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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비평: 月田 장우성을 재평가한다
미술비평: 月田 장우성을 재평가한다
  • 장정란 단국대 미술평론가
  • 승인 2004.02.23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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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시게, 空白에 드리운 墨의 서정을

국립현대미술관의 '한중대가 장우성, 李可染'展(2003.11.19~2004.2.29)을 봤다. 우선 둘의 비교 전시가 효과적인지 의문이었다. 먼저 畵目에서 이가염(1907-1989)은 산수가 주항목인 산수작가이며, 장우성(1912-)은 화조, 동물, 풍경 등을 간략한 문인화 방식으로 그리는 작가다. 이가염은 기본적으로 문인화를 비판한 사람이며 장우성은 문인화를 그의 本으로 삼고 있다.

동양화에서 산수화와 문인화를 단순히 화면상으로 비교할 수 없다. 산수화를 논할 때는 筆墨의 활용성으로 그 감상의 本을 논해야하고, 문인화는 작가의 정신성을 우선 논한다. 동시대에 한중화단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는 이유로 전시가 기획된 것 같은데, 서로 다른 그림의 태도와 필목으로 인해 두 작가의 차별성은 감상자들에게 올바로 전달되지 않았다. 깊고 검은 이가염 산수화의 墨色구현은 장우성 문인화의 간략한 묵색구사와 비교될 수 없다. 오히려 이가염은 한국근대화단에서 묵색의 다양함을 이룩한 산수화가와, 그리고 장우성은 중국근대화단의 문인화가와 비교 전시했다면 감상자들이 이해하기 쉬웠을 것이다. 어쨌든 이 전시에서 이 시대 최고 문인화가로 인정받는 장우성 그림을 보며 한국적 문인화에 대한 구체적인 논의가 우리 근현대 화단에 있었던가 자문하게 됐으며, 그 논의의 일부를 조망할 수 있었다고 본다.

文人畵와 新文人畵, 그리고 장우성의 근원

우리 근대화단에서 문인화에 대한 이해를 보면 장우성이 초기부터 근무했던 서울대 미대와 관련이 있다. 해방후 화단은 일본적 감각의 동양화를 배제하고 한국적인 동양화를 세우고자했는데 서울대 교수였던 김용준이 문인화에서 그 本을 세운다. 김용준은 한국적 문인화에 대한 방법을 ‘색채는 투명하고 맑게, 線은 분灼構?자유분방하게, 墨이 기본으로 한다’로, 간아하고 청아한 조선정신을 표현하는 것이어야 함을 피력한다.

장우성의 문인화관은 김용준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본다. 1973년 예술원주최 아시아 심포지엄에서 장우성은 한국미술의 특징을 단아, 소박, 청초라고 정의한 것을 봐 그렇다. 장우성은 최근 인터뷰(2000년 10월 15일, 한국미술기록보존소)에서 “해방후 우리 것을 찾자는 생각을 하니 진정한 동양화는 남종화이고, 채색을 거부하는 것은 아니지만 墨을 주조로 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다”라고 술회하고 있다. 아울러 그림은 물체의 재현이 아닌 자기의 사상과 정서를 표현하는 것이라 말하고 있다. 그러나 장우성이 쓴 글들을 보면 자기 사상이나 정서의 근원은 밝히지 않는다. 1996년 1월 8일자 조선일보 인터뷰에서 장우성은 “문인화란 옛 선비들의 정신적, 학문적 배경을 글이 아닌 그림으로 표현한 餘技입니다. 墨등을 가지고 음풍농월을 노래하는 것이 문인화인 것처럼 오해되고 있는데 동양적 교양이 결여된 그냥 붓장난이 문인화가 아닙니다”라고 피력해 문인화를 餘技라 말하고 있다.

이 부분은 장우성이 조선문인들이 餘技로 그렸던 그림들을 문인화로 인식하고 神似의 세계를 추구한 중국 문인화에 대한 이해와 그가 썼던 오창석 그림에 대한 ‘전통양식을 뒤엎는 세찬 筆과 현란한 彩墨의 작품은 현대미의 극치며 당시 젊은이들의 우상’(화단풍상70년)이라고 명명했던 오창석의 신문인화에 대한 이론적 이해는 없었던 게 아닌가 한다. 그렇다면 장우성이 本으로 삼은 건 조선문인화였으며 앞글에서 서술했듯이 조선문인화의 전통적 정서는 단아, 소박, 청초라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장우성의 문인화는 단아, 청초, 소박이라는 정서에 대한 추구일 것이다. 따라서 그의 그림을 보면 필묵에 대한 다양한 연구가 소홀히 취급되고 있음을 본다. 우선 筆은 강약의 구사가 없고 단아한 선이 주류를 이룬다. 墨의 운용 역시 다양한 묵색의 층차가 없고 몇 번의 붓질로 마감한 인상이다. 물론 이는 그가 추구하는 단아?소박이라는 정서를 주지만 문인화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필묵의 묘미는 소홀히 취급당한다는 아쉬움을 준다. 문인화는 神似표현이 本이다. 그러므로 형상은 간략할지라도 그 속에 우주 만물의 성정을 담아내야한다. 그렇다면 필묵의 운용만으로 그 다양성을 표현해야 한다면 필묵의 다양한 구사가 조건이 될 것이다.

