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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을 담은 박물관, 지역으로 들어간 박물관
지역을 담은 박물관, 지역으로 들어간 박물관
  • 박찬희
  • 승인 2020.06.24 14:1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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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희의 박물관 여행
군산근대역사박물관

일제강점기 수탈 이미지 벗어나 역사 재조명
관람객들이 다가가기 쉬운 생활사에 초점
건물 직접 들어가거나 체험할 수 있도록 준비
군산근대역사박물관 전경. ⓒ박찬희

지역마다 지역의 관광지와 명소를 소개하는 안내도가 있다. 안내도의 구성은 조금씩 달라도 박물관이 있다면 박물관 소개도 빠지지 않는다. 하지만 박물관이 높은 비중으로 소개되는 경우는 흔하지 않다. 그런 점에서 군산의 안내도는 여느 안내도와 사뭇 다르다. <군산으로 떠나는 시간 여행>이라는 군산 안내도는 박물관을 중심으로 구성되었다. 여행지를 박물관에서 도보로 약 몇 분 거리라고 표시하여 여행을 온 사람들에게 정보를 제공한다. 이 박물관이 군산근대역사박물관이다. 

최근 들어 군산은 인기 있는 여행지로 자리를 잡았다. 그러나 오랫동안 군산은 여행지라기보다 오히려 가슴 아프고 때로는 외면하고 싶은 역사의 현장이라는 이미지가 깔려 있었다. 우리나라 최대의 평야인 호남평야에서 생산된 쌀을 일본으로 수출하던 항구가 군산이었다. 때문에 군산은 일제 강점기 가혹한 수탈을 상징하는 곳이었다. 시내 여러 곳에 있던 일제 강점기 건축물은 과거의 아픈 역사를 떠올리게 만드는 애물단지였지 보존해야 할 문화유산이 아니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일제 강점기의 건축물을 평가하는 눈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덮어놓고 없애는 것이 능사가 아니라 우리나라 역사의 한 부분으로 받아들여 보존하고 마주하고 평가해야 할 대상으로 보았다. 점차 부정적인 유산이 근대문화유산으로 바뀐 것이다. 마침 군산의 원도심은 개발 바람에서 비껴가 일제 강점기의 건축물이 다른 도시에 비해 제법 많이 남아 있었다. 2001년부터 등록문화재 제도가 도입되었고 2003년 군산에 있는 일본식 사찰인 동국사 대웅전이 등록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이 일을 계기로 일제 강점기 건축물과 유산에 적극적인 의미를 부여했고 여러가지 계획을 거쳐 마침내 2009년 군산근대역사문화벨트화사업 마스터플랜이 수립되었다.

군산근대역사박물관 근대생활관. ⓒ박찬희

이 과정에서 흥미로운 발상의 전환이 일어나 박물관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기로 계획하였다. 박물관을 단지 구색을 맞추는 곳으로 치부하지 않고 근대문화유산지구의 구심점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고 판단하였다. 원래 시 외곽에 박물관을 세우려던 계획을 취소하고 근대역사문화지구로 건립 장소를 변경했다. 근대문화유산이 많은 이곳에서 지역 주민과 여행자들에게 이 지역의 역사적 맥락을 제시하고 여행의 기준점 역할을 하는 한편 박물관 자체가 명소인 박물관을 만들고자 하였다.     

박물관의 이름이 군산근대역사박물관이다. 군산박물관이 아니다. 군산의 전 시기가 아니라 근대사를 중심으로 다룬다. 박물관의 건립 배경과 장소를 고려해보면 자연스러운 선택으로 보인다. 이 점은 박물관의 전시 구성에 반영되었다. 1층은 근대 이전 군산을 해양물류의 중심지라는 주제로 전시실을 구성하였다. 본격적인 근대의 역사는 2층과 3층에서 다루었다. 2층에는 독립영웅관이, 3층에는 근대생활관이 있다. 근대생활관은 박물관의 핵심 전시실로 근대 여러 시기 가운데 1930년대를 기준으로 삼아 전시했다. 

