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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훈의 조선근대 경제사③]문화와 역사의 지평에서 바라본 생산성
[이정훈의 조선근대 경제사③]문화와 역사의 지평에서 바라본 생산성
  • 이정훈
  • 승인 2020.06.10 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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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근대화와 전환기의 지식인들

《세 번째 주제 : 생산성과 공공성 》

◇ 연재 구성
Ⅰ. 연재를 시작하며
    Ⅰ-1. 생산성의 인문학 (2020.5.18.)
    Ⅰ-2. 공동체와 공공성 (2020.5.25.)
Ⅱ. 생산성의 인문학
    Ⅱ-1. 주체성·생산력 (2020.6.1.)
    Ⅱ-2. 공동체·창조성 (2020.6.8.)
Ⅲ. 생산성과 공공성 
    Ⅲ-1. 자본주의 체제에서의 공공성 (2020.6.15.)
    Ⅲ-2. 근대화 과정에서의 공공성 (2020.6.22.)
Ⅳ, 조선은 왜 가난 하였는가 ?
Ⅴ. 조선의 자생적 근대화 1 : 북학파 지식인 
Ⅵ. 조선의 자생적 근대화 2 : 동학
Ⅶ. 대한제국기
Ⅷ. 일제 강점기
Ⅸ. 대한민국 건국의 설계자
Ⅹ. 한국, 세계와 만나다
Ⅺ. 경제개발의 설계
Ⅻ. 중화학공업화 추진  
ⅩⅢ. 한민족경제공동체 
ⅩⅣ. 국가전략 
ⅩⅤ. 시대정신과 지식인   끝. 

Ⅲ-1.  자본주의 체제에서의 공공성

○ 생산성 개념의 확장
생산성이 물질적 풍요만을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정신적 성숙을 추구하면서 사회적 조화가 이루어지는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생산성의 개념이 공공성을 포함하여야 한다. 공공재의 생산은 시장경제 원리로는 판별할 수 없으며, 공공재의 가치는 공공성으로 접근되어야 한다. 시장 자체가 공공성 원리에 따라 운영되어야 하며, 공공성은 생산성의 내용을 판별하고 질을 식별함으로써 공동체에서 구심력이 작용하도록 하는 사회적 요인이다. 
공공성 개념은 국가가 관여하는 공적(公的)인 것, 모든 사람과 관계되는 공통(共通)의 것, 누구에게나 열려있는 것을 의미한다. 공동체 전체와 관련되고 다른 사람과 함께 한다는 의미이다. 동아시아에서는 천(天) 개념에 공공(公共)의 의미가 내포된다. 천리의 공공성이 사회적으로 실현된 상태가 대동사회이다. 한민족에게 있어 공공성이란 홍익인간의 이념으로 친숙하다. 

생산성과 공공성
생산성과 공공성

공공성은 생산성 형성요인인 주체성, 공동체, 생산력, 창조성과 각기 연결되어 각 요인의 성격에 영향을 미친다. 주체성에 공공성이 작용하면 공적 자아가 확대된다. 공동체에 공공성이 작용하면 사회적 형평을 통한 연대성이 증대한다. 생산력에 공공성이 작용하면 생산시스템 내에서의 생산요소 간 관계가 조화롭게 유지되도록 제도화가 이루어진다. 창의성에 작용하면 사회내의 여러 요소가 상호작용하고 융합함에 있어 공공적 방향성이 강화된다. 

○ 한국은 세계와 시장으로 연결
한국 경제의 발전 모델은 세계시장 의존과 국가 주도 그리고 재벌 중심의 발전으로 이루어졌다. 발전 모델이 세계시장에 의존하게 되므로 세계시장을 주도하는 서양의 가치영역이 한국의 산업 뿐 아니라 사회운영의 원리로 자리 잡았다. 한국이 독자적으로 경제를 운용하기 시작할 즈음 세계는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두 진영이 대립하고 있었다. 인도를 중심으로 제3의 길을 찾으려는 시도가 있었으나 뚜렷한 성과는 없었다. 미국 시장이 한국 상품을 구입해 주었기에 한국 경제는 걸음마를 띨 수 있었고, 한국 경제는 미국 주도의 패권 질서에 적응하는 것이 생존을 위한 전제 조건이었다. 자유주의적 시장경제 시스템은 제2차대전 이후 세계로 확산되었고 소비에트 소멸 후 보편적 질서가 되었다. 

