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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정론-원전센터와 핵폐기장
대학정론-원전센터와 핵폐기장
  • 이필렬 논설위원
  • 승인 2003.11.2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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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안에서 터지고만 '민란'을 접하면서 말에 대해서 생각해본다. 정부는 말을 사용하는 데 있어 많은 혼란을 보여주었다. 엉터리 용어를 만들어서 퍼뜨리기도 했고, 관계자들마다 말이 제각각인 경우도 많았다. 지금 부안에서 격렬한 저항이 일어나는 원인은 정부에서 처음부터 말을 정확하게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혼란스러운 말 중에서 압권은 원전센터라는 말이다. 정부에서는 지난 7월 말부터 방사성폐기물을 원전 수거물로 바꾸어 부르더니, 핵폐기물처분장은 아예 원전센터라고 부르고 있다. 언론에서도 대부분 원전센터라는 말을 사용한다. 원전센터라는 용어는 핵폐기물에 대한 우리 정부의 인식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언론에서 원전센터라는 말을 그대로 사용하는 것은 우리 언론의 현주소를 보여준다. 말에 대해서 꽤 민감하다고 자처하는 언론도 핵폐기물에 대해서는 거의 관심이 없는 것이다.

원전센터는 부드럽게 들리기는 하지만 핵 폐기장을 가리키는 것이다. 원전센터라는 말은 무서운 핵폐기물을 연상시키지 않는다. 정부에서는 바로 이것을 노리고 갑작스럽게 용어를 바꾼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이렇게 용어를 바꾼다고 해서 사실까지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렇게 해서 부안군민과 전 국민의 생각까지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오히려 그들은 정부의 얕은 꾀를 접하면서 더 크게 분노할 것이다.

방사성 폐기물이나 핵폐기물은 모두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용어로 방사능 찌꺼기를 가리킨다. 모두 그 자체로서 방사능을 내놓는 쓰레기라는 의미를 전달한다. 그러나 원전수거물이나 원전센터라는 용어에는 그러한 의미가 조금도 들어있지 않다. 원전센터라는 말은 원자력 연구센터라는 의미를 강하게 풍긴다. 그렇다면 그 말을 처음 들었을 때, 그것이 방사성 폐기물을 처분하는 시설로 알아들을 사람은 아마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말이 서야 나라가 바로 선다는데 이렇게 말을 혼란스럽게 만들면서 어떻게 나라를 바르게 통치하겠다고 큰소리치는 것인지 알다가 모를 일이다. 이 나라 정치의 현주소는 원전센터라는 말 속에 압축되어 있다. 우리 정치는 지금 말을 혼란스럽게 만들고, 이름을 교묘하게 왜곡하고 있다. 그러니 정치가 바로 설 리 없다. 노동자와 농민의 격렬한 저항이 일어나고, 아파트 값이 천장부지로 치솟고, 부안군민들이 저항하고, 수십일간의 단식이 끊이지 않는 것이 모두 그 때문이다.

지식인이 기꺼이 해야 할 일의 하나는 말을 제대로 지키는 것이다. 유학의 정명(正名)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용어를 정확하게 사용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은 누구나 인정하는 바일 것이다. 언론에서 원전센터라는 말을 접하면서 그동안 교수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냥 지나쳤다면 그 무관심이 오늘의 사태를 불러오는 데 일조하지는 않았을까.

이필렬 논설위원 한국방송통신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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