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19 11:25 (금)
'매서운' 코멘트, 자발적 연구모임에서 뜨겁다
'매서운' 코멘트, 자발적 연구모임에서 뜨겁다
  • 강성민 기자
  • 승인 2003.11.28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흐름 : 학계 내부의 프리뷰 문화의 현황

데카르트의 '성찰'이 원래 부피대로 번역됐다면 현재의 10배라고 한다.

원판은 책이 나오기 전 교정본을 갖고 데카르트와 당대 지성들이 격론을 벌인 부분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데카르트는 당시 '성찰'의 초고를 유럽 전역 7명의 학자와 연구모임에 보낸 후 질문과 답변의 공방을 벌였다. 거기엔 볼테르 같이 데카르트에 적대적인 학자들도 과반수 포함됐다.

각박해지는 현실, 외면받는 원고들

이렇듯 책이 나오기 전 초벌원고를 관련 학자들에게 미리 검토 받거나 조언을 구하는 일은 학문이 꼭 거쳐야 할 과정으로 여겨졌다. 지성사를 수놓는 수많은 서신교환이 말해주듯 여기서 책의 본질이 엎치락뒤치락 한다. 이런 학문의 문화는 지금도 남아 있다. 외국 책들은 조언자에게 보내는 감사인사가 한 페이지 이상 넘어가기도 하고, 국내 책들도 두세 명은 자주 언급되고 있다. 그러나 각박한 현실 여건상 '하면 좋은' 일로 돼가고 있다.

이런 '전공 내부의 프리뷰' 문화에 대해 학계는 일단 대찬성이다. 구승회 동국대 교수(윤리학)는 "저자의 눈에는 도저히 띄지 않는 글 전체의 기우뚱함이나 논변의 어색함이 검토될 수 있다"는 장점을 내세운다. 김유동 경상대 교수(독문학)는 "아도르노 번역 시 치명적 오류 두세 군데와 어색한 문장을 많이 다듬을 수 있었다"라는 경험담을 꺼내놓는다. 김석수 경북대 교수(철학)는 "민감한 주제라 망설여질 때 주위에서 북돋워주면 용기가 난다"라고 말하며, 유제분 부산대 교수(영문학)는 "특히 저서일 경우 이런 과정이 필요하다"는 주장을 펼친다.

학계의 '프리뷰' 문화는 저서냐 역서냐에 따라 수준과 빈도에서 차이가 있다. 저서는 웬만큼 친하지 않으면 교정을 부탁하기 힘들다. 잡무와 활동에 시달리는 한국적 상황 앞에서는 특히 그렇다. 학술지에 실린 논문을 모을 때는 토론된 사항을 각주로 처리하는 이상의 품을 들일 필요는 없지만, 강의노트나 잡지연재물, 프로젝트 연구를 펴낼 때는 주위 충고가 아쉽다고 한다.

한자경 이화여대 교수(철학)는 "학자들이 다들 워낙 바쁘고, 또 내 책이 남에게 내보일 만한가 싶어서" 꺼리게 된다고 한다. 정철희 전북대 교수는 "갈수록 논문 한편 흔쾌히 읽어주는 일이 드물어진다"라며 처음엔 반갑게 맞아주던 같은 학교 동료에게 한두 번 정중히 거절당하다 보면 매우 무안하다고 덧붙인다. 소수 학문에서는 '의리' 때문에라도 서로 꼼꼼히 읽어주는 경향이 강한데 비해, 학문적 시민권을 굳힌 쪽에서는 상대적으로 이런 문화가 약해지고 있다.

"국내, 저서에 대한 평가풍토 약해 리뷰 적다"

번역서에서는 영어 이외의 외국어로 쓰여진 학자 이름이나 용어 등에서 암초에 걸리는 책이 많다. 얼마나 많은 '교양서'들이 이 점에 무방비 상태인가는 누누이 지적돼 왔지만, 전공 학계도 이 부분은 쉽지 않다. 고중숙 순천대 교수(화학)는 "일부 이공계 학회의 경우, 홈페이지의 공식용어목록을 비회원들은 못 보게 홈페이지에서 제약하고 있다"라며 불만을 표시한다. 그의 말에 따르면 학회 발표용 논문은 다들 돌려읽는 눈치지만, '저서'에서는 이 부분이 해결 안 된다고 한다. 왜 그럴까.