국가 주도는 계획을 의미했고 개발의 궁극적 목적이 국민들의 물질적 풍요로움을 통해 행복한 삶을 영위하기 위함이라는 점은 자주 간과되었다. 국가 주도 세력이 권위주의 정부였다는 점은 공(公)을 실행함에 있어 절차와 내용에 있어서 후유증을 남겼음을 의미한다. 재벌의 독점적 지위는 균(均)의 원리를 손상시키는 불공정한 결과를 초래했다. 시장사회의 득세는 재력과 국가권력의 유착을 가져오고, 모든 존재를 효율성의 시스템 속에 녹여 사라져버리게 만들었다. 요컨대 공공성이 훼손되었다. 

현대 사회는 시장 중심적 사회이며, 이로 인해 현대인의 삶은 시장에 종속되는 어려움에 처하였다. 대량소비 사회 속의 개인은 물질적 풍요를 누리는 가운데 비판의식을 상실하고 민주사회의 주인의식이 퇴화하였다. 현재 인류는 인간의 위기, 사회의 위기, 자연의 위기와 마주하게 되었다. 현대인의 삶이 위기에 처한 배경에는 서양에서 발전된 사회 시스템이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를 질서의 근간으로 제도화하면서 시장과 권력을 분리하여 개인의 자유를 확보하였는데, 이러한 제도적 장치가 시장권력의 확대로 인해 오히려 자유를 허구적인 것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인간은 행복을 추구하는 존재이며, 생산성은 물질적인 풍요를 실현케 하는 수단이다. 그러나 대량생산과 대량소비가 가능케 한 생산기술은 상당한 부작용을 수반한다. 인간소외와 환경 문제 등 산업화가 야기하는 사회문제와 대량생산-대량소비-대량폐기가 이어지는 경제구조는 지속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인류는 헤아리면서도 대안을 찾지 못하고 삶을 이어가고 있다.

그런데 2019년 말 중국에서 출현하여 세계적으로 확산된 팬데믹은 세계인으로 하여금 우리 사회가 잘못된 것이 무엇인가를 절실히 깨닫는 계기가 되었다. 한국인이 이 사태를 겪으며 깨닫는 바는 한국이 의료부문과 기술영역에 있어서 공공성이 작동하고 있어서 선진국 또는 강대국으로 알고 있었던 국가에 비하여 건강한 대응력을 발휘했고 그 역량이 세계에 긍정적으로 기여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이는 우리 사회를 지탱해 온 한국적 가치를 새롭게 조명하고 면밀하게 살펴보는 계기가 되었다. 새로운 시대의 문을 열기 위해서는 새로운 인식이 필요하다. 그 인식은 과거의 시간과 미래의 시간에 비추어 현재 우리 사회가 위치하는 인식의 좌표를 살피는 것이다. 과거를 돌아보는 것은 현재를 부정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무엇이 잘못되었는가를 확인하려는 데에 있다. 

○ 시대와 공공성
동아시아에서 근대화는 서세동점의 세계사적 흐름 속에서 시작되었다. 대한제국기의 국가적 관심사는 구성원의 행복이 아니라 부국강병이었다. 대한제국이 주권을 상실할 시점에 이르러 비로소 역사주체로서의 민족(民族)과 경제주체로서의 인민(人民) 개념이 대두된다. 한국인이라는 민족의식은 제국주의라는 타자의 침탈에 대한 반응으로 부상하였다. 

조선이 제국주의의 침입에 대한 대응력이 취약했던 것은 공동체차원에서 종합 능력이 취약하였기 때문이다. 근대사에서 주체성이 집단적으로 발현되는 계기는 3·1 운동과 4.19 혁명을 경험하는 가운데 형성되었다. 정부수립은 3·1 운동을 계기로 민족주의가 분출된 점이 동력이었고, 민주주의는 4·19 혁명을 통해 젊은이들의 분노 표출이 동력이었다. 경제근대화의 주체로서 정부가 역할을 하기 시작한 것은 민족 부흥에 대한 염원이 동력으로 작동하였기 때문이다. 

3·1운동은 개인의 변화를 통한 사회의 변화를 도모하는 주체를 등장시켰다. 청년층은 과거와 단절하고 미래를 선취해야 하는 근대적 주체의 표상으로 찬양받았다. 천도교는 종교로서 뿐만 아니라 사회운동방면으로도 민족사의 흐름에서 중대한 역할을 수행했다. 민족구심점으로서 작용하여 민족공동체 유지를 위한 활동을 전개했다. 

