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3-28 18:35 (목)
[박찬희의 박물관 여행] 브랜드실의 탄생
[박찬희의 박물관 여행] 브랜드실의 탄생
  • 교수신문
  • 승인 2020.04.14 10:1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국립춘천박물관
창령사 터 오백나한 특별전, 일반적인 전시 문법 깨고
관람객들이 가까이에서 가벼운 마음으로 감상
정해진 길·감상법 없이 눈길 끌리는 대로 산책
전시 이런 순서로 보라는 화살표·공간 구분도 없어
국립춘천박물관에서 열린 ‘창령사 터 오백나한’ 특별전. ⓒ박찬희

2019년 말 브랜드실이 생겼다. 기업체나 지역이 아니라 국립춘천박물관이다. 박물관과 브랜드만으로 낯선 조합인데 브랜드실은 더 그렇다. 현재 한국의 박물관 전시실 가운데 브랜드실은 이곳이 유일하다. 박물관에서 브랜드실을 따로 만들어 전시할 만큼 중요한 유물은 무엇이고 이 유물은 어떻게 박물관을 대표하는 브랜드가 되었을까? 

처음부터 널리 알려진 유물이 아니었다. 게다가 20년 전에 처음으로 세상에 존재를 드러냈다. 2001년 강원도 영월에서 마을 주민이 땅 속에서 불상을 발견하였다. 돌로 만든 불상은 한 두 점이 아니었다. 화수분처럼 파고 파도 끝이 없었다. 온전한 불상보다 깨진 불상이 많았다. 불상을 만든 돌은 거칠거칠했다. 정식 발굴 조사 결과 불상 300여 점이 수습되었다. 절의 이름은 창령사였으며 고려 말 조선 초에 불상이 만들어졌고 조선 중기에 의도적으로 훼손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불상은 대부분 웃고 미소 짓고 생각하고 화내는 인간의 얼굴이었다. 이들 대다수가 석가모니의 제자인 오백나한이었다. 오랫동안 땅속에 묻혔던 나한들은 절터를 떠나 박물관으로 자리를 옮겼다.

박물관으로 들어온 유물은 새롭게 태어난다. 사찰의 나한전에 봉안된 나한과 박물관에 전시된 나한은 다르다. 다행히 얼굴까지 남아있는 나한이 전시하기에는 적지 않았고 얼굴 표정이 다양했으며 높이가 40㎝ 이내였다. 거칠거칠한 돌은 생생한 질감을 만들어냈다. 전시실 속 창령사 터 오백나한은 매력적이었다. 비록 국보나 보물은 아니었지만 점차 박물관의 대표적인 유물로 자리 잡아갔다.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린 ‘창령사 터 오백나한’ 특별전. ⓒ박찬희

2018년, 창령사 터 오백나한은 새로운 역사를 맞이하였다. 국립춘천박물관에서 ‘창령사 터 오백나한, 당신의 마음을 닮은 얼굴’ 특별전이 열렸다. 특히 1부 전시는 박물관의 일반적인 전시 문법을 깼다. 관람객에게 해석과 정보를 주는 대신 관람객이 가까이에서 가벼운 마음으로 감상하도록 만드는 것이었다. 창령사 터 오백나한의 다양한 얼굴 표정, 적당한 크기, 거친 질감은 이 점을 구현하기에 알맞았다.

관람객 곁으로 가려면 안전한 진열장을 나와 전시실 복판으로 나가야 했다. 나한상은 위험에 처할 가능성이 극히 적었지만 유물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고려해야 하는 박물관으로서는 어려운 결정이었다. 고민 끝에 다양한 안전장치와 관람객의 수준을 믿고 관람객 속으로 들어가기로 했다. 나한들은 두꺼운 유리장에서 나와 그 얼굴, 그 표정으로 관람객 눈앞까지 다가갔다. 깨달음을 전하러 사찰을 떠나 사람들 속으로 성큼성큼 들어간 고승들 같았다. 

또 하나의 결정적 카드는 현대미술 작가와 협업이었다. 진열장을 나온 옛 나한과 21세기를 살아가는 관람객이 만나는 최전선을 생생한 공간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나한과 공간을 낯설게 보는 외부의 시선이 필요했다. 작가는 관람객들이 고요한 분위기 속에서 천천히 산책을 하다 나한을 만나고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도록 전시실을 꾸몄다. 특히 붉은 벽돌과 이끼로 전시실 바닥을 구성한 작품 ‘당신은 당신으로부터 자유롭습니까?’는 신의 한수였다. 실내이지만 야외인 듯한 분위기를 만들고 마음의 안정감을 주며 바쁜 발걸음을 여유로운 걸음으로 바꾸어 관람객이 나한을 만나기에 알맞은 조건을 만들었다. 

