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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무난하고, 매끄럽고 혹은 너무 세련된
너무 무난하고, 매끄럽고 혹은 너무 세련된
  • 박영택 경기대
  • 승인 2003.12.04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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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비평: 한국 미술운동 1세대 작가들의 변화: 손장섭, 신학철, 심정수, 이종구, 윤석남

박영택 / 경기대, 미술평론가

▲'날아가는 불꽃', 심정수 作, 310*150*53cm, 나무와 스테인리스, 2003. ©
연중 가장 볼만한 전시가 열리는 달이 바로 10~11월이다. 올해 역시 주목할 만한 몇몇 전시가 이 때 열렸다. 그런데 흥미로운 건 이른바 1980년대의 대표적 작가, 흔히 민중미술의 선구적 존재로 각인된 몇몇이 비슷한 시간대에 개인전을 열었다는 점이다. 이십여 년이 지난 지금 그들의 근작을 한 자리에 불러모아 들여다본다는 경험과 체험은 예사롭지 않다. 손장섭과 신학철, 심정수와 이종구가 바로 그들이다. 한편 1990년대 초에 페미니즘 조각작업을 통해 주목받은 윤석남의 근작 역시 같은 선상에서 바라봐도 무방할 것이다. 한국현대미술의 주요 분기점을 만든 미술운동의 선구자로서 일종의 신화적 존재인 이들은 지금 젊은 세대들에겐 별다른 감흥을 못 줄 수도 있다. 민중미술 자체가 과거이며, 이들도 어느 정도 이미 역사가 돼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로 인해 한국현대미술이 ‘모더니즘의 뒷문’에서 빠져 나와 새로운 미술운동, 진정한 한국의 모더니즘미술로 나갈 수 있었음을 부정할 순 없다. 이십여년이 지난 지금 미술의 지형도도 무척 달라졌지만, 그것들 중에는 변하지 말아야 하는 것들도 있을 것이다.

관념으로 강화된 이 땅에 대한 애정

▲'떠나가는 사람들', 신학철 作, 106*45.5cm, 캔버스에 유채, 1990. ©
무엇보다 신학철의 작업을 한 자리에 모은 ‘우리가 만든 거대한 像’展이 돋보인다. 1970년대 아방가르드 작업에서 최근의 사회 비판적 작품까지 망라한 이번 회고전은 민중미술 대표작가의 작업세계를 온전히 들여다보게 한다. 한국근현대사의 온갖 상처와 현실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시선에 의해 채집된 무수한 이미지의 몽환적 구성, 충격적인 화면구성과 그로테스크한 미학에서 신학철만의 뛰어난 연출력(임옥상과는 또 다른 힘있고 남성적이고 우직해보이는 진솔함)과 손의 솜씨를 만나지만, 단조롭고 너무 강렬한 이미지의 연출에 기대는 방법론이 오래 지속되는 것 같아 아쉽다. 포토 몽타쥬 작업과 이를 응용한 회화작업 간의 변별성을 찾기가 어렵다. 그것이 하나의 회화로 독립되기보다는 일러스트레이션에 머물 위험이 있어 아쉽다. 오히려 1970년대 말 ‘A.G’에서 선보인 일련의 캔버스 작업이 지금 봐도 신선하게 느껴지는데, 그의 뛰어난 매체해석이 주제의식 아래 눌려있는 건 아닐까. 신학철은 여전히 동시대의 모든 삶의 문제를 비판적으로 형상화하려는 리얼리즘의식을 지닌 중요한 작가인데 그 ‘의미’가 오히려 덫이 되는 건 아닌가.   

  

▲'국토-福', 이종구 作, 117*77cm, 인쇄물에 아크릴, 2003. ©
손장섭과 이종구는 한국의 산하와 국토에 대한 회화적 신뢰성을 표방하는 작가들이다. 구상적인 형식과 재현적 스타일의 그림이지만, 단순한 사실적 그림과는 달리 자의적, 임의적인 변형과 환상이 가미된 독특한 구상화다. 오랜 시간에 걸쳐 그린 충실한 그림들은 큰 변화 없이 일관되게 이 땅에 대한 애정의 가시화란 선에서 기능한다. 그리고 그건 일종의 관념으로 강화된다. 민정기, 강요배 같은 작가들이 그 근거리에 자리하고 있다.

자연의 실체는 눈에 보이는 모든 걸 재현하는데 있는 게 아니라, 생각을 통한 느낌 전달에 있다. 즉 보는 걸로 충분하지 않고 화가의 시각으로 함께 느끼는 것이다. 특히 손장섭은 동양화적 방법론을 원용해 자연의 氣, 보이지 않는 힘을 가시화한다. 산수화에서 볼 수 있는 시선의 흐름 또한 자리한다. 이런 방식은 민정기의 그림에서도 보여지는 것으로, 민정기의 것이 다소 도식적이라면 손장섭은 회화적으로 풀려져 나오는 게 다르다. 또한 손장섭은 풍경을 인간의 삶과 함께 한 것으로 읽어나간다. 역사와 삶의 땟국이 질질 흐르는 그런 풍경 말이다. 일하는 풍경, 분단풍경, 삶의 현장에서 기원을 들어주며 동네 사람들과 함께 살아온 나무, 신기가 있는 나무가 그의 그림이다. 나로선 그의 수채화 몇 점이 무척 매력적이다. 그림을 참 편하고 소탈하면서도 기운차게 그리기 때문인데, 그 역시 손장섭만의 삶의 이력에서 번져 나오는 눈과 심성 때문에 가능하리라. 반면 일반적인 구상적 풍경과 차이가 크지 않아 그의 그림이 너무 무난하진 않은가, 그림 그리기에 충실한 화가의 손과 눈 아래 풍경이 너무 능숙하게 풀려나오는 건 아닌가 하는 불만이 있다. 하지만 ‘눈꽃’같은 작품은 자연을 보는 그의 놀라운 눈과 서늘하게 집약되는 마음의 결을 접하게 해주는 좋은 그림이다. 

