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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홍규의 아나키스트 열전 31]풍요로운 사회보다 정의롭고 공정한 사회
[박홍규의 아나키스트 열전 31]풍요로운 사회보다 정의롭고 공정한 사회
  • 박홍규
  • 승인 2020.07.02 10:0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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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홍규의 아나키스트 열전 31
프루동1

유년시절 빈곤·좌절감이 아나키스트로 만들어
촌놈 혈통 자랑하고 농민 생활 검소함 찬양

신은 폭정과 가난이자 악마라고 결론
팔랑쥬 사회 제창한 푸리에 영향 크게 받아
프루동의 젊은 시절(1940)

파리 리용 역에서 테제베를 타고 네 시간 정도 남동쪽으로 가면 도착하는 열차선의 종점이 프랑스 동쪽 끝에 있는 브장송이다. 그곳에서 자동차로 바위산을 넘어가면 바로 스위스 국경이고 그 너머에 베른과 취리히가 있다. 브장송은 17세기에 프랑스령이 된 곳으로 전통적으로 파리 정부에 반감을 가지고 있었고, 아나키스트를 비롯하여 반골들이 활약한 곳이었다. 브장송 역에서 나와 강을 향해 비탈길을 지나 강변길로 내려가면 프루동(Pierre-Joseph Proudhon, 1809~1865)의 생가가 나온다. 그곳에서 한참을 가면 굽어지는 강이 만드는 시내가 있다. 프랑스에서 가장 위대한 작가라고 하는 빅토르 위고, 영화의 아버지인 뤼미에르 형제, 그리고 샤를 푸리에는 시내 출신이다. 프루동이 태어난 19세기 초에는 시내와 시외의 풍경이 확연히 달랐다. 프루동은 빈민이 사는 시외 출신이었다.

죽기 7년 전에 프루동은 말했다. “나는 가난하고, 가난한 자의 아들이다. 나는 가난한 이들과 일생을 보냈으며, 십중팔구는 가난하게 죽을 것이다.” 그랬다. 그는 그렇게 살다가 죽었다. 프루동의 선조는 대대로 산악지대의 투박하고 독립적인 소작농이었다. 1809년, 브장송에서 통 제조 직인이었던 아버지와 요리사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아홉 살부터 쥐라산맥의 목동으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지질시대를 뜻하는 쥐라기라는 말은 공룡으로 유명한 그곳에서 나왔다. 프랑스에서 가장 숲이 우거진 지역으로 광활한 대지 위에 자리 잡은 쥐라산맥은 자연의 평온함을 만끽할 수 있는 보고다.

그는 자신이 ‘쥐라의 순수한 석회암’을 지니고 있다고 자랑했다. 잃어버린 황금시대로 어린 시절을 회고한 그는 다섯 살에서 열 살까지 시골에 있는 그의 가족 농장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는데, 이것은 그의 생각에 현실적인 기반을 제공한 삶이었다. 그것은 아마도 그의 불같은 개성을 고무시켰을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지배하기 위해 손을 대는 자는 고리타분한 폭군이다. 그리고 나는 그를 나의 적으로 선언한다.” 시골에서 자란 경험은 땅에 평생 뿌리를 내리고 강력한 대지의 신비주의자로 살게 하고 생태적 감수성을 기르게 하여 나중에 시골 생활만이 줄 수 있는 ‘자연의 깊은 감정’의 상실을 한탄하게 했다. “남자들은 더 이상 흙을 사랑하지 않는다. 지주들은 그것을 팔고, 임대하고, 주식으로 나누고, 착취하고, 흥정하고, 그것을 명세의 대상으로 취급한다. 농부들은 그것을 고문하고, 침범하고, 지치게 하고, 그들의 참을 수 없는 이득 욕망에 희생시킨다. 그들은 결코 그것과 하나가 되지 않는다.” 그것은 또한 그가 순수를 고집하고 주로 여성을 복종의 대상으로 보게 만든 청교도적이고 가부장적인 태도를 조장했다. 

프루동은 평생 자신의 촌놈 혈통을 자랑했고 농민 생활의 검소함을 찬양했다. 자유로운 농민 생활의 이상은 그의 사회정치사상에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또한 훗날, 프루동이 중앙집권주의에 반대하고 지방분권적인 연합의 원리를 주장하게 되는 원인이 되었다. 어린 시절부터의 가난은 그가 교회와 국가 및 부르주아에 반대하는 사상을 낳는 중요한 요인이 되기도 했다. 마르크스, 엥겔스, 레닌과 같이 부유한 집안 출신으로서 사회주의자가 된 경우와 달리 프루동은 유년 시절에 체험한 빈곤과 그로 인한 좌절감에서 아나키스트가 되었다. 당시의 혁명 사상가들이 가난을 극복하기 위한 물질적 향상을 추구한 데 반하여, 그는 풍요한 사회보다도 정의로운 공정한 사회를 추구한 점에서 달랐다. 이 점은 그가 프랑스 모럴리스트의 전통을 이어받은 점이기도 했다. 