국립춘천박물관 브랜드실. ⓒ박찬희

정해진 길이 없다. 정해진 감상법도 없다. 전시실에 들어선 관람객은 발걸음 닫는 대로, 눈길 끌리는 대로 전시실을 산책한다. 전시를 이런 순서로 보라는 화살표나 공간 구분이 없다. 넓은 전시실 이곳저곳에서 나한들이 관람객들을 기다린다. 나한 아래에는 단지 이름만 있을 뿐 별다른 설명이 없다. 관람객의 감상이나 생각을 가두는 글을 찾아보기 어렵다. 오롯이 관람객 자신의 눈과 마음만으로 작품을 만난다. 이곳에서는 관람객이 전시를 보는 길을 만든다. 만약 100명이 온다면 전시실을 걷는 100개의 길과 나한을 만나는 100가지 방법이 생기는 셈이다. 

나한과 관람객 사이에 놓인 벽이 사라지자 놀라운 일이 생겼다. 나한들은 사각 받침대 위에 유리장의 보호 없이 그대로 얼굴을 드러냈다. 관람객들은 좀 떨어져서, 또 코앞에서 나한을 만났다. 옆모습과 뒷모습이 궁금하면 옆으로, 뒤로 돌았다. 일반적인 박물관 전시에서는 경험하기 힘든, 가까워진 공간적 거리로 나한과의 심리적 거리까지 줄어들었다. 더 이상 고고해 보여 범접하기 힘들거나 함부로 말을 꺼내기 어려운 유물이 아니었다. 게다가 나한의 얼굴은 사람의 얼굴을 닮았다. 웃고 미소 짓고 화내고 생각하는 관람객 자신의 얼굴이었다. 또 그 얼굴은 인생길에서 만난 누군가의 얼굴이었다. 나한을 닮은 얼굴들이 오랜 기억 속에서 추억과 함께 툭툭 튀어나왔다. 혼자 온 관람객은 나한 앞에 고요히 머물고 여럿이 온 관람객은 말문이 터졌다.  

국립춘천박물관 브랜드실. ⓒ박찬희

관람객이 전시실에서 찾은 마지막 얼굴은, 마지막으로 조우하는 얼굴은 관람객 자신이었다.

이 특별전은 그해 국립박물관에서 열린 전시 가운데 가장 뛰어난 전시로 꼽혔다. 덕분에 국립춘천박물관 나한들은 서울로 나들이를 갔다. 2019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같은 제목으로 특별전이 열렸다. 전시 공간이 달라지고 전시 아이디어가 늘어나면서 전시 기법도 조금 바뀌었다. 전시실 일부 나한 앞에 의자를 놓아 오래도록 바라볼 수 있도록 했다. 전시실 한 공간에는 스피커를 탑처럼 쌓고 그 사이사이에 나한을 넣어 도시 속의 개인과 나한의 만남을 상징하였다. 대도시로 나온 옛 나한들은 날마다 무수한 사람들을 만나 위로와 위안을 건넸고 사람들은 거대한 물결이 되어 나한의 바다를 유영하였다. 창령사 터 오백나한 특별전은 수도 서울을 떠나 제2의 도시 부산에서 다시 개최되었다.

창령사 터 오백나한은 몇 차례 특별전을 거치면서 재평가되었다. 국립춘천박물관의 대표적인 유물에서 대표 브랜드로 확고하게 자리 잡았다. 2019년 말 국립춘천박물관 브랜드실이 문을 열었다. 이름은 ‘창령사 터 오백나한, 나에게로 가는 길’이었다. 특별전이 상설전이 된 보기 드문 사례였다. 브랜드실은 기존 특별전에서 다시 변화했다. 오랫동안 계속되는 상설전이라는 점을 고려해 붉은 벽돌 대신 카펫이 깔리고 일정한 산책길도 생겼다. 시간이 머문 듯한 전시실에 계절이 들어왔다. 넓은 벽면에 비가 내리고 연꽃이 피고 눈이 날렸다. 관람객은 계절에 따라 달라지는 전시실을 만난다. 나한 아래로 돌이 늘어섰다. 전시를 보던 관람객은 정성스럽게 돌탑을 쌓는다. 그 순간 새로운 전시가 탄생한다.

국립춘천박물관 브랜드실. ⓒ박찬희

‘나에게로 가기’ 위한 중요한 변화는 방과 의자였다. 전시실 곳곳에 보일 듯 말 듯한 천으로 나한을 둘러싼 방을 만들고 그 앞에 의자를 놓아 주위의 방해 없이 편안하게 나한과 교감하도록 도왔다. 세상에서 가장 작은 절 같기도 하고 성당의 고해성사를 하는 곳 같기도 하며 도시의 마음 상담소 같기도 하다. 이때 나한은 유물에서 마음을 어루만지는 존재로 바뀐다. 

브랜드실의 주인공은 창령사 터 오백나한이다. 그러나 주인공은 이들뿐만이 아니다. 이들과 이들을 담은 전시실 자체가 진짜 주인공이다. 그리고 이곳에 들어오는 관람객이다. 오늘도 브랜드실의 나한은 관람객을 기다린다.

박찬희 박물관 칼럼니스트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