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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비평: '사랑의 이빨로 버텨주기'
문화비평: '사랑의 이빨로 버텨주기'
  • 이창재 광운대
  • 승인 2003.11.13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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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주변에는 죄의식과 책임감이 곤혹스러울 정도로 결여된 인간이 있는가 하면, 과도한 죄책감에 시달리는 인간도 있다. 정치가나 고위공직자들의 부정부패 스캔들, 재벌총수와 노동자의 자살, 대통령의 재신임 투표제의, 세계 상위의 이혼율 등의 보도에서 한결같이 들려오는 단어는 ‘책임’이다.

“누군가가 책임을 져야 한다” “모든 책임을 내가 지겠다” “책임 있는 정치를 해보겠다” 등의 말이 언론매체를 장식한다. 인상적인 건 이 말들이 정말로 책임감을 지닌 성숙한 인격자의 발언이라고 믿는 대중이 별로 없다는 점이다.

자신의 이미지를 미화하는 ‘거짓된 윤리적 언어’들의 남발로 인해, 어느덧 ‘윤리, 도덕’마저 혐오와 불신의 기호로 변질돼 간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위기상황에서 매번 도덕적 언어를 남발하는 걸까. ‘책임감’이란 대체 어떤 과정을 통해 개인의 정신에 형성되는 걸까. 왜 어떤 이들은 책임감이 넘치는 반면, 어떤 이들은 책임감이 없는 걸까. 

정신분석의 창시자인 프로이트는 아동기의 아버지 역할이 책임감 형성에 매우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엄마의 품에서 제멋대로 살고 싶어 하는 아동이 엄마로부터 벗어나 ‘아버지의 요구’를 내면화해야 비로소 양심과 책임을 느끼는 사회적 인격을 형성하게 된다.

그러나 아이에게 아버지의 요구는 너무도 버겁게 느껴지므로, 아이는 아버지에 대해 강력한 공격충동을 지니게 된다. 이 공격성은 거대한 힘을 지닌 듯이 느껴지는 아버지에 대한 거세불안 때문에 억압돼, 훗날 반사회적 행동들과 신경증의 원인이 되는 동시에 도덕의식을 지니는 원천이 된다. 

이에 비해 영국의 정신분석가 위니컷은 유아에 대한 ‘엄마역할’을 책임감 형성의 근본조건으로 본다. 특히 유아의 공격성이 엄마에 의해 자연스런 몸짓으로 충분히 수용?충족되면 자존감을 지닌 ‘참 자기’가 형성돼, 비로소 타인에 대한 진정한 관심과 책임감을 지닐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만약 엄마가 울거나 버둥대는 아이를 귀찮게 여기거나 외면할 경우, 불안해진 아이는 ‘살기 위해’ 자신의 공격성을 억압하고, ‘힘있는’ 존재의 눈치를 살피는 ‘거짓 자기’를 형성하게 된다. 거짓 자기 인격자는 옳고 그름이나 참과 거짓의 구별에는 별 관심이 없다.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안전을 제 1가치로 간주해, 자신에게 이익이 되거나 필요한 사람에게 최상의 서비스를 제공한다. 반면 자신의 안전과 생존에 불필요한 존재에겐 무관심 해, 약자에겐 그동안 힘있는 존재에게 풀지 못했던 공격성을 직간접적으로 분출해낸다. 그리고 그 결과에 대해 죄책감이나 책임감을 전혀 느끼지 못한다.

이처럼 어린 시절에 공격성의 온전한 충족경험이 결여될 경우, 타인을 배려하는 책임 있는 도덕적 인격은 결코 형성될 수 없다. 공격성은 자아에 통합될 경우 창조적 에너지와 인격발달을 도모하는 추동력이 되지만, 무의식에 억압될 경우엔 파괴욕동으로 변질된다.

소위 고위공직자나 범죄자들이 저지르는 반사회적 행동들은, 유년기에 부모가 억압한 공격성이 변형된 형태로 대리분출 되는 기호다. 따라서 범사회적 차원에서 부정부패를 청산하려면, 가족 내에서 아이의 공격성을 버텨주는 엄마역할과 아빠역할이 온전히 이뤄지게 도와주는 사회제도의 보완이 요구된다.  

한국의 엄마 아빠는 아이에겐 절대적 강자지만, 사회의 냉혹한 현실 앞에선 평범하고 약한 존재다. 이들은 한국의 경쟁적인 사회에서 상처받은 감정을 분출할 외부대상을 찾지 못할 경우, 주로 가족 내 약자인 아이나 배우자, 또는 자기자신에게 그 화를 돌린다.

약자는 어른의 힘이 무서워 자신의 공격성을 억압하고 있다가, 자신이 어느 정도 힘이 생겼다고 느끼는 순간 이를 과거대상이 아닌 엉뚱한 대상에게 무제한적으로 분출한다. 이것이 바로 자기도 모르게 저지르는 무책임한 반사회적 행동들이다. 어찌 보면 그들은 자기 자신을 파괴시키지 않으려는 생존욕구로 공격성을 분출하는 것이다.

현재 한국 사회에 만연된 무질서와 무책임성은 소수의 권력자만이 공격성을 온전히 분출하던 과거 식민지나 독재, 권위주의적 문화의 부작용이 뒤늦게 분출된 일종의 과도기적 현상이다.

이런 상황에 대해 위니컷은 성급한 보복도 무제한적 허용도 아닌 ‘사랑의 이빨’로 ‘버텨주기’가 필요함을 역설한다. ‘버텨주기’란 상대방의 인격발달을 위해 애정 어린 마음으로 그(녀)의 문제원인을 공감하는 동시에 힘차게 지적하고 자각시켜 스스로 책임지게 하는 강곤한 울타리를 지칭한다. 버텨줄 수 있는 대상을 만날 수 있는 개인이나 사회에는 희망이 있다.

이창재 / 광운대 심리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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