그간 한국의 농촌현실과 농민문제를 집중적으로 그려온 리얼리즘작가 이종구의 근작에서 두드러진 변화는 본격적인 풍경의 등장이다. 그의 그림 중 ‘영토-압록강에서 두만강까지’나 ‘백두대간-아, 지리산 지리산’ 등이 새로운 풍경화다. 하긴 그는 줄기차게 이 땅을 다뤘고 문제시해왔다. 새삼스럽진 않지만 그의 이번 풍경들은 한반도의 산야를 도상학적 구도를 응용해 하나의 전체 상으로 구성한 그림들이고, 이는 그의 벅찬 국토애, 다소 감정이 앞선 뜨거운 땅에 대한 애착의 실질적인 구현같다. 즉 우리 땅의 유장함과 경건함에 대한 종교적 신앙을 표방한다. 오직 산으로 연결돼 바다처럼 흐르는 이 풍경은 유기적 생명체처럼 숨쉬고 존재하며, 그것에 살고 있는 우리를 새삼 돌아보게 하는 미덕이 있다. 반면 이 풍경은 너무 매끄럽고 현란하고 장엄해 드라마틱하다. 그런 드라마가 관념성을 지니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깃든다.

1980년대를 숨가쁘게 지나고 난 후 앞서 언급한 이들처럼 많은 작가들이 자연, 생명, 생태 등으로 관심을 옮겨갔다. 현실에 대한 첨예한 논쟁, 비판의 칼날 대신 부드럽고 관조적인 시선으로 자연을 찬찬히 살펴 보다 근원적이고 본질적인 문제들을 재현적으로 그려내는 것 역시 동시대에 많은 의미를 지닐 것이다. 그러나 이런 자연주의나 정신주의가 혹 퇴행적, 도피적으로 비칠 수 있음도 경계해야 할 것이다.  1980년대 형상조각의 중요한 작가 심정수의 근작은 상당히 장식화돼 있다는 느낌이다. 물론 그만의 조각적 태도, 조각의 근간에 대한 철저한 이해를 바탕으로 단단하게 매만져 나오는 구성의 맛은 여전하다. 반면 지나치게 날렵하고 공예화 됐다. 여전히 그만의 싱싱한 즐거움으로 이룬 장난들도 간간이 박혀있지만 그것들은 자꾸 부딪친다. 1980년대 인체조각을 통해 암울한 시대상을 빚어낸 작가의 작업과는 무척 달라진 부분이다. 이번엔 고구려고분벽화, 민화, 승무 등으로부터 아이디어를 얻어 물질과 그림자, 영혼과 육체 등의 관계를 불꽃, 연기, 바람의 이미지로 표현한 작업과 생의 원천문제를 담은 작업을 선보였지만, 그것들은 공예화되거나 모뉴멘트화되는 선에서 세련되고 정교해졌다. 

▲'날개', 윤석남 作, 170*14*220cm, 혼합재료, 2003. ©

한국 페미니즘미술의 대표적 작가이자 1990년대 초 나무작업을 통해 뛰어난 여성적 메시지를 표현해낸 윤석남의 근작 역시 예쁘게 다듬어지고 세련돼졌다. 뮤지올로지적인 연출과 디스플레이, 오브제의 사용에서 초기때의 풋풋하고 소박한 미감, 강렬한 주제의식에서 벗어나 원숙해졌음을 엿볼 수 있다. 반면 곱고 예쁘게 변한 근작은 너무 세련된 연출에의 의존을 통한 자기만족적 느낌을 준다. 주제가 치열해졌다기 보다는 그걸 다루고 표현하고 만지는 손길이 관능적으로 변했다. 그건 어쩌면 윤석남의 본질일 수 도 있겠지만, 관능과 화사함의 미학, ‘세련되고 아름답고, 鬼氣어리고, 에로틱한 여성 형상’이 단순하게 ‘이코노그라피’ 되고 있다는 느낌이다. 그래서 그녀가 일으켜 세운, 그녀만의 토템에서, 지나치게 서정적이고 말랑거리는 감촉들이 맴돈다.

칼날을 벼리는 의식 속에 힘 느껴져

신학철, 손장섭, 이종구, 심정수 그리고 윤석남, 이 중진작가들의 근작은 이전 작업에 비해 일정 부분 변화됐다. 그들이 지향하는 美術觀 역시 조금씩 다른 방향을 보여준다. 삶의 이력과 환경의 변화에 따른 자연스런 반응이자 변화일 것이다. 동시에 이전의 자기 작업에 붙은 의미망들을 여전히 알리바이로 끌어안으면서도 훨씬 개인적인 성향 아래 그것들을 부려놓는 배려들이 묻어난다. 그것이 역사적 상흔에 대한 악몽으로, 우리 국토의 산과 나무에 대한 애정으로, 민족문화의 저류에 있는 혼이나 정신으로, 혹은 내밀한 여성스러움의 속살과 고독으로 내려앉은 근작들은 나름대로 분명 그들이 시대와 대면하는 의식의 칼날을 벼리는 선에서 여전한 힘이 유지되고 있음은 분명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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