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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동향: 활기 띄는 국내의 유럽중세 연구
학술동향: 활기 띄는 국내의 유럽중세 연구
  • 이지영 기자
  • 승인 2004.01.02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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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적 연구 등 다양한 소모임 기지개

버틀란트 러셀이 '암흑의 시대'라 부르고, 부르크하르트가 그 유명한 르네상스 저작에서 이를 확인한 후 중세는 오랫동안 바람찬 응달이었다. 신과 이단, 종교재판, 마녀사냥, 페스트 등 중세를 대표하는 키워드들은 종교권력의 거대한 군림만 반복 학습하는 재미없는 교과서였다.

이런 중세에 다시 볕이 비쳐들고 있다. 편견 없이 중세를 보려는 학자들이 늘어나면서 그 동안 과장됐거나, 몰랐던 부분들이 드러나기 시작한 것. 이런 서양의 흐름은 최근 국내로도 번져 중세 관련 학회의 활발한 활동과 관련 출판물들로 쏟아져 나오고 있다.

미시적 접근의 영향 속 재조명 활발

이런 중세 르네상스는 몇 가지 배경 속에서 이해될 수 있다. 20세기 후반 역사학계를 풍미한 아날학파의 중세연구와 이탈리아에서 발흥한 미시사적 접근들이 교회권력에 대항한 용감한 개인(진즈부르그의 '치즈와 구더기')들을 찾아내거나 중세의 지식인들도 현대인처럼 욕망하고 갈등했다고 지적하면서(자크 르 고프의 '중세의 지식인들') 이해의 터전이 마련되기 시작했다. 최근 프랑스의 알랭 데 리베라 등은 '중세'라는 개념은 기독교적인 관점에서 상대적인 박탈감을 강조한 표현임을 강조하며 재해석을 요구하고 있다.

새로운 건 늘 매력적이지만, 중세는 특히 신비한 데가 있다. 아직까지 신과 완전히 분리되지 않은 인간, 수비학과 신성 기하학, 연금술, 점성학, 카발라, 신지학 등 대체로 신비주의 세계관에 뿌리를 둔 전통과 체계들은 그 속의 인간들을 복잡미묘한 연구대상으로 부각시킨다. 이는 근대적 사유를 넘어서려는 일탈적 움직임에 점점 손을 뻗치고 있다.

또한 중세는 1천년 동안 지속적으로 유럽의 펜더멘탈을 만들어왔다. 중세를 거치며 서구는 원시적인 물물교환에서 신용거래와 은행을 포함하는 금융경제 체제를 확립시킬 수 있었다. 그 외에 기독교·이슬람의 대립, 대학의 출발, 학문 분과의 확립 등 현대 사회의 성립 근간을 이뤄왔던 변화의 순간을 포착하기 위한 관심들도 만만치 않게 형성되고 있다.

그 동안 국내의 중세연구 전통은 빈약한 편이었다. 중세관련 학회만 해도 한국중세르네상스영문학회(회장 박영배 국민대 교수), 한국서양중세사학회(회장 김동순 성균관대 교수), 한국중세철학회(회장 정달용 대구가톨릭대 교수) 정도로 한 손에 꼽을 정도다.

한국중세철학회는 지난해 5월에 생긴 신생학회다. 장욱 전 연세대 교수, 정이채 서강대 석좌교수 등의 중세철학 1세대의 뒤를 이을 연구자들은 거의 없었는데 최근 중세철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신진연구자들이 15명 정도가 국내에 들어오면서 분위기가 달라졌다. 곳곳에 산재해 있던 연구자 70여명을 한자리에 모아 학회발족까지 이뤄낸 것. 지난 2000년에는 박병준 서강대 교수(철학), 강윤희 인천가톨릭대 교수(신학과) 등이 네오토미즘(토마스 아퀴나스의 사상을 재조명하는 입장)을 연구하는 한국토미즘연구회가 결성되는 등 신학적 연구에서 철학적 연구로 넘어가는 소모임들도 형성되고 있다.

학회, 국내연구인력 늘고 있다

서양중세사학계도 활력이 더해지고 있다. 1996년에 만들어진 한국서양중세사학회는 내년부터는 정규활동 이외에도 또 하나의 계획을 준비하고 있다. 학회 차원에서 도시사 관련 프로젝트를 준비하고 있는 것. 고대 그리스와 로마에 번성했다가 사라진 도시국가가 11세기 무렵 다시 역사의 무대에 등장하는데, 이것을 현대 도시의 근간으로 보고 역추적하는 작업이다. 장준철 원광대 교수는 "중세 도시사에 대해 관심을 갖는 연구자가 많지만, 문화사·사회사 등으로 관심 영역을 확장하고 있는 추세"라고 설명했다.

이재경 대구카톨릭대 연구교수(중세철학)는 "현대 사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다시 근원을 읽어내려는 노력"이라고 중세연구의 의미를 매긴다. 그 근원은 무슨 말일까. 이성이 자기 안의 혼미한 것들을 발로 차버리고 고딕건물처럼 딱딱하게 완성되기 이전, 그 최초의 분리가 서서히 진행되는 과정, 오늘날과 충분히 다른 형태로 합리화될 수 있었을지도 모를 사유의 수많은 가능성들을 탐구하고 싶다는 말일 것이다.

이지영 기자 jiyoung@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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