이번 전시에 출품된 작품들로 볼 때 장우성의 筆은 단아함으로 일축된다. 이는 그의 대표적 筆로 그의 상징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일정한 筆들로 인해 춤, 신황, 올챙이, 쫓기는 사슴, 노호, 황소개구리들의 일련의 작품들은 그가 쓴 제발을 읽지 않으면 시각적으로 그 내용을 구별할 수 없다. 영웅의 기개를 표현하려했다는 新篁은 제발을 읽지 않으면 그 온건하고 단정한 筆로는 제작의도를 알 수 없다. 老狐나 황소개구리는 더욱 강렬한 筆이 구사돼야 하지 않을까. 화면경영에 있어서도 일정함을 유지하고 있다. 주로 動植物畵에서 보이는데, 대부분 주제가 중심에 배치되고 좌우로 적절한 空白(여백)이 위치한다. 주제와 空白의 유기적인 관계성은 크게 신경쓰지 않고 자연스럽게 空白이 존재한다. 그러므로 편안한 화면을 제공한다. 그렇다면 장우성의 문인정신은 자연대상을 그대로 읽는 것인가. 방법적인 면에서 문인화가 詩 書 畵를 갖춘 것이라면 장우성의 화면은 문인화의 조건을 갖고 있다. 때문에 어떤 평자는 우리나라 최후의 문인화가라고 극찬한다. 장우성의 문인화란 어떻게 이해돼야하는가에 우리 근현대 문인화의 규명이 있을 것이다.

장우성의 작품중 필묵 다양성의 소홀은 앞서 지적했다. 이 점을 무겁게 생각하지 않는다면 그의 그림 중 독특한점은 墨의 서정적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소나기는 수묵의 정서적 상태를 시도한 것이라 볼 수 있다. 殘月, 눈이나 비, 日蝕, 가을밤 등이 이런 유에 속하는데 묵을 정서적으로 확장한 점이 주목된다. 비오는 모습, 눈오는 풍경, 달밤의 모습 등을 수묵으로 구현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런 유의 작품들은 자연현상에 대한 관찰이 선행돼 작가의 정신에 투영된 자연대상을 표출하는 문인화의 태도와는 다르게 인지되기도 하는 부분이다.

관조적 자세에서 시각적 정감으로 전환

이는 장우성이 자신의 문인정신을 특별히 지정하지 않고 자신이 인지한 문인화의 청초, 소박, 단아의 범위에서 문인화를 탐구한데서 온 것이 아닌가한다. 그러므로 자연경물의 다양한 성정탐구보다는 우리 미의식이라 믿는 단아, 청초한 세계로의 실현을 우선순위에 뒀기 때문에 눈이나 비의 성정보다는 그것의 감성적 형상에 몰두한 것이 아닌가한다. 

해방후 장우성은 그가 추구한 단아, 청초, 소박한 화면은 이룩했다. 그러나 이의 정신?당위성은 설명되지 않았다. 물론 이건 중국의 근대 화단처럼 문인화에 대한 새로운 논쟁이나 정의가 없었고 문인화를 조선선비정신으로 이해했던 우리 근대화단의 이론부재의 척박한 상황에서 장우성이 택해야했던 최선의 해결책이었다.

그러나 그 지점을 지나 장우성식의 문인화를 이룩한 지점이 있다면 1970~80년대의 시각성이 강화된 그림이라하겠다. 앞서 서술했던 소나기, 눈, 비, 등의 작품이다. 중국의 신문인화가 神似에서 思想으로 전환되었다면 장우성의 신문인화는 이 시기에 와서야 조선문인화의 관조적 자세에서 시각적 정감으로 전환되었다고 볼 수 있다.

장우성을 평한 글들에서 그의 현실비판정신을 거론하며 휴전선을 그린 단절의 경이나 오염지대, 단군일백오십대손 등을 예로 드는데, 필자는 이 그림들에서 현실에 대한 스케치만 볼 뿐이지 비판자세는 읽혀지지 않는다. 소재의 선택이 비판정신이 될 순 없다. 그의 화로 또한 일제강점기의 화사한 인물화들, 해방후의 조선문인의 관조자세로 본 단아, 소박한 동물, 식물그림, 이후 시각성이 강화된 감성적 화면 등으로 현실비판과는 거리가 있다.

다만 최근 작 ‘赤潮’와 ‘白魚’에서 이전보다 강화된 주제와 공백의 팽팽한 유기적인 관계성을 보게 되는데 이 부분이 그의 시각적 감성과 함께 그가 추구해야할 신문인화의 지점이 아닌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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