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제일 서러운 게 뭘까. 억울한데 아무도 그 사연 들어주지 않을 때. 들어줄 사람이 아무도 없을 때. 사랑은 그 찬스를 비집고 시작된다. 내 얘길 들어주는 사람. 그 사람이 바로 내 편이라는 확신이 들면서 사랑은 시작된다. 엄마, 아버지, 형제, 자매들. 피를 나누고 어려서 같이 뒹군 가족은 오래 떨어져 있어도 보고 싶다. 내 편이기 때문에 그렇다. 사랑하는 애인이 생기는 이치도 비슷하다. 나를 이해해주는 내 편이 생기는 개념이다.
영화 <가장 보통의 연애>(2019)를 보면 파혼당한 남자 재훈(김래원)이 처음 알게 된 직장 동료 선영(공효진)에게 두 시간 동안 울면서 통화를 한다. 그것도 새벽에. 술이 만취하면 필름이 끊어지는 재훈은 다음날 선영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어떻게 두 시간을 들어줄 수 있었냐고 신기한 듯 물었다. 상대가 아무도 내 얘기를 들어주지 않는다며 울면서 말하는데 어떻게 끊을 수 있냐고 선영이 말했다. 연애의 정석 제일조는 남의 얘기 들어주기다. 남의 얘기를 들어주면서, 들어주는 상대를 내 편이라고 호감을 갖게 되면서 사랑은 시작된다. 재훈이 선영을 사랑한 것은 어쩌면 그 일이 준 심리적 효과 때문일 것이다. 내가 술취해 떠드는 얘기도 진지하게 두 시간동안이나 들어주는 그 성의. 그것이 감동을 주고 자신을 안정시켜 준 건지도 모른다. 사랑은 상대의 싫은 모습을 엿보고 모른 척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 시작으로 재훈은 선영을 따라다니면서 구애를 한다. 하지만 한번 여자에게 차인 적이 있는 그로선 노골적으로 좋아한다는 말을 못한다. 선영 역시 마찬가지다. 남자에게 데인 적이 있는 여자로서 그를 경계하고 조심하는 게 당연하다. 술을 먹어야 서로를 터놓지 맨정신에선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것이 마치 사회적 거리를 유지하는 냉랭한 요즘과 흡사하다. 필름이 끊어지고 고주망태가 되어야 비로소 제정신 드는 게 사랑이다. 하지만 지금은 거리를 두고 머뭇머뭇 조심하는 연애 시대다.
언택트 시대가 되면서 사람 간 거리가 생기기 시작했다. 온통 마음에 멍 자국인 우울한 사람들뿐이다. 비단 사랑의 관계뿐이 아니다. 속맘을 털어놓고 얘기하고 싶은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하지만 대놓고 털어놓을 사람은 있는지. 속 시원히 털어놓고 싶은데 그럴만한 사람은 있기나 한지. 그런 게 답답하다. 영화에서처럼 고주망태가 되도록 술이나 마셔야 헛소리라도 하지.
내가 아는 어떤 사람도 얼마 전 자신의 복잡한 사연을 털어놓으면서 이 얘기는 어느 누구에게도 하지 못해 그동안 괴로웠다고 했다. 그 얘기를 들으면서 너무 복잡한 스토리에 난 그날 하루 종일 심란했다. 얼마나 오랫동안 가슴속 얘기를 하지 못했고 또 답답했을까. 얘기해도 될까 하고 몇 번씩이나 조심스럽게 망설이던 모습이 계속 떠올랐다. 난 기꺼운 마음으로 들어주었다.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다고 울면서 말하는 재훈의 얘기를 들어준 것처럼 나도 안 들어주면 도저히 안될 것 같아 그냥 들어주었다. 아무에게나 말하지 못하는 속사정을 들어주는 사람의 인내심은 정말 아름답다. 말하기도 어렵지만 들어주는 것도 보통 정성이 아니면 안 된다.
뭐든지 조심해야만 하는 세상을 앞으로 얼마나 더 살아가야 할지 기약이 없어 막막하기만 하다. 청춘들은 자유로운 사랑을 해야 할 권리가 있는데 이렇게 막막하고 먹먹한 사회적 거리를 어떻게 비집고 들어가 사랑을 할까. 코로나 블루 시대의 사랑은 새롭게 사막을 건너는 법으로 등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