사회개조라는 시대의 물결은 사회진화론의 영향으로 형성되었다. 차별 없는 세계와 사회를 지향하는 진보 사상이 결합했다. 사회개조 프로그램의 하나가 경제운동이며, 협동조합은 경제운동의 주요 부분이다. 협동조합은 부르조아 민족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실력양성론을 실천할 수 있는 조직으로서 민중의 지지를 받았다. 협동조합 조직화는 사회개조를 지향하는 사상이 결합한 운동이었다. 

천도교는 근대화 운동을 전개했으며 그 운동 중심에 청우당이 위치한다. 개인의 변화를 통해 사회를 변화시키려는 지식인 청년을 표준으로 하는 근대 주체를 형성하려는 시도가 전개되었다. 정신개혁·민족개혁·사회개벽이 주창되었다. 개벽이란 개조를 동학 경전의 용어로 표현한 것이며, 사회개벽이란 물질문화와 정신문화를 인간본위의 표준으로 건설하자는 주장이었다. 방법으로서 제시된 것이 인간 정신의 변혁을 통한 사회 변혁을 이루고, 교육을 통해 민족을 개조하고자 하였다. 

1. 1926년 천도교 조선농민사에서 펼친 귀농운동(歸農運動) 출처 : 천도교
1930년대 개성의 자본가 (앞줄 왼쪽 두 번째가 공진항).
일본강점기 만주에서 대규모 협동농장을 일구었다. 정부수립 후 농림부 장관과 농업협동조합중앙회 초대 회장을 역임했다.
출처 : 한국역사연구회

천도교에서는 새로운 시대에 능동적으로 대응하는 취지에서 문화운동을 전개하면서 그 일환으로 기관지 『신인간』을 발간한다. 『신인간』은 시대와 시대의 마디를 자라게 하는 새로운 인간 창조를 목표로 창간되었다. 신인간이라는 개념은 천도교 문화운동론이 추구한 인간의 가치변화와 문화주의적 정신주의적 인격주의적 변혁방식을 통한 사회변혁을 시도하는 주체였다. 

1920년대 농민층을 대상으로 계몽운동이 전개되었는데 이를 브나로드운동이라 불렀다. 브나로드(V narod)는 제정 러시아 말기 지식인들이 이상사회를 건설하기 위하여는 민중을 깨우쳐야 한다는 취지로 만든 ‘민중 속으로 가자’는 뜻의 러시아 구호이다. 『신인간』은 한글보급운동을 전개했다.  

Ⅲ-2. 근대화 과정에서의 공공성

○ 역사 속에서의 공공성 : 확산과 위축
인문학과 사회과학 그리고 자연과학이 융합하여 사람에게 이롭게 쓰이기 위해서는 공공성이라는 구심점이 있어야 한다. 이것이 자연스럽게 융합되는 것이 가능한 민족은 한민족이다. 우리 민족의 윤리 사상의 뿌리가 된 홍익인간 사상은 민족의 주체의식을 형성하는 힘으로 인간중심주의를 형성하는 전통사상의 근원이다. 이 사상은 신라의 화랑정신, 동학의 인내천 사상 등에 이르기까지 가치관에 영향을 미쳤다. 

한국 사상의 원류는 홍익인간 사상과 풍류도를 핵심으로 한다. 신-인간-사회-자연의 화합과 조화의 공동체를 추구하는 것이 특징이다. 동학은 인간을 가치 질서의 중심에 위치시키고, 인간을 존엄하고 주체적 존재로 바라본다. 천도교는 동학의 이러한 인간관을 계승하여 인간을 공공적 주체로 간주한다. 자유롭고 평등한 구성원이 공개적 의사소통 과정을 통해서 공공 복리를 논의하는 것이 공공성의 발현이다. 

홍익인간 사상은 인간존엄성과 실용성 추구, 공동체를 유익하게 하는 공리주의적 성격을 담고 있다. 재세이화(在世理化)에서의 재세(在世)는 ‘세상에 머물며 인간과 함께 산다’는 의미이고, 이화(理化)란 ‘다스려 인도함’으로 해석된다. 즉 이화는 인간이 인간다운 생활을 할 수 있도록 그 생활환경을 조성하는 일과 동시에 인간다운 삶의 원리로서 제시되었다. 

단군조선 이래로 사회운영의 원리로 작용하는 在世理化의 전통적 역할을 행하던 지도인물은 선배·조의선인·화랑으로 불렸다. 在世理化에서의 理란 합리적 논거이다. 한민족의 전통에서 지도자란 합리적으로 이끌고 단결시키는 존재이다. 전통적 선인(仙人)은 산천에서 수련하여 공익을 위해 자기 몸을 희생하는 존재로서 수행적 실천을 통한 상무정신을 함양하여 지녔다. 고대 조선에서 인간은 하나의 전체로부터 탁월한 능력을 부여받았기 때문에 수행과 수련을 통해 초월적 지위(神 · 聖 · 仙 · 佛)에 이를 수 있다는 관념이 있었다. 

