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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비평: 한국사회의 야만
문화비평: 한국사회의 야만
  • 진태원 서울대
  • 승인 2003.11.21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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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있었던 여섯 명 노동자의 죽음, 또는 생활고를 견디다 못해 함께 목숨을 끊은 일가족들, 또 수능성적을 비관해 투신한 학생들, 그리고 이 글을 쓰고 있는 동안 자살한 두 명의 이주노동자.

이 모든 이들의 죽음은 말의 고전적 의미에서 비극적이다. 레비나스는 이를 간결하게 잘 제시해 주고 있다. “자살 가능성을 통해 존재 의미를 찾을 수 있다는 사실이야말로 끊임없이 비극의 자료가 되어 왔다.” ‘로미오와 줄리엣’ 3막에는 이런 대사가 있다. “모든 게 끝장나도 내겐 아직 죽을 힘이 있어!” 

반면 차마 죽을 용기가 없어, 또는 일종의 본능으로 하루하루 목숨의 끈을 붙잡고 있는 사람들은, 다시 레비나스의 표현을 빌리면, 일종의 ‘그저 있음’의 상태에 놓여있는 이들이다. 지하철 구내 바닥에 깔린 몇 장의 신문지에 얹혀서, 또는 손 시린 쪽방의 바닥에서 차가운 사물성의 틈바구니를 비집고 힘겹게 ‘자기’를 유지해가는 이들에게 삶이란, 무의미한 고통의 나날이리라.

비극적으로 죽음을 선택한 이들과, 사물과 ‘자기’의 경계에서 아슬아슬하게 풍경의 상태로 견뎌가고 있는 이들 중 과연 누가 더 딱한가 따지는 건 그야말로 야만적인 발상일 것이다.

하지만 그보다 더 끔찍하고 야만적인 건 “노동자들이 분신을 문제해결의 수단으로 삼는 시대는 지나갔다”는 한국의 현 대통령의 발언이다. 노무현 정권은 거듭 자신들 정권의 기반은 도덕성에 있음을 강조한 바 있다.

그들에게 이 말은 그들의 政敵들에 대한 자부심의 표현이자, 지지자들에게 보내는 신뢰의 호소일 것이다. 그런데 똑같은 입에서 노동자들의 분신, 죽음을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격하시키는 발언이 나온다는 건 자못 충격적이다. 그는 비극에 대한 감식안이 없는 것일까. 아니면 한가하게 비극을 반추하기에는 나라의 사정이 너무 어려운 걸까.  

하지만 어쩌면 그의 두 가지 발언은 사실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일지 모른다. 헤겔이 칸트의 도덕의 추상성을 비판한 이래, 도덕과 윤리는 동의어가 아니라 오히려 동음이의에 가깝다는 걸 우린 알고 있다. 개개인의 도덕적 품성이 아무리 뛰어나고 도덕적 의무를 성실히 수행한다 해도, 그것이 사회적 관계에 대한 고려에서 유리돼 있는 이상, 또는 사회적 관계의 추상을 조건으로 하고 있는 한, 도덕은 순전히 개인적인 차원에 머무르는 것이다.

따라서 노무현 정권이 자신들 개개인의 도덕적 결백성(이것이 사실인지는 의심스럽지만)을 주장하고 또 이를 스스로 확신하는 한, 자신들의 뜻에 거스르는 사람들은 그들에게 그만큼 더 비도덕적이고 사익에 골몰한 사람들로 보이리라는 건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렇다면 노동자들의 자살에서 목적 달성을 위한 고도의 계산된 수단을 보고, 국익을 위해 파병을 결심하고 인간사냥과 다름없는 이주노동자들 추방에 골몰하는 야만적인 모습이 나오는 건 실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닐 것이다. 

우리가 ‘극우 꼴통’이라고 조롱하는 프랑스 국민전선의 당수 장-마리 르펜은 자신의 노선을 아주 놀랄 만큼 간명하게 제시한 바 있다. “나는 내 딸들을 내 조카딸들보다 더 사랑하고, 내 조카딸들은 내 사촌들보다, 내 사촌들은 내 이웃들보다 더 사랑한다. 정치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나는 프랑스인들을 더 사랑하며, 누구도 내가 달리 말하게 하지는 못할 것이다.” 어찌 보면 지극히 ‘도덕적’이고 ‘인륜적’인 르펜의 이 명제에서 한국의 현대통령의 발언을 떠올리게 되는 건 나만의 착각인가.

한국 사회는 야만사회인가. 이 질문은 뜬금없는 것도, 과장된 수사도 아니다. 인간의 존엄성을 한낱 수단으로 격하시키고, 자신의 이익을 타인의 생명 및 안전과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는 대통령을 가진 나라에서 이는 매우 절박한 정치적?윤리적 질문이다.

시민들의 능동적 참여 없이 민주주의는 존재할 수 없고, 민주주의는 지속적인 야만의 퇴치 없이 가능할 수 없다는 건 근대 정치의 핵심 원리다. 따라서 한국사회가 민주주의 사회임을 자부할 수 있으려면 도덕과 국익으로 포장된 야만에 맞선 시민들의 저항과 연대를 보여줘야 할 것이다. 야만이냐 시민문명이냐, 이것이 문제다.   

진태원 / 서울대 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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