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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은 왜 '기술'에 주목하는가
철학은 왜 '기술'에 주목하는가
  • 박소연 미국통신원
  • 승인 2004.01.12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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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동향 : 미국의 새로운 기술철학 연구서들

미국에서 기술철학이 하나의 학회로 자리잡은 지 3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다. 그러나 기술철학은 "기술사 혹은 기술사회학에 필적할만한 '장르적 속성'을 지니지 못했다"라든가 "기술철학회를 구성했던 초기멤버들이 여전히 기술철학자의 주류다"라는 지적을 종종 받아왔던 것이 사실이다. 이에 더해, 주목할만한 기술철학의 저술들은 손에 꼽히는 정도였던 것이 적어도 1990년대까지 기술철학의 현실이었다.

실용주의와 기술철학의 결합 논의 시작

그러나 최근 그간의 기술철학과 관련된 성과들을 모아내는 작업들과 기술철학에 새로운 문제의식을 더하는 작업들과 더불어 기술철학을 새롭게 조명하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이러한 징후는 물론 출판시장에서 가장 잘 보여진다.

가장 최근에 주목받았던 기술철학 서적으로서는 돈 아이디와 에반 셀링거가 공동 편집한 '기술 과학 따라잡기' (Chasing Technoscience: Matrix for Materiality, 인디애나대출판부, 2003)다. 새로운 논의를 담고 있지는 않지만 '물질성의 매트릭스'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이 책은, 과학기술학 분야에서 걸출한 성과들을 내왔던, 브루노 라투어, 도나 해러웨이, 앤드류 피커링, 그리고 돈 아이디를 중심으로 한다. 이들이 기술과학을 바라보는 다양한 관점들인 현상학, 행위자 네트워크 이론, 혹은 과학문화학 등을 꼼꼼하게 정돈하면서 서로의 연결고리를 찾아내고 있다.

이보다 조금 앞서 출판됐던 한스 악터휘스의 '미국의 기술철학'(American Philosophy of Technology, 인디애나대출판부, 2001) 역시 비슷한 스타일을 취했었다. 보르그먼을 통해, 테크놀로지와 일상생활의 특징을, 드레퓌스를 통해 인간과 컴퓨터의 문제를, 핀버그를 통해 디스토피아를 극복하는 비판 기술철학을, 도나 해러웨이의 사이보그에 대한 재조명을, 또한 아이디의 테크놀러지의 생활세계라는 개념과 위너의 기술이라는 다른 정치 등의 코드를 잡아내고 있기 때문이다.

이 저작들이 새로운 논의라기보다 기존의 기술철학이 보여준 부분적인 성과에 의존하는 데 반해, 2004년 출판될 예정인 데이비스 베어드의 '사물지식'(Thing Knowledge: A Philosophy of Scientific Instruments)의 접근은 새롭다. 과학적 인식의 중심축을 도구로 지목해 논의해 왔던 저자의 철학이 어떤 식으로 발현될 지 기대해 볼 만하다.

최근 기술 철학 내의 활동에서 또 한가지 흥미로운 점은, 과학 철학과는 약간 별도로, 프래그머티즘-기술철학이 조심스레 논의되고 있다는 점이다. 미국 기술철학회의 온라인 저널인 '테크네'의 2003년 가을호의 특집은 래리 히크먼의 '기술 문화를 향한 철학적 도구들' (Philosophical Tools for Technological Culture, 인디애나대출판부)』을 재조명했다. 저자는 "기술이 철학적 주제로서 가지는 적법성"을 전제한다는 점에서야 여느 기술철학자들의 처음 문제의식과 다를 바 없겠다. 그러나 히크먼은 자타가 공인하는 듀이주의자 혹은 프래그머티스트로서 지녀온 입장을 고스란히 기술철학의 문제로 심화시킴으로서, 기술철학과 프래그머티즘이라는 단절된 흐름이 함께 논의되는 계기를 제공했던 것.

문제 치료하는 철학의 필요성 주장

이러한 흐름은 학회를 통해서도 이어졌다. 지난 12월 12일에서 15일까지 동경대에서는, 동경대 철학센터와 서던 일리노이대 듀이 센터의 공동 주관으로, "21세기, 프래그머티즘과 기술철학"이라는 주제의 국제 컨퍼런스가 열렸었다. 스펙트럼은 다를지언정, 프래그머티스트를 자처하는 과학철학자 퍼트남 부부와 로티, 그리고 히크먼 등이 직접 발표자로 참석했던 이 학회에는, 아이디, 핀버그 등의 기술철학자들 역시 참여하면서 조심스레 기술철학과 프래그머티즘 진영이 서로를 절실히 필요로 하고 있다는 점을 확인하고 있었던 것.

한동안 단절된 흐름으로 여겨지는 프래그머티즘이 아직 정형화되지도 않은 분야인 기술철학과 조우하게 되는 이유에는 어느 정도의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다. 즉, 프래그머티즘이 처음 제기 될 때의 슬로건처럼, 현재는 '문제를 치료하고 해결'하는 철학이 절실한 때라는 것이며, 무엇보다도 현재는 기술과학이 지배적인 문화현상으로 자리잡은 시대라는 것. 확실한 것은 '기술철학자'의 지평과 '기술철학'의 포괄 범위가 넓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2004년 1월에 출간될 '필로소피 오브 사이언스' 역시 기술철학을 특집으로 다룰 예정이라는 후문이다. 따라서 30년 전 기술에 철학적으로 흥미로운 주제가 존재하는가를 물었던 과학철학이 현재의 기술철학을 어떻게 조명할지 귀추가 주목된다.

박소연 미국통신원 / 버지니아텍 박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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