조선시대에는 재세이화의 역할을 유학자 또는 선비가 맡았다. 선비는 학식과 인품을 갖춘 인물로 유교 이념과 정신을 구현한 인격체라는 의미를 지닌다. 신라의 화랑(花郞)은 수행정신을 발현하며 공동체에 헌신하였으나, 조선의 선비는 과거의 선비와는 질적으로 달랐다. 조선의 선비는 공익(公益)을 위해 자기 몸을 희생하려는 의지를 함양하는 수련 과정을 겪지 않았다는 점이 삼국시대의 선비와 다르다. 

조선의 선비는 한민족의 전통인 인간 존중의 흐름을 벗어난 이단(異端)의 존재였다. 군자적 이상을 추구하는 삶은 사회적 생산력의 발전과 무관하였다. 사림파는 현실성을 결여한 명분론과 허장성세로 국가적 위기에 대응하면서 백성이 겪는 생활의 어려움을 헤쳐 나가는 데에 도움을 주는 정책을 마련하지 못했다. 임진왜란 이후 조선 정부가 백성의 삶을 윤택하게 만드는 실용성을 추구하는 정책결정의 자취가 전혀 발견되지 않는다. 사림파가 주도하는 정부는 전란에 따른 민생의 어려움을 안정시키는 대책을 마련하기 보다는 의리와 예절을 강조하였다. 조선 중기 이후의 선비란 민중과 괴리된 존재였으며, 인조 이후로는 민중의 삶과 괴리된 수탈자로서 존재하였다. 

조선 중기 이후의 사대부의 삶은 유교의 가르침과는 상반되는 것이었다. 유학 경전에서 말하는 선공후사(公先私後)라든지 서(恕)가 현실세계에서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서얼차별이나 정부가 서적의 유통을 가로막는 결정처럼 차별과 배제, 수탈이 가능한 사회구조는 반유교적으로 이는 유학자에 의해 저질러진 유교의 찌꺼기였다. 

조선 시대의 선비는 편협한 생각으로 누추한 삶을 살며, 의도적 무능을 추구했다. 생산성을 높이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 것이 행복하게 사는 길이라고 그 시대를 대표하는 선비는 말한다. 인간 욕망은 절제되어야 하고 욕구 추구는 억제되어야 한다는 믿음이 지배하는 사회에서는 모든 산업이 비생산적이 되었다. 

조선농민사에서 펼친 귀농운동(歸農運動) 출처 : 천도교
조선농민사에서 펼친 귀농운동(歸農運動) 출처 : 천도교

○  근대화 과정에서의 공공성 
동학혁명 당시 전봉준은 초토사(招討使) 홍계훈(洪啟薰)과 맺은 전주화약(全州和約)을 통해 폐정개혁(弊政改革)에 합의한다. 개혁안에는 불합리한 징세, 권력자와 결탁한 보부상이나 밀거래하는 암상인 (潛商)의 폐해를 막는 내용이 포함된다. 이렇듯 동학은 교단의 이해를 넘어 일반 민중의 이해를 대변하고자 하였다. 혁명이 농민계층의 이해를 넘어 공공성을 지녔음을 보여준다. 이렇게 혁명지도부는 공공적 역할을 자진하여 떠맡았다. 

일제강점기 사회개혁운동을 주도한 천도교측 인사들 가운데에는 한글보급과 협동조합운동을 일제가 패퇴할 때까지 계속한 공진항(孔鎭恒: 1900~ 972년)이 전개한 농업협동조합운동은 국제적 안목과 투자로 만주개척사업을 전개한 특이한 사례이다. 한편 동경유학생의 모임에서 기원하는 협동조합운동사도 국내에서 농업협동조합운동을 전개한다. 이로 인해 투옥되었던 전진한(錢鎭漢: 1901~1972)은 해방 후 제헌의원으로서 이익균점권 조항을 주창하여 관철하고, 노동3법을 입법화하여 산업화의 제도적 기초를 마련했다. 
건국기에는 공공성이 시대적 이슈였다. 대한민국임시정부 헌법은 대한민국의 정체를 민주공화주의로 규정하는데 이는 개념적으로는 정치 주체와 공동체적 조화와 합일을 지향하는 공공성의 표현이다. 미군정시기와 전쟁복구기간 및 개발연대 시기에는 공공사업은 확대되었으나 공공성은 위축되었다. 지식인 사회는 유신독재를 긍정하는 관제적 공공성과 개발독재에 저항한 민주적 공공성으로 분열하였다. 학생운동은 군사독재를 이어 문민독재가 종식될 때까지 지속되어 한국에서 민주주의가 정착하는 데에 가장 크게 기여하였다. 학생운동은 군사독재 세력을 내쫓을 수는 없었지만 집권층과 일반대중에게 저항세력이 있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공공성을 지키려는 거의 유일한 세력이었다. 

