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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원 김홍도
단원 김홍도
  • 조재근
  • 승인 2020.06.05 09:4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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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월한 기량 보유한 조선 후기 최고 화가
단원 김홍도
단원 김홍도

장진성 지음 | 사회평론아카데미

조선 후기 대표 화가 김홍도는 《단원풍속화첩》(보물 제527호,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으로 인해 서민들의 일상생활을 생생하게 그려낸 ‘풍속화가’로 널리 알려져 왔다. 이 화첩은 김홍도가 이룩한 화가로서의 업적을 한국적 풍속화가라는 범주 안에 가두어버리는 부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김홍도는 풍속화만 잘 그린 화가가 아니었다. 그는 풍속화뿐 아니라 산수화, 도교 및 불교 관련 그림인 도석화, 화조화, 인물화 등 모든 그림 장르에서 탁월한 기량을 발휘한 조선 후기 최고의 화가였다.

이 책은 김홍도의 생애와 작품을 객관적인 시선으로 고찰함으로써 가장 조선(한국)적인 풍속화가라는 대중적 통념에서 벗어나 역사적 진실 그대로의 김홍도를 복원한다. 특히 《군선도》, 《행려풍속도》, 《해산도병》, 《삼공불환도》 등 김홍도의 화가로서의 진면목을 확인할 수 있는 ‘병풍화’를 통해 그의 작품세계를 자세히 분석했을 뿐 아니라 다양한 문헌 자료를 통해 도화서 의 실력 있는 화가를 넘어 정조의 총애를 받은 ‘왕의 화가’ 김홍도와 그의 ‘자아의 영역’에 대한 심도 있는 접근을 시도한다. 아울러 동시대 중국과 일본의 화단을 비교함으로써 김홍도가 18세기 동아시아 화단의 독보적인 천재 화가였음을 밀도 있게 재조명하였다.

김홍도의 생애는 다른 조선시대 화가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널리 알려져 있으나 여전히 명확하지 않다. 저자는 많지 않은 문헌 기록들을 토대로 그의 생애와 작품의 제작연도 및 해당 작품에 대한 당대의 평가 등을 촘촘히 복원해냈다. 특히 어린 시절 인연을 맺은 강세황이 세간에 알려진 것과 달리 김홍도의 그림 스승이 아니었으며, ‘단원’이라는 호에 관한 당대 기록을 통해 그가 안산에서 살았다는 설의 허구성을 밝혀냈다. 또한, 혈연적 유대감이 강한 다른 도화서 화원 집안과 달리 중인 무관의 집안임에도 타고난 천재적 재능과 노력을 통해 10대 후반 도화서 화원이 되었으며, 20대 말에 영조의 어진과 왕세손(후일의 정조)의 초상화, 그리고 의궤를 제작하는 등 도화서의 실력파 화가로 성장한 과정을 재구성해 들려준다.

그렇다면 이 책은 《단원풍속화첩》으로 인해 만들어진 풍속화가라는 김홍도에 대한 대중적 통념을 어떻게 전복했을까? 저자는 김홍도의 화가로서의 진면목은 그의 ‘병풍화’를 통해 살필 수 있다고 주장한다. 병풍은 스케일과 화면 구성, 세부 표현에 있어 화첩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차이가 크기 때문이며, 김홍도가 새로운 구도와 기법을 실험하고 남긴 명작 대부분이 ‘병풍화’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책은 김홍도 나이 32세 때 그려진 《군선도》(1776)를 비롯해 다양하게 그려진 그의 병풍화에 주목한다. 속필을 통한 시원한 필선과 화면 구성이 돋보이는 《군선도》, 강세황이 주목한 ‘완연히 눈앞에 펼쳐진 삶의 현장’이 사실적으로 구현된 《행려풍속도》(1778)에 대한 저자의 치밀한 작품 분석은 김홍도가 왜 병풍화의 대가인지를 깨닫게 한다. 더불어 이 책은 문인들의 이상적인 모임을 그린 《서원아집도》(1778), 그림으로 인생을 표현해낸 《모당평생도》(1781), 금강산 그림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한 《해산도병》(1788), 정조에게 마지막으로 바친 《주부자시의도》(1800), 현존하는 김홍도의 마지막 병풍인 《삼공불환도》(1801) 등 김홍도의 생애와 함께해온 주요 병풍도를 집중 조명함으로써 천재 화가 김홍도의 다양한 작품세계뿐 아니라 그의 내면세계까지 온전히 복원하고 있다.

