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23 18:10 (화)
미술비평: 손장섭의 회화세계와 그 비평
미술비평: 손장섭의 회화세계와 그 비평
  • 강수미 홍익대
  • 승인 2003.11.21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조선 놈 장섭이여 그대 가는 걸음마다에 소주꽃 향기 가득하여라

손장섭(1941~)은 고교시절 4.19 경험을 ‘사월의 함성(1960)’으로 표현한 것에서 시작해, 1960~70년대에는 주로 한국 사회의 중압감과 모순을 관조적 시각으로 조명했다. 1970년대 후반부터는 추상주의 순수미술이라는 틀로 가난한 삶, 소외지대, 현대사의 항거와 희생 등을 냉철하고도 비극적인 시각으로 화폭에 담아냈다. 특히 1980년대엔 ‘역사의 창’이란 연작을 통해 민족분단의 아픔을 발언하는 정치참여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한편 1990년대 이후부터는 전혀 색다른 회화세계를 보여주는데, 이젠 한국의 자연과 삶의 풍경을 정겹게 표현해내는 데 집중하기 시작했다. 색채나 구도에서 많은 변형을 가하고, 환상적인 분위기를 담아내는 것도 최근의 특징이다.[편집자주]

미술에만 한정시키더라도, 우리가 잃어가고 있는 고귀한 가치 중 하나는 ‘존경’이고 ‘아우라’가 아닐까 생각한다. ‘존경’은 작가라는 존재자에 대한 것이고, ‘아우라’는 작품이라는 존재에 한정한 의미로다. 글로벌 시대 ‘속도’와 ‘경제가치’라는 기준이 예술영역에까지 내밀해진 지금, 우린 한 작가의 축적된 인식과 그에 대한 평가를 얻기 힘들고, 생활의 효용성을 직접적으로 띠지 않는 예술작품의 정신적 가치를 즐기기가 점점 어려워진다. 당연한 듯 작가에 대한 존경은 수용자에게 요구하는 낡은 억압적 가치로, 작품의 아우라는 예술계의 허구로 좌천된다.

이런 마당에 지난 시대부터 한 사회의 개인으로서든 미술가라는 공인으로서든 자신의 내적 質을 지켜 오고 있는 작가들의 전시와 논의가 활발해지고 있어, 미술비평을 하는 후학으로서 무척 고맙다.

비평가 성완경, 김광우 그리고 추상과 흰색의 발견

최근 금호미술관에서 열린 ‘손장섭’ 展과 그에 맞춰 발간된 ‘자연과 삶, 손장섭(미술문화 刊)’은 그런 의미에서 값진 것이고, 과거와 연결된 현재 진행형 비평을 가능케 한다. 1960년대부터 시작된 손장섭의 화력 40년은 그냥 얻어진 게 아니다. 또한 그렇기에 그 삶과 예술에 대한 말의 무게도 진중하고 넓게 퍼진다. 부족하지만, 한 작가의 화업이 만들어낸 풍경과 그 풍경에 대한 말들의 풍경을 더듬어 볼 이 글은 풍경의 풍경의 풍경, 그러니까 메타 풍경쯤(beyond보다는 after의 의미로) 될 것이다. 그 곳들에는 인간이 존재하고, 존경이 스며들어 있다는 걸 꼭 말해 두고 싶다.

미술평론가 성완경은 1991년 손장섭의 작품세계를 논한 방대한 글, ‘삶의 길 회화의 길’에서 “손장섭 개인의 ‘그리기’의 역사, 제작의 역사는 우리의 동시대적인 ‘읽기’의 역사와 어떻게 만나는가” 질문하고 있다. 그 질문은 작품의 매력에 이끌리는 순수한 감상자의 화법으로 시작해, 작가의 작품세계를 “녹여냄과 세워냄”으로 정의하며 큰 구조를 만들어 낸 다음, 숨차게 열정적으로 한 작품씩 시공간의 계기 속에서 벼려내고 대위시킨 후 작가의 품으로 돌려보낸다. 그가 손장섭의 ‘법성포구’나 ‘철책과 굴조개 따는 여인들’을 찬사하듯, 그 글 속에서 작가-작품-역사-세계는 ‘하나의 풍경의 서정 속에 함께 녹아’ 세워진다. 1990년 당시 손장섭의 회화들은 1980년대부터 근 10년간의 격동과 첨예함이 아프게 우리를 “찌르는” 회화들을 포괄하고 넘어서, “다소 관념적이고 종교적인 느낌도 없지 않은” 통일 염원 분단풍경화들로 들어서고 있었다.