일제 강점기 수탈의 공간으로 인식되던 군산의 이미지에서 벗어나 군산의 역사를 재조명하는 작업이 박물관이 풀어 나가야 할 과제였다. 3층 근대생활관으로 올라가기 전 먼저 들리는 2층의 독립영웅관은 이런 점에서 의미가 크다. 박물관은 군산 출신 독립운동가와 군산에서 일어난 독립운동을 조명하여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군산의 역사를 부각시켰다. 호남지역에서 최초로 일어난 3·1운동, 1927년 옥구의 소작농들이 일본인 지주의 수탈에 맞섰던 옥구농민항일항쟁이 대표적인 독립운동이었다. 관람객은 이 전시실에서 수많은 독립운동가의 사진을 보며 군산이 독립운동이 치열하게 벌어진 항쟁의 땅이었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

군산근대역사박물관 근대생활관. ⓒ박찬희

군산의 근대를 어떻게 풀어나갈 것인가? 이 문제는 박물관의 정체성과 전시 방향에 큰 영향을 끼친다. 박물관은 관람객들이 다가가기 쉬운 생활사에 초점을 맞추었다. 근대생활관이라는 전시실의 이름처럼 도입부를 제외한 대부분의 전시 공간을 재현된 건물로 채웠다. 재현된 건물 11채는 1930년대 군산에 있던 건물들로 서민들의 삶, 저항과 삶, 근대건축물이라는 주제 아래 배치되었다. 재현된 건물은 관람객에게 당시 생활상을 생생하게 전해주는데 효과가 컸다. 관람객은 재현된 건물 사이로 난 거리를 걸으면서 그 시대로 돌아간 느낌을 받는다. 이 전시 기법은 박물관 앞이 일제 강점기의 유산을 특징으로 하는 지역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효과적인 방법이다(군산시에서는 박물관을 포함한 이 지역을 군산 시간 여행 마을이라고 부른다). 만약 유물을 진열장 내부에 전시하는 방식이었다면 그 시대를 체계적으로 알려주는 데 도움이 되었겠지만 재현된 건물이 전해주는 생생함을 따라잡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재현된 건물이 힘을 갖기 위해서는 세부가 강해야 한다. 겉은 번듯해도 그 안을 채우는 부분이 약하다면 관람객 눈에는 무미건조한 세트장으로 보인다. 건물 안은 건물의 기능에 알맞은 전시품으로 채워졌다. 듬성듬성 채운 것이 아니라 당시로 돌아간 것처럼 빼곡하다. 잡화점 안에는 그릇과 성냥을 비롯한 생활용품이 가득하고 술가게는 술통과 술병이 줄줄이 늘어섰다. 눈을 돌리는 곳마다 적당한 곳에 전시품을 배치해 당시 분위기가 물씬 풍기도록 했다. 미세한 부분에 강하려면 고증에 충실해야 하는데 박물관은 이 점을 상당히 신경 쓴 것 같다. 

이쯤에서 과감한 승부수를 던졌다. 관람객이 모든 건물 안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만들었다. 밖에서만 보지 않고 직접 안으로 들어가 코앞에서 전시품을 살펴보고 건물의 분위기를 체험할 수 있도록 했다. 재현한 건물이라도 보존과 관리 때문에 밖에서 보도록 한 경우가 많은 점에 비춰 보면 파격적이다. 건물 안의 전시품이 상당히 귀중한 것이었다면 이런 결정을 내리기 어렵다. 설사 그렇지 않더라도 대부분 노출된 상황에서 파손과 도난의 위험성 때문에 개방은 쉽지 않은 문제다. 덕분에 관람객은 당시 분위기를 피부로 접한다.

승부수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건물마다 관람객이 직접 체험할 수 있는 도구들을 준비했다. 고무신 상점에서는 고무신을 신고 미곡취인소에서는 갖가지 탁본을 한다. 인력거 조합에서는 인력거를 타고 술가게에서는 술 냄새를 맡고 부두에서는 지게를 지고 영화관인 군산좌에서는 영화를 본다. 영명학교에서는 학교 종을 땡땡땡 치고 사진관에서는 그 시대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다. 관람객들은 전시물을 눈으로 보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실제로 체험하면서 욕구를 충족시키는 한편 이 장면을 사진으로 찍어 추억으로 남긴다. 다른 박물관 전시실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풍경이다. 그래서인지 근대생활관은 그 시대의 거리처럼 왁자지껄하다.

박물관을 나서면 전시의 무대를 실제로 만난다. 박물관 뒤쪽은 쌀을 싣던 뜬다리 부두로 이어지고 박물관 양옆으로 군산세관 본관이었던 호남관세박물관, 일본 18은행 군산지점이었던 군산근대미술관, 조선은행 군산지점이었던 군산근대건축관이 펼쳐진다. 모두 군산항과 관련된 유산들이다. 박물관 앞쪽으로 가면 일제 강점기 생활문화유산이 남아있는 마을로 들어간다. 박물관은 이 지역의 역사 한 자락을 싱싱하게 담아냈고 지역은 박물관과 생생하게 연결되고 통합되었다. 작년 한해에만 95만 명이 박물관을 찾았다.

박찬희 박물관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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