이 책은 특히 김홍도와 정조의 관계에 주목한다. 김홍도가 당대 최고의 화가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정조의 후원이 있었기 때문이다. 왕세손 시절 처음 초상화를 그리면서 맺어진 이 둘의 인연은 정조의 재위 기간(1776~1800) 내내 이어졌다. 즉위 이후 정조는 자신이 가장 중요하게 여긴 규장각을 김홍도에게 그림으로 그리게 하는 등 궁중의 모든 그림 관련 일을 맡겼다. 이외에도 정조의 명을 받은 김홍도는 금강산과 영동 지역을 직접 방문하고 실경산수화를 제작했으며(1788), 대마도로 건너가 지도를 그려왔다고도 전한다. 이후 정조의 화성원행(1795), 화성 건설(1796년 완성)과 관련된 그림 작업을 총괄하였다.

정조가 김홍도에게 궁중의 모든 그림 관련 일을 맡긴 것은 단순히 그의 그림 실력에 대한 믿음 때문만은 아니었다. 김홍도의 높은 지적인 능력과 문학적 소양에 대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인데, 이 책은 김홍도가 정조에게 바친 《주부자시의도》 등의 그림을 통해 이를 논증하고 있다. 저자는 특히 김홍도에 대한 정조의 절대적 신뢰와 총애를 자비대령화원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고 말한다. 1783년 11월 21일에 시작된 자비대령화원은 도화서 화원 중 유능한 자 10명을 선발해 시험을 치러 녹봉직을 주는 제도였는데, 정조 치세 내내 김홍도는 자비대령화원으로 뽑히지 않았고 녹취재도 보지 않은 아주 특별한 열외 화원이었다.

그러나 ‘왕의 화가’이자 당대 최고의 화가였던 그 또한 여타의 중인과 마찬가지로 사회적 무시와 차별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50대 전반에 사용한 ‘천생아재필유용(天生我才必有用: 하늘이 나에게 재주를 주었으니 반드시 쓰임이 있을 것이다)’은 자신의 능력이 제대로 쓰이지 못한 현실에 대한 한탄을 담고 있다(7장 참조). 김홍도의 말년은 더욱 쓸쓸했다. 정조 사후 자비대령화원으로 생애 처음 뽑힌 김홍도는 1804년 60세의 나이에 다른 화원들과 녹취재를 볼 수밖에 없었으며, 이후 병을 얻어 1806년 전라감영이 있는 전주에서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 책은 정조와 김홍도의 그림으로 맺어진 인연을 통해 ‘왕의 화가’로서 능력을 인정받았으나 신분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 화가 김홍도의 빛과 그림자를 함께 들려준다.

김홍도의 화가로서의 위대함은 다른 여타의 책에서도 다루어졌지만, 이 책은 특히 18세기 동아시아 화단 전체의 맥락에서 김홍도의 화가로서의 위상을 살펴보고 있다. 18세기 후반 조선에서는 김홍도를 능가하는 화가가 없었으며, 아울러 동아시아에서도 가장 뛰어난 화가였다. 이와 비슷한 시기 중국에서는 건륭제가 남송 이후 사라졌던 화원(畵院, painting academy)을 부활시킴으로써 뛰어난 화가를 다수 배출했지만 1770년대 중반 황실호위병 화신이 혜성처럼 나타나 건륭제를 등에 업고 실권을 잡자 급속히 몰락하였다. 이후 중국에서는 뛰어난 화가가 나타나지 않아 중국 화단은 암흑 속으로 사라진다.

특히 건륭제 시대를 대표하는 궁정화가인 서양이 1776년 무렵 역사에서 퇴장하는데, 이때 바로 조선에서는 정조가 등극하고 김홍도가 《군선도》를 그리면서 그림의 절대 강자로 급부상한다. 김홍도의 라이벌은 일본에도 있었지만 이들의 화풍은 다양하지 못했고 자신들이 잘하는 그림에만 재능을 보이는 한계를 지녔다. 이와 달리 김홍도는 그림의 모든 장르에서 걸출한 능력을 발휘한 거의 유일한 화가였다. 이 책은 조선이라는 일국적 시각을 넘어 18세기 동아시아 화단을 거시적 시각으로 비교분석함으로써 김홍도가 풍속화가로만 국한될 수 없을 만큼 18세기 조선을 넘어 동아시아 화단 전체에서 가장 탁월한 화가였음을 세밀하게 논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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