프루동 생가

프루동은 12세 때 여인숙 음식 출납원으로 일하면서 6학년에 편입하였으나 일 때문에 수업에 거의 참석하지 못했고, 맨발로 학교를 다니면서 교과서를 필사하거나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 공부했지만 결국, 졸업은 하지 못했다. 그는 훌륭한 학문적 명성을 지닌 이 마을에서 가장 좋은 학교인 브장송대학에서 장학금을 받을 수 있었으나 불행히도 사업보다 맥주 양조 솜씨만 뛰어난 그의 아버지는 그가 18세 때, 파산 선고를 받아 그는 학교를 중퇴하고 생계를 유지해야만 했다. 

1827년 19세 때, 브장송의 인쇄소에서 견습공으로 근무하면서 교회의 라틴어 성경을 교정하면서 신학에 관한 광범위한 지식을 익히고, 히브리어를 스스로 체득하였다. 그 후, 죽기 전까지 평생을 인쇄공으로 산 그는 아나키즘을 지지한 전통적 계급인 노동자인 것을 ‘자유의 상징이자 수단’으로 자랑했다. 프루동이 장인으로서 살아온 삶은 그에게 독자적인 사회관을 심어주었고, 그에게 혼자서 공부를 계속할 시간과 공간을 주었다. 1838년까지 그는 새로운 인쇄 과정을 개발했을 뿐만 아니라 일반 문법에 관한 에세이를 출판했다.

프루동이 근무한 인쇄소는 지역 교구를 위한 출판물을 냈고, 그것들은 그의 종교적인 생각을 불러일으켰다. 교정이나 타인의 글을 내는 데 그치지 않고 그는 자신의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는 히브리어로 된 성경 노트의 판본에 기여했고, 뒤에 가톨릭 백과사전을 위해 글을 썼다. 성경은 그의 사회주의 사상의 주요한 권위가 되었다. 그러나 동시에 기독교 교리에 대한 그의 폭넓은 지식은 신앙을 깊게 하지 않고 역효과를 가져와 확고한 반종교인으로 만들었다. 이어 신의 섭리적 통치를 거부하고 ‘신은 폭정과 가난이자 악마’라고 결론지었다. 

그 후의 발전에 더 중요한 것은, 프루동이 억압적인 도덕규범과 함께 기존 문명을 거부한 그의 동향인 푸리에를 포함한 지역 사회주의자들과 접촉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특히 자유로운 협동조합을 주장한, 공상적 사회주의자 푸리에의 《산업적 및 사회적인 신사회(Le Nouveau Monde Industriel et Societaire, 1829)》를 인쇄하면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인류를 풍요롭고 관능적인 쾌락과 세계 통합으로 인도하는 것’을 지향하는 이상적인 공동체인 팔랑쥬(Phalanstere) 사회를 제창한 푸리에는 인간이 ‘우주의 조화’에 순응한다면, 그들의 열정을 만족시키고, 정신 건강을 되찾으며, 범죄 없이 살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프루동은 그가 6주 내내 이 기괴한 천재의 포로로 잡혀있었음을 인정했고, 비록 팔랑쥬가 너무 유토피아적이고 자유로운 사랑에 대한 푸리에의 예찬을 혐오스러워했지만, 그의 내재적 정의에 대한 신념에 감명을 받았다. 

1830년 7월 혁명 이후, 그는 브장송을 떠나 몇 년 동안 일자리를 찾아 프랑스 전국을 순회 여행하고, 교회사와 신학 관계의 책을 출판하는 인쇄소에 근무하면서 언어학과 히브리어 및 신학을 혼자 공부했다. 리옹에서 협동 작업장을 옹호하는 노동자들과 접촉한 뒤 혐오했던 파리로 갔다. 그의 프랑스 순방은 당시 프랑스의 권위가 모든 행정적 세부사항을 포괄하는 엄격한 규칙이라는 수단에 의해 ‘나라 전체를 통해 행정부를 통제하는 하나의 중앙 집권’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알렉스 드 토크빌의 관찰을 너무나 잘 보여주었다. 

그 후 브장송으로 돌아와 1836년부터 자영 인쇄업자가 되었으나, 평생 부채로 고통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지방 인쇄업자라는 애매한 삶을 사는 데 만족하지 않았고, 학자가 될 것인지, 노동 계급을 위해 봉사할 것인지를 결정할 수도 없었다. 1837년에 낸 첫 저서 《일반 문법론(Essai de grammaire generale)》에 이어 1838년 그는 브장송 아카데미에 장학금을 신청하면서, 자신을 ‘노동 계급에서 태어나 자랐으며, 마음 깊이 거기에 속하며, 예절과 포부의 공동체’에 속한다고 선언하고 앙리 드 생시몽의 마지막 증언처럼 ‘가장 많은 숫자와 가장 가난한 계층의 신체적, 도덕적, 지적 조건을 발전시키고자 한다’고 주장했다. 

1839년에 안식일의 창시자인 모세를 ‘자연’법에 근거한 사회의 기초를 닦고, 법전을 ‘발명’하지 않고 ‘발견’한 위대한 사회 과학자로 묘사한 《일요일 예배론(De la Celebration du dimanche)》을 냈으나, 재산의 평등에 근거한 사회개혁을 주장하여 성직자 회의에 의해 판매가 금지되었다. 여하튼 그 책에서 영웅으로 묘사한 모세의 업적은 사람들이 평등과 정의 속에서 살 수 있도록 도덕적인 규칙을 마련하면서 프루동이 발전시키고 싶었던 업적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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