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곱세크-오노레 드 발자크 소설
곱세크-오노레 드 발자크 소설
  • 조재근
  • 승인 2020.05.19 10:3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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곱세크
곱세크

 

오노레 드 발자크 지음 | 김인경 옮김  | 꿈꾼문고  | 182쪽

소설은 1829년에서 1830년으로 넘어가는 파리의 겨울 새벽, 드 그랑리외 자작부인의 살롱에서 화자인 소송대리인 데르빌이 자작부인의 딸 카미유와 젊은 에르네스트 드 레스토 백작의 사랑을 돕고자 백작 가문의 영락과 깊은 관계가 있는 고리대금업자 곱세크의 비밀스럽고 기이한 삶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데르빌이 처음 만났을 당시의 곱세크는 늙은 유대인 고리대금업자라는 상투성 때문에 일견 수전노의 표상으로 생각될 수도 있었지만, 집안의 폭군이자 구두쇠 그랑데 영감(『외제니 그랑데』) 혹은 부성애의 상징 고리오 영감(『고리오 영감』)처럼 전형적인 모습보다는 양가적이고 모호하며 불가해한 면모를 보인다.

곱세크는 열 명의 고리대금업자들로 이루어진 일종의 비밀결사에 속해 있다. 이들은 “모두 조용하고 알려지지 않은 왕들”이며 “검은 장부”를 갖고 “운명의 결정권을 쥐고 있는 자들”이다. 유명 귀족 및 부르주아 가문 대부분의 비밀과 그들이 벌이는 사업의 정보를 파악하고 있으며, 법조계 및 정·재계의 유력 인사들, 상류사회의 청년들, 댄디와 노름꾼, 배우와 예술가들을 자본을 매개로 지배한다. 이처럼 결코 그 정체성이 파악되지 않는 비밀스러운 인물, 막강한 정보력과 예지 능력, 세계의 이면을 꿰뚫어 보는 눈을 지닌, “황금의 힘을 구현하는 터무니없이 환상적인 인물”인 곱세크는 세상에는 단 하나의 힘, 즉 인간의 모든 정념을 빨아들이는 돈의 힘만이 존재한다고 역설한다.

그러나 초연하고 무감동한 현자의 눈으로 세계와 인간의 본질을 냉정하게 관찰하고 기계적인 엄정함으로 부를 쌓아가던 곱세크는 소설의 말미에 가서 비논리적인 탐욕의 본능에 완전히 사로잡힌다. 드 레스토 백작의 죽음 이후, 백작과의 이면 계약에도 불구하고 그 집안의 재산을 모두 전유하고, 일종의 균형 감각을 제공했던 데르빌과의 교제마저 끊어지면서, 마치 인간 상어처럼 모든 것을 집어삼키려다 도리어 “일종의 광신으로 변모된 정념”에 그 자신이 삼켜진 것과 같다.

자본을 소유함으로써 세계를 지배할 수 있다고 믿었으나 살아 날뛰는 생물과도 같은 자본의 힘을 운용할 줄 몰랐던 곱세크는 축적과 저장의 욕망에 잠식당하며 세계의 밑바닥으로 무너진다. 비이성적인 정념에 침투당한 곱세크의 몰락은 ‘돈이 지배하는 사회에 오염되지 않은 젊은이의 표상’이자 분석적인 정신의 소유자인 법률가 데르빌의 성공과 대비를 이루는데, 화자인 데르빌이 작가 발자크의 관점을 대신한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곱세크』의 초안은 1830년 3월 잡지 『라 모드』에 실린 「고리대금업자」라는 콩트이다. 그다음 달에 이 글을 바탕으로 ‘고리대금업자’, ‘소송대리인’, ‘남편의 죽음’이라는 소제목으로 나뉜 이야기 속 이야기 형식의 단편소설 『방탕의 위험』을 출간한다. 이후 1835년에 초판을 수정해 발표한 것이 『파파 곱세크』이고, 1842년에 마침내 결정판 『곱세크』가 출간된다.

발자크는 1835년 『고리오 영감』을 시작으로 인물 재등장 수법을 통해 자신의 여러 소설들 사이에 상호텍스트성을 구축하는데, 이 점에서 1835년 수정판 『파파 곱세크』의 등장인물명 수정은 의미심장하다. ‘에밀 M.’으로 표기되었던 소송대리인에게 ‘데르빌’이라는 이름이, 드 레스토 백작부인의 연인으로 묘사된 익명의 백작에게 ‘막심 드 트라유’라는 이름이, 드 레스토 백작부인에게는 ‘아나스타지’라는 이름이 부여되면서 『고리오 영감』과 상호 연결 되고 『인간희극』이라는 거대한 총서에 자리 잡게 되기 때문이다.

반면 『곱세크』 초안의 집필 시기를 표시한 ‘1830년 1월 파리에서’를 1842년 결정판에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 점 또한 특별한 의미가 있다. 1830년 1월은 7월 혁명으로 왕정복고 시대가 무너지고 부르주아의 왕 루이필리프의 시대가 다가오고 있던 시점이었다. 즉, 발자크는 다가올 시대의 특권층은 전통적 의미의 혈통과 그 명성에 기반한 귀족 계층이 아니라 돈과 개인적인 공적에 기반한 부르주아 계층임을 초안 집필 당시에 밝혀두었고, 1842년 결정판을 『인간희극』의 1부에 배치하면서 이 관점을 고수한 것이다.

이렇듯 무한히 뻗어만 가는 인간의 욕망과 그 욕망을 발판으로 굴러가는 사회를 날카로운 통찰력으로 세밀하게 묘파한 이 작품은 발자크의 역작 『인간희극』을 간결하게 요약한 축소판이자, 이 거대한 세계를 여는 작은 열쇠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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