠르베는 처음에 푸리에 사상에 심취했고 뒤에는 당시 전 유럽에 이름이 알려진 사회주의자 프뤼동 사상에 매료되었다. 

쿠르베는 화가로서 만족하지 못했다. 그는 자신이 공화주의자라는 것을 알리기 위해 그림을 도구로 삼는다. ‘타고난 공화주의자’라고 자처 할 만큼 사회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쿠르베는 자신의 신념을 표현하고자 작품 속에 가난한 농부나 노동자를 등장시킨다. 기존의 역사화에서 볼 수 있었던 개념에서 벗어난 그의 사실주의 작품은 회화사의 커다란 스캔들이었다. 

쿠르베의 정치적 성향이 뚜렷하게 나타난 작품이 '화가의 아틀리에'다. 이 작품은 쿠르베의 작품 중에 가장 대중적으로 알려진 작품이다.

'화가의 아틀리에'-1855년, 캔버스에 유채, 359* 598, 파리 오르세 미술관 소장
'화가의 아틀리에'-1855년, 캔버스에 유채, 359* 598, 파리 오르세 미술관 소장

이 작품은 살롱전 심사위원들에게 거절당했지만 1855년 만국박람회장 밖에서 기획한 특별전에서 가장 관심을 끌었다. ‘내 예술 인생 7년을 종합하는 실제 우화’라는 부제로 쿠르베는 자신의 의도를 분명히 밝혔다. 

'화가의 아틀리에' 이 작품은 세 부분으로 나누어진 대작이다.  

쿠르베가 그린 풍경화가 화면 중앙에 있고 그림을 바라보는 누드모델과 어린 소년이 그 옆에 있다. 

왼쪽에는 가난한 자들과 부자, 노동자들이 있다. 그들은 쿠르베의 정치적 사상과 관련된 일반인들로서 그의 그림의 소재가 되었던 사람들이다. 하지만 쿠르베는 일반 사람들과 함께 개와 함께 있는 루이 나폴레옹, 맨 왼쪽에 서 있는 사람이 국방상 아쉴드 폴드 등 혁명가를 묘사함으로써 서로 다른 계층 간의 갈등을 함축적으로 표현했다. 

화면 오른쪽에 있는 사람들은 쿠르베의 친구이자 사회의 영향력이 있는 지식인들을 그려 넣었다. 화면 오른쪽 끝 책을 읽고 있는 사람이 시인 보들레르, 의자에 앉아 있는 사람이 문인이자 언론인인 샹플뢰리, 사회주의자이자 무정부주의자였던 프루동 등 지식인들이다. 

귀스타브 쿠르베(1819~1877)는 지식인들을 사실적으로 묘사해 정치적 유대감을 강하게 표현했다. 이 작품 속의 인물들은 어떤 상호 연관성이 없이 모여 있지만 서로 단절되어 있다. 그의 정치적 신념이 만들어 낸 작품이다. 

쿠르베는 1848년 혁명과 제2공화정을 짓밟아버린 나폴레옹 3세에게 반발을 느껴 정치적으로 활동하게 된다. 예술가의 삶보다 사회 개혁의 정열에 불타올라 정치적 소용돌이에 휘말리면서 그것이 그에게 돌이 킬 수 없는 파란만장한 삶을 선사한다. 

쿠르베의 정치적 신념에 따라 그림을 그렸지만 그림은 팔리지 않았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 중에 하나가 돈이다. 화가도 돈이 있어야만 그림을 계속해서 그릴 수 있기 때문이다. 

쿠르베는 신념을 받쳐줄 돈이 필요했다. 그는 화상을 매개로 한 유통망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기로 한다. 당시 화가의 그림들은 공식적인 살롱전 체제에서만 거래되었다. 쿠르베는 자신의 작품 최저가를 정했고 미술상은 고객들에게 최저가의 두 세배 되는 가격으로 팔았다. 이익을 많이 남길 수 있었던 쿠르베의 작품은 빠른 시간에 높은 가격으로 팔려나가 그의 생활에 도움을 주었다. 

쿠르베의 그림이 화상들에게 팔릴 수 있었던 것은 부르주아 취향을 저격했기 때문이다. 부르주아들은 정치적 신념이 있는 쿠르베의 노동자의 일상을 그린 그림을 사지는 않았지만 그가 그린 누드화를 선호했다. 쿠르베가 그린 가장 유명한 누드화 '세계의 기원'도 부르주아의 취향에 맞게 그려진 것이다.

권력이든 노동자든 본인의 신념에 따라 선택한 것이기 때문에 누구는 옳고 누구는 바쁘다고 평가할 필요는 없다. 중요한 것은 신념을 이어갈 재원을 마련하는 일이다. 

박희숙 화가, 전 강릉대 교수.
박희숙 화가, 전 강릉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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