어쩌면 그러한 그의 ‘그리기’가 평론가 김광우의 ‘읽기’를 가능케 했을지 모른다. 김광우는 이번 책의 서두 격 글에서 “손장섭을 민중미술가로 규정함으로써 화가로서의 그의 많은 작품이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으며, 그런 유로 자신은 “40여 년의 그의 창작세계를 나름대로 정리하면서 이념을 떠나 순수 회화적 측면에서 작품을 평가”하려 한다고 못박고 있다. 그는 손장섭의 작품에 접근할 키워드로 “추상”과 “흰색”을 설정하고, 손장섭의 1960년대 초기작부터 더듬어 그 논제의 정당성을 확보하려 한다. 예컨대 1960년 작 ‘보금자리’의 흰 빨래는 “회화적 환경을 조성하기” 위한 것이고, 같은 해 ‘가을숲’은 “나무와 줄기의 잎을 회화적으로 추상화”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흰색의 선호와 추상 의지가 작가의 “관심이 정치적이었던” 1980년대 일련의 회화를 제외하고, 1990년대 신목 그림들과 지역생활 풍경화들, 2000년대 신작 풍경화들의 미학을 형성한다고 주장한다. 한 작가의 작품세계에 대해 다각적으로 접근하려는 시도는 높이 살 일이다. 아쉬운 건 그가 손장섭의 작품들을 하나씩 들어 자신의 주장을 펴고 있음에도, 언제나 이미 상정한 키워드로 작가의 작품을 환원시켜 버린다는 것, 손장섭의 인생과 화력에 있어 가장 중요한 학습 요인이었던 사회?역사에 대한 통찰을 작품의 뒷전에 두려 한다는 점에서 작위적 비평이라는 느낌을 지우기 어렵다. 물론 2003년 작들인 이번 전시 일련의 풍경화들이 그런 읽기의 빌미를 제공했다고도 보인다. ‘금강산 만물상’, ‘북한산 오봉’, ‘백령도 해돋이’, ‘구곡계곡’등을 보면 이 작가가 과연 1980년대 ‘조선총독부’, ‘50년 6월’, ‘오월 그 날이 다시 오면’, ‘역사의 창-조국통일 만세’의 그 작가인지 가늠하기 어렵다. 성완경의 표현을 빌자면, “쓰다듬었다고 말하고 싶어질 지경”의 1980년대 상처와 그 비감의 형상화 작품들은 인간과 인간성에 대한 예의와 연민이 차고 넘친다. 그 시기 손장섭의 그림 도처에서 결국 우리 각자인 인간들은 ‘존재’를 ‘선물’(하이데거)로서가 아니라, 순간 속에 끊임없이 자신을 세워야 할 ‘노동’(레비나스)으로서 겪어 내고 있다. 그리고 그 ‘노동’은 작가가 하나의 작품이라는 토대 속에 세워지는 순간에 수행된다. 작가와 작품의 바깥에 서 있는 우리 ‘보는 이’들은 작품에 드러난 존재와 노동을 통해 또 한 번 작품 앞에서 존재를 존경하게 되는 것이다.

그에 비해 손장섭의 근작들은 1990년대 이후 평론가 박용숙, 이구열 등이 그의 풍경화에 대해 중요하게 언급하고 있는 “자연을 탐구의 대상으로”(박용숙) “심의적인 깊이의 화면대상을 선택”(이구열)한 결과다. 박용숙의 말마따나 “인간이 사라진(...)사건”이다. 인간이 부재한 2000년대 손장섭의 풍경화들에는 감히 “쓰다듬었다고” 말하기는 어렵고, 존재의 노동조차 넘어서는 어떤 생경한 관조의 세계가 보인다. 그 세계는 손장섭이 1980년대 학습한 역사인식의 ‘骨氣’를 바탕으로 “명실 공히 풍경을 그릴 수 있는 자격(...)진정한 자유”(최석태)를 획득해 “원초적인 영성의 가치를 추구”(원동석)해 얻은 것일지 모른다.

관조와 관념의 태도로 대치된 인간 부재의 풍경

하지만 나는 이 인용한 말들의 풍경보다는, 앞서 언급한 성완경의 우려가 더 멀리 내다본, 더 넓게 둘러 본 말의 풍경이라는 생각이 든다. 어떤 면에서 인간이 부재한 풍경이라는 건손장섭 자신이 말한 “이야기가 없는 풍경”일지 모른다. 그는 ‘철책과 굴조개 따는 여인들’(1990)을, 얘기가 읽혀지도록 그렸으며, 이야기가 없는 풍경은 이 세상에 없고, 대중은 이야기를 좋아하며, 이야기를 담는 게 훌륭한 예술작품의 당연한 역할이라 했다. 그러나 그가 명쾌한 사고, 단정한 의지로 설파한 ‘이야기 畵論’은 이제 ‘관조와 관념의 태도’로 대치된 듯 보인다. 풍경을 감상하고자 하는 관람자의 눈앞을 불편하게 가로 막아서던 ‘철책-격자’는 이제 감촉하기엔 너무 큰 ‘틀-모판’이 돼버렸는가.

강수미 / 홍익대 미학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