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25 21:25 (목)
[독자기고]세월호, 코로나19, 대한민국
[독자기고]세월호, 코로나19, 대한민국
  • 교수신문
  • 승인 2020.04.16 11:0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사회적 비극에 대처하는 한국의 방식…'제2의 세월호는 없다'

지난 16일로 세월호 참사 6주기를 맞았다. 그 날의 비극은 상처가 되어 지울 수 없는 흉터를 남겼다. 이 땅에 사는 누구에게나 그렇다. 6년 전 304개의 목숨과 함께 푸른 바다 속으로 가라앉은 배, 그 앞에서 우리는 물었다: 국가는 어디에 있었는가? 나에게 대한민국이란 무엇인가? 대답을 찾기 위해 그 동안 많은 노력이 있었다.

근대 국가에 대한 이해를 대표하는 것은 계약론이다. 이에 따르면 국가는 국민의 생명과 재산과 존엄성을 보호해야 하며 국민은 그에 대한 대가로 국가의 명령에 복종해야 한다. 그런 것이 국가와 국민 사이의 관계였으며 그런 것이 국가의 존재 이유였다. 그런데 1980년대 등장한 신자유주의는 전혀 달랐다. 신자유주의 국가에게 중요한 것은 효율성이었다. 국가는 국민에게 공적 서비스를 제공하되 반드시 효율적으로 제공해야 했다. 모든 국민에게 균등한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보다 일부에게 집중적으로 제공하는 것이 전체 효율을 증가시킨다면 국가는 그러한 배제의 정책을 시행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지난 3개월 코로나19에 대처하는 방식을 보면 미국은 전형적인 신자유주의 국가였다. 대부분의 의료 서비스를 민간에 위임함으로써 국가는 국민을 전염병의 위험 앞에 방치했으며 국민은 자신의 생명을 자신의 힘으로 보호할 수밖에 없었다. 반면에 유럽 특히 독일은 국민 생명의 보호를 국가 의무의 목록에서 제거하지 않았다. 국가는 대부분의 의료 자원을 공적 자원으로 확보하고 있었으며 의료비용 역시 공적인 방식(의료보험)으로 조달했다. 그러니 사망자 수의 차이가 큰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코로나19를 대응하는 한국의 방식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일관적이었다. 대대적 검사, 철저한 역학조사, 무제한의 치료, 예외 없는 격리 조치 등 다른 어느 국가에서도 보기 힘든 신속하고 강력한 정책이 시행되었다. 이러한 대응은 근대 계약론 국가에 친숙한 사람에겐 “히스테릭한 파시스트 보건 국가의 등장”으로 보일 정도였다. 신자유주의 국가에 익숙한 사람에게도 한국의 대응이 이해하기 힘든 것은 마찬가지였는데, 가능한 많은 사람을 검진한다는 것도, 그토록 많은 확진자의 동선(動線)을 모두 확인한다는 것도 제한된 자원을 생각하면 분명 불합리했기 때문이었다.

코로나19를 계기로 드러난 한국의 모습은 계약론의 근대국가나 신자유주의 현대 국가와는 너무도 달랐다. 무엇보다도 국가와 국민의 관계가 그랬다. 권리-의무 관계라기에는 너무도 내밀했고 효율성의 관계라기에는 너무도 뜨거웠다. 국민을 향한 국가의 행위는 계약과 효율의 저편에 존재하는, 마치 물에 빠진 자식을 대하는 부모에게서나 볼 수 있는 그런 것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세계 최고의 의료기술과 체계적 행정능력을 보유하고 있는 한국을 전근대적 국가라고 부를 수도 없었다. 한국은 어디쯤 있는가? 한국은 어떤 국가인가? 이 오래된 물음이 코로나19로 인해서 또다시 우리 눈앞에 떠올랐지만 아직 우리는 아무런 대답도 가지고 있지 못한다.

그런데 며칠 전 인터넷을 보다가 생각이 바뀌었다. 어쩌면 젊은이들은 이미 알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젊은이들이 쓴 것이 분명한 댓글 때문이었다. 유럽과 미국에서 코로나19의 희생자가 속출하고 있다는 신문기사에 아래와 같은 댓글이 달려 있었다:

“수십 수백의 국민이 매일 죽어 나가는 걸 어떻게 그냥 보고 있냐? 국가가”
“그러게. 그러니까 차원이 다른 거지. 나라의 차원이”

이충진(한성대 교수, 철학)
이충진(한성대 교수, 철학)

 

그러고 보니 일본의 느닷없는 수출규제로 온 사회가 시끌시끌했던 지난여름에 보았던 댓글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일본의 조치를 자세히 소개한 글에 달려 있던 댓글이었다:

“그래서 뭐? 어쩌라고??”
“헐~ 한번 해보자 이거지”
“ㅋㅋㅋ 아베, 넌 이제 죽었다ㅋ”

산업화 시대의 대한민국이나 민주화 시대의 대한민국과는 다른 ‘지금 여기’의 대한민국, 젊은이들이 살고 있고 살아가게 될 대한민국, 그곳에 ‘헬조선’을 위한 자리는 ‘1도’ 없었다. 제2의 세월호도 없을 것이 분명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