산업화된 한국 사회에는 노동운동이 등장하지만, 경제주체로서의 노동운동가 또는 운동집단이 사회 현실과의 관계에서 역사적 현실에 대한 책임을 자각하고 사회적 역할을 담당하려는 의식을 결여했다. 공공성을 지니는 의제가 노동운동의 장에서 제시되지 않았다. 노동운동가는 공공성의 주체로서 스스로를 자리매김하지도 않았다. 공공적 역할의 기회가 주어져도 회피하고는 이해관계자의 위치에 머물렀다. 

대기업노조는 국가와 자본에 대한 저항성을 지녔으나 포괄적 노동계층의 이익을 대변하려는 의사가 없었다. 노동운동은 운동주체가 그 범위를 협소하게 정하여 정규직의 이익추구에만 몰두하고 일반 다양한 노동계층은 물론 일반 대중의 이해에 무관심하였다. 노동계층 내 경제적 형평성을 이루기보다는 오히려 임금격차를 확대시켰다. 반면 교직원노동운동은 지향성에 있어서 공공성을 지녔으나, 보수 정권의 억압으로 위축되었다. 1990년대 이후 한국에서는 노동운동이 사회발전의 동력으로 작용하리라는 기대는 사그라졌다. 

동학운동과 100년의 시차를 두는 1994년의 한국 사회운동은 공공성 수준에서 커다란 차이를 노정한다. 동학운동은 외세와의 대결에서 실패했으나, 전통 사상을 계승한 천도교는 공공성을 지녔기에 3·1운동의 동력이요 민족주의계열 독립운동의 저수지로 기능할 수 있었다. 제6공화국 이래 경제학자들과 노동운동가는 신자유주의 이론으로 무장한 글로벌 자본의 공격을 막는 민족적 저항세력으로 기능하지 못하였다. 외환위기의 원인을 유교의 잔재라 지목하면서 정부조직 경제기획원을 해체시키려는 글로벌 자본의 압박을 논리를 통해서나 저항성 발현으로서나 저지하지 못했다. 

갑오경장 이후 근대화는 조선에서 역사적 무게를 지닌 시대정신이었고, 시대가 요구하는 사회적 역할을 감당하는 것은 자존의 문제이기도 했다. 공공성의 주체가 되기 위해서는 역사적 책임의식을 필요로 한다. 지식인은 공동체에 기여할 것으로 기대되었고, 근대화 과정에서 지식인이 기여했는가 또는 변절했는가의 판별 기준은 공공성이다. 

근대화 과정에서 공공성이 도외시된 데에는 변절한 지식인의 영향이 컸다. 일제 강점기의 변절한 지식인과 개발 독재 기간 권력자에 영합한 지식인 그리고 자본과 결탁하는 지식인 (과학자 또는 전문가)은 우리 사회를 이해타산 위주의 사고와 단기 이익에 주목하는 편파적 효율성 위주의 안목을 지니게 하였다. 전쟁과 개발연대를 지나면서 한국 사회는 공공성이 위축되었다.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시민운동이 확대되어 다소나마 권력과 자본의 유착을 억제하고 있다. 

지식인의 역할은 시대 현실을 바로 파악하고 방향 감각을 바로 세우는 데에서 가치를 지닌다. 우리는 전통과 현대 사이에서의 가치관 위기, 경제성장과 안보, 과학기술의 우상화 속에서 적절한 위치를 찾지 못하는 인간성의 위기를 파악하고 사회가 어떤 사상과 원리를 바탕으로 운영되어야 할 것인가를 숙고하여 건강한 방향성을 모색하여야 한다. 인간성을 회복하고 각자 자기가 누구인지를 제대로 인식하는 데에서 국가의 정체성 설정과 정책방향 모색이 타당하게 이루어질 수 있다.

이정훈 전 관동대학교 교수. 한국생산성본부 생산성연구소장, 노동연구실장을 역임했다. '패러독스 경영연구' 등의 책을 썼다.
이정훈 전 관동대학교 교수. 한국생산성본부 생산성연구소장, 노동연구실장을 역임했다. '패러독스 경영연구' 등의 책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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