김상환 서울대 교수(철학)가 그에 대한 힌트를 말해준다. 외국의 경우 책을 내면 엄청난 리뷰가 따라붙기 때문에 방어하는 차원에서라도 미리 매를 번다는 것이다. 하지만 한국은 아직 저서에 대한 평가풍토가 약하니 필요성이 덜 생길 수도 있다는 지적이다.

제도적 차원의 검토문화와 비제도적 차원의 그것을 나눠볼 수 있다. 제도적 차원은 학술진흥재단이나 대우학술재단의 지원연구에서 찾아볼 수 있다. 대우학술서는 중간과 마지막 두차례에 걸쳐 익명의 심사자에게 검토를 받는다. 여기서 심사자와 저(역)자 간 꽤 심도있는 토론이 이뤄진다. 프루동의 '소유란 무엇인가'를 번역한 이용재 박사는 이런 절차를 거친 후에도 "절친한 동료인 성백용 서울대 강사에게 부탁해 원문에서 모르고 빠트린 문단 몇 개를 발견할 수 있었다"라고 전한다.

몇몇 큰 출판사에서는 번역원고를 관련 전문가에게 보내 감수를 부탁하는 일이 점점 자리잡고 있다. 이는 출판사를 중간에 끼고 번역자와 전문가가 의견을 나누는 자리인데, 상호간 토론이나 깊은 논의까지 마련하지는 못하는 상황이다. 김석수 교수는 "아렌트 관련서에서 칸트 철학개념이 잘못된 부분이 있어 자세히 설명해 줬다"라고 말한다. 하지만 출판사에서 지불하는 수고비가 너무 싸거나 심지어 체불되는 등 제도화는 멀다는 지적도 있다.

오히려 비제도적 프리뷰 문화인 학자들의 자발적 연구모임에서 열기가 느껴진다. '유교사회학'(예문서원 刊)으로 학계에 파장을 던진 이영찬 계명대 교수(사회학)는 대구 지역 학자들의 讀會인 '동양사회사상연구회' 회원들에게 조언과 윤문을 거쳤다. 특히 동양철학자인 장윤수 교수의 집중적인 코멘트를 통해 책의 철학적 격을 높일 수 있었다. 과 동료 홍승표 교수의 '깨달음의 사회학'(이상 예문서원 刊)도 동일 과정을 거친 책이다.

동양철학, 역사학 쪽에서 지역별로 활성화된 연구모임들은 프리뷰 문화를 이끄는 소중한 존재들이다. 윤택림 박사의 '인류학자의 과거여행'(역사비평사 刊)도 '역사인류학연구회'의 토론을 거친 산물이다.

수평적 토론에서 수직적 교정으로

'학계 내부의 프리뷰'를 거치면 책은 더욱 윤택해진다. 또 학자간 유대감 강화, 토론 유발 등 좋은 점이 많다. 과거 퇴계와 고봉의 서신교환이 학계에 바람을 일으키고 당대 철학적 이슈들을 확정하는 과정처럼 말이다. 국내저술에 관심을 끄고 해외에만 안테나를 세우는 고질병도 이런 식의 사전 소통을 통해 바뀔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이런 과정을 거치지 않는 대부분의 책들은 대학원생이나 조교들과의 '도제적' 관계 속으로 점점 숨어들고 있는 형국이다. 외국 같은 경우는 출판사에 편집위원이 있어서 한번 더 대화하거나 검증하는 절차가 있지만, 우리의 경우 안면이 있는 출판사나 대학출판부, 소규모 전공서적 출판사에서 검토 없이 출판된다. 이런 책들은 업적목록에 한 줄로 올라가는 것 이상의 긴 생명력을 보여주는 경우는 물론 드물다.

강성민 기자 smkang@kyosu.net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