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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의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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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재근
  • 승인 2020.05.19 12:0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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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의 시
끝의 시

 

마리나 이바노브나 츠베타예바 지음 | 이종현 옮김 | ITTA | 320쪽

불운한 러시아의 천재 시인 마리나 츠베타예바의 대표 시집 《끝의 시》가 나왔다.

이 시집은 츠베타예바의 삶이자 회상이며 꿈의 편린이라고 할 수 있는 마흔다섯 편의 시를 담고 있다. 시를 매우 읽기 어렵게 만드는 하이픈(-), 대시(-), 콜론(:), 세미콜론(;), 느낌표(!) 등 과도할 만큼의 문장부호를 쓰는 시인임과 동시에, 20세기 러시아 문학에서 가장 위대한 시인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 그녀는 마치 재봉사처럼 그녀의 삶을 스쳐 지나갔던 시에 대한 열의와 감동을 시어들로 이어 붙여 우리에게 보여주며, 시집 끝에 수록된 그녀가 직접 쓴 일종의 자기소개서인 ‘이력서’의 글은, 보다 풍성하게 그녀의 시와 삶을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지금은 러시아의 천재 시인으로 인정받고 있으나, 파란만장한 시대에 태어나 불운한 삶을 살았던 그녀의 시를 통해 우리는 지금 우리의 삶에 대해서 질문을 던져볼 수 있을 것이다. 그녀는 노벨상을 수상한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의 소설 《닥터 지바고》의 ‘리라’의 모델이기도 했으며, 이후 러시아 음악가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는 그녀의 시 여섯 편을 가곡으로 작곡하기도 한다.

츠베타예바가 도달한 ‘끝의 선언’은 ‘끝’이라는 것 자체에 대한 성찰로도 이어진다. 과연 끝에는 시작과 끝이 있을까? ‘이것으로 끝이다’라고 이름을 붙이고 ‘끝’이라는 의미를 준다면 그것은 정말 ‘끝’일 수 있을까? ‘끝에 끝!’이 무엇을 뜻하는지 더듬어보는 화자처럼 시를 읽는 우리 또한 ‘ 끝에 끝!’이라는 같은 말을 반복하며 얼굴을 쓰다듬어보게 된다.

세계로부터 추방당했다는 절망감은 시를 발표하지 못하게 된 츠베타예바는 책을 거의 내지 못한다. 1928년에 낸 《러시아를 떠나》가 생전에 출간된 마지막 시집이었다. 파리로 이주한 후에도 그녀는 환대받지 못한다. 그 누구와도 시적으로 소통할 수 없었던 상황에서 그녀는 ‘독수리-음모가’들의 연합을 꾸리게 되고, 파스테르나크의 주선으로 당시 스위스에 살던 라이너 마리아 릴케와 삼각 서신을 주고받기 시작한다. 하지만 그해 말 릴케가 죽으면서 셋의 서신교환은 중단되고, 결국 릴케를 한 번도 만나지 못한 채 그에게 바치는 장시 〈새해에 보내는 편지〉를 쓴다. 릴케 역시 생전에 츠베타예바에게 바치는 시 〈비가〉를 썼는데 이 시들에선 둘의 끈끈한 연대 의식이 잘 나타나 있다.

시적 동지들이 세상 어딘가에 존재한다는 믿음으로 어려운 시절을 버티면서도 츠베타예바는 ‘시인은 동시대에 발을 맞추기보다는 외롭더라도 자기 자신에게 진실해야 한다’라는 생각을 굽히지 않는다. 17년간의 고독했던 해외 생활을 마치고 1939년 소련으로 돌아가지만 이후에도 그녀의 삶은 불행의 연속이었다. 딸은 체포되고, 남편 세르게이 에프론은 간첩 혐의로 처형당한다. 그리고 그녀 역시 같은 해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여러 편의 희곡과 시집을 남겼지만, 생전에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한 채였다. 스스로 목숨을 끊음으로써 츠베타예바는 평생 그녀를 따라다녔던 ‘거-리’를 극복하고 ‘나의 사람들과 함께’할 수 있게 되었을까? 역자는 이 자살조차 그녀의 “그동안의 삶을 결산하는 것처럼 보인다”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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