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3-28 18:35 (목)
불온을 넘어 반시론의 반어
불온을 넘어 반시론의 반어
  • 조재근
  • 승인 2020.05.14 10:3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불온을 넘어 반시론의 반어
불온을 넘어 반시론의 반어

박지영 지음 | 소명출판 | 626쪽

이 책은 한국의 문학사는 물론 전 정신사 전반을 통틀어 가장 진보적인 지식인이자 전위적 시인으로 손꼽히는 김수영의 치열한 삶과 문학에 대한 책이다. 특히 2000년대 중반 이후 소위 ‘서랍 속’에 감추어졌던 김수영의 불온시 발굴, 부인 김현경의 증언 등을 통해 드러난 굴곡진 생애사를 바탕으로 더욱 풍부해진 김수영 연구의 진일보한 면면을 총체적으로 반영하였다.

식민지 시기 만주 체험, 해방기 정치적 활동, 한국전쟁기 포로수용소 체험과 이후 끊임없이 그를 감시하던 시선은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처참한 삶의 궤적으로, 김수영이 우리 역사에 정통으로 맞서 싸워 왔음을 보여주는 증표이다. 시인 김수영은 우리가 단순히 숭배하는 참여시인이 아니라 ‘불온’이란 낙인으로 고통받는 양심적 지식인이었다.

그간 난해한 상징어들로 가득찬 그의 텍스트에, 한국현대사의 굵직한 파고와 역사적 고난이 굽이굽이 새겨져 있다는 점이 바로 이 책의 출발점을 이룬다. 그러나 이 책이 바라보는 김수영의 텍스트는 이 시기 단단한 금제로 개인의 인식적 자유를 억압했던 당대 사상 통제를 뚫고 나온 균열의 빛이었다. 그는 고통의 순간에도 단 한순간도 깨어있지 않은 순간이 없었다. 나아가 그는 시를 ‘불온’의 낙인을, ‘불온’한 목소리로 되돌려 주는 무기로 만든다. 그의 문학은 우리 한국문학사 최대의 아픔이자, 영광이다.

이 책은 그간 문학 연구에서 하위 텍스트로 소외시켰던 ‘번역’ 텍스트를, 시나 산문 못지 않게 중요한 연구 대상으로 승격시켜 논의한다. “내 시의 비밀은 번역을 보면 안다”는 김수영 산문의 잠언을 저자는 김수영 연구의 전면에 내세웠다. 강고한 검열 체제 때문에 우회적으로 발언할 수밖에 없었던 김수영의 시와 산문의 상징적 미로를 횡단할 수 있는 중요한 열쇠가 바로 그의 번역 텍스트라는 점을 꼼꼼한 실증과 텍스트 분석을 통해 밝혀 나간다. 이를 통해 김수영 문학의 핵심 키워드였던 반시(론), 긴장, 침묵, 죽음, 악(惡) 등이 품고 있던 의미의 장막을 풀어낸다. 그리하여 그의 시 전반이 추구했던 상징의 경지가 어떠한 치열한 인식적 고투를 거쳐 생성되는지, 그 결과 얼마나 오묘한 혁명적 폭발력을 지니게 되는지를 규명한다. 이로써 책은 시인이자 지식인, 또 이중어 세대이자 프로페셔널한 번역가였던 김수영의 다채로운 존재성을 입증한다.

나아가 이 책에서 밝혀낸 김수영의 번역가적 면모는 한국문학사가 그간 고질적으로 안고 있었던 ‘이식 문학론’의 혐의에서 벗어나게 하고, 번역이 한국 사상사에서 수행했던 역할에 대해 다시 한번 돌아보게 한다. 김수영은 번역이 단지 한 언어를 다른 언어로 옮기는 행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형식과 논리를 창출해 가는 창조적 과정이라는 점을 증명해 주는 중요한 대상이기 때문이다. 그는 번역을 통해 자신의 의식을 구성하고, 때론 시쓰기로, 혹은 번역 그 자체로 제국/식민의 논리를 뚫고 나갈 자기 논리를 만들어갔다.

이 책은 번역 연구 외에 김수영의 생애사적 사실을 밝힌 구술사 자료와 새로 발굴된 육필원고, 원본 텍스트 등 여러 텍스트를 성실하게 대조하여 그가 어떠한 방식으로 검열에 저항해 나아갔는가를 실증적으로 고찰한다. 이 과정을 살펴보면, 김수영이 자신에게 씌워진 불온의 굴레를 얼마나 치열하게 거부해 나아갔는가가 잘 드러난다. 그는 늘 문밖에 감시자가 서 있는 공포스로운 상황 속에서도 하고자 하는 말을 우회적으로라도 해 내고야 만다. 여러 검열 체제 때문에 자신의 원고가 심의에 걸리는 불우한 사태마저도 투덜거리듯 써 내며 그 과정을 자조적이면서도 풍자적으로 전달한다.

‘불온시’ 논쟁에서 얻은 크나큰 낭패감과 의무감도 이러한 ‘반검열의 수사학’을 창출해 낼 수 있게 한다. 그리고 그는 그 금제의 선이 미치지 않는 아나키한 유토피아적 공간을 그의 시 속에 창출해 낸다. 그것이 바로 ‘반시론’이라는 시적 전위의 세계로, 침묵과 에로티즘의 경지이다. 다양하게 위계화된 시선과 전체주의적 억압을 집단적으로 내면화하며 살아왔던 이 땅에서 이는 현재의 시각에서 바라볼 때에도 놀라울 정도로 전위적이다.

이 책은 금제가 하늘을 뒤덮었던 우리의 역사적 시공간을 뚫고 나간 시인 김수영의 시간을 분석하고, 기록해 나간다. 그리하여 이 책은 식민과 탈식민, 혁명을 겪어낸 후진국 남한의 지식인이, 모든 경계를 뛰어넘는 유토피아적 경지를 문학을 통해 완성해 낸 정점의 순간으로서 김수영을 기록한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