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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성'을 추구하는 예술가들
'식물성'을 추구하는 예술가들
  • 이은혜 기자
  • 승인 2004.02.26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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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욕의 거리에 녹색가치를

근래에 ‘식물성’을 타이틀로 내건 전시회가 여럿 있었다. ‘식물성展’(2002.2.2~3.2, pkm갤러리), ‘식물성의 사유展’(2002.3.6~4.25, 갤러리 라메르), ‘사군자 탈사군자展’(2002.3.8~23, 가람화랑) 등이 연달아 선보였다. 배병우, 김홍주, 데이비드 내쉬 등 사진작가들은 새벽안개를 뜷고 하늘로 꿈틀거리는 송림, 생생한 색소와 엽록소를 머금은 식물, 꽃들의 갖가지 자태들을 재현하는 작품으로 식물의 다양한 면모들을 보여줬다. 이들은 “환경파괴와 탐욕이 지배하는 사회에 식물적 가치를 심고자 한다”며 미적 토대로서의 ‘식물성’을 내세웠다.

“들판으로 나를 던지는 예술”

‘식물성의 사유展’과 ‘사군자/탈사군자展’은 식물성을 동양이라는 입구로 흘려보낸다는 점이 특징이다. 전자는 농경문화에 대한 동경에서 자연과 삶의 이치를 끌어내려 했고, 후자는 매?난?국?죽이라는 대상을 현대적으로 묘사하면서 우리 주변의 자연을 다시 사고했다. 둘 다 식물의 나약하고 수동적인 이미지를 벗겨내고 지구 생태계를 조절해주는 하나의 원리로서 주목했다.

몇몇 예술가 그룹에서도 ‘식물성’의 미학을 읽어낼 수 있다. 공주지역의 두 작가그룹이 대표적이다. 우선 대성리 작가들. 2001년 ‘대성리展’에서 볼 수 있듯, 이들 작품은 “인간의 오만이 부른 자연에 저항하는 생태계의 메커니즘을 형상화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구림마을 프로젝트, 공주 원골마을 프로젝트, 원주의 숲과 마을 미술축전 등에서 자연과의 교감이 돋보인다. ‘野投그룹’ 역시 이 지역을 중심으로 1981년부터 활동해오고 있는 작가들이다. ‘야투’란 '들에 인간을 던지고, 들은 인간에게 던진다'는 뜻으로, 이들은 마을의 논두렁, 토담, 개울 등을 무대 삼아 작품활동을 하고 있다. 풀을 베어 쌓아둔 모습, 밭갈이의 형태, 장작의 모양, 개발 정책에 대한 경고로 포장도로 양쪽에 울퉁불퉁한 돌을 올려놓거나 시멘트벽에 흙덩이 붙이기 등의 설치작업을 한다.

정기용 作, '영월 구인헌', 2000. ©
건축분야에서는 생태건축이나 친환경적 건축이 거론된 지 이미 오래다. 그렇다면 어떤 작품들이 ‘식물성’이라는 기질을 드러내고 있을까. 건축가들은 ‘자연’ ‘생태’ ‘흙’ ‘물’ 등을 화두로 삼지만, 그러나 단순히 순환 가능한 재료를 사용하는 데 그치는 게 아니라, 주변 환경을 활용하거나 적극적인 조화를 꾀하는 양상을 보인다. 승효상, 이일훈, 정기용의 작업들이 이런 류의 것으로 손꼽힌다. 양상현 순천대 교수(건축사)는 그 중에서도 정기용의 작업에 주목하는데, “정기용은 자신의 오랜 숙제이기도 했던 ‘흙집 짓기’를 두 채의 집을 통해 실험적으로 보여주는데, 무엇보다 흙이 시각적, 심리적으로 인간의 본능과 딱 맞는 생태적인 것이다. 실험적 작업이기에 풀어야할 과제는 많지만, 가능성과 과제를 동시에 제시하는 작품이다”라고 평한다. ‘춘천 자두나무집’(2000)과 ‘영월 구인헌’(2000)은 식물성의 미학을 잘 드러내 주는 대표적인 작품들이다.

식물성은 문명과 자연을 매개하는 ‘중간계’

‘에코페미니즘’ 계열 작품에서도 멈춰 설 필요가 있다. 왜일까. 여성성과 식물성은 ‘서로 通하였기’ 때문이다. 미술평론가 이선영은 “아직 하나의 ‘이즘’을 형성할 만큼 에코페미니즘이 활발한 건 아니지만, ‘여성성’과 연관시킨 몇몇 실험은 주목할만하다”면서, 김주연의 작품을 꼽는다. ‘異熟’(2002)이라는 설치작품인데, 하얀 여성의 드레스에 열가지 식물의 씨앗을 심어 식물이 지속적으로 성장?소멸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여기서 식물성은 끈질기게 순환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작업은 여성성이 모성 센티멘탈리즘으로 빠질 수 있기에 위험한 측면이 있다는 양가적인 면도 빼놓지 않는다.

자연과 생태의 가장 속 깊은 곳에 자리한 물(水)을 인간과 매개해주는 가장 일반적이면서도 순수한 매체로서 식물성이라는 코드는 우리 시대의 화두가 되고 있다. 하지만 이 개념은 동물성과 대립되는 개념으로 도식화되거나, 자연으로의 복귀와 같은 고리타분한 환원주의로 나타나기도 한다. 강수미 홍익대 강사(미학)는 “유사 친환경주의, 유사 자연주의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또한 단순히 ‘느림의 미학’과 같이 신선놀음의 문구들도 있다. 단지 추상적 감수성만 갖고 있는 작가들의 경우 작품들은 구별할 필요가 있다”라며 시류에 의해 발명되고 유행을 타고 있는 ‘식물성’의 흐름들을 비판한다.

이은혜 기자 thirteen@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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