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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근 교수의 ‘철학자의 가벼움’(51)] 바이러스와 사람이 공존하는 세상
[정세근 교수의 ‘철학자의 가벼움’(51)] 바이러스와 사람이 공존하는 세상
  • 교수신문
  • 승인 2020.03.27 1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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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 숙주
생물이란 산다는 것.
사는 것은 삶을 유지하는 것.
따라서 살아있는 것은
남을 살려 자기도 살고자 한다

코로나19 상황에 산촌에서 나오면서 가장 이상한 것이 바로 마스크다. 시골에는 마스크 쓴 사람이 없다. 그런 데에 눈이 익숙하다가 도회지에 나오면 깜짝 놀랄 정도로 마스크 쓴 사람이 많다는 것을 느낀다. 

거짓말이 아니다. 무슨 일인가 싶을 정도로 놀란다. 해보면 안다. 대신 조건은 뉴스도 신문도 보면 안 된다. 운전자들이 마스크를 쓴 것도 생소하고, 길거리 사람들이 거의 모두 마스크를 쓰고 다니는 것이 이상하게 느껴진다.  

위생관념이 빵점인 나도 눈치가 보여서 도시에서는 마스크를 쓴다. 자꾸 잊어버려 옷마다 마스크를 꼽아놓았다. 웃옷에 하나, 바지 하나, 가방 하나. 예의라니 어쩔 수 없다. 평소 안 쓰니 매점할 일도 없다. 배분되는 내 마스크를 남들이 잘 쓰길 바랄 뿐이다. 

일상이 빼앗겨 웃을 일도 없으니 나래도 웃겨야겠다. 근처 대학교수가 딸이 교사가 됐다면서 밥을 산다고 해서 나갔다. 유명한 가게인데도 손님이 없었다. 우리라도 팔아주니 다행이었다.  

좋은 자리에서 초대한 사람에게 한 마디를 하게 하고 싶었다. 초대한 사람, 돈 내는 사람이 누구인가? 호스트(host) 아닌가. 그런데 이런 바이러스 상황에서 호스트는 또한 숙주(宿主)였다. 그래서 성이 홍 씨인 그에게 ‘오늘 돈 내는 홍 숙주’라고 불렀더니 웃음이 빵 터졌다. 바이러스 상황에 크게 웃어도 되는지 눈치는 보였지만 그래도 웃었다. 

호스트는 요즘 ‘쇼 호스트’로 일반인에게 많이 알려졌다. 사회자, 진행자의 뜻이다. 그런데 요즘 바이러스 상황에서 우리 인간 숙주가 아무런 사회도 못 보고 진행도 못하는 것 같아 마음이 아프다. 컴퓨터에도 왕초 컴퓨터를 ‘호스트 컴퓨터’라고 부르는데, 우리 인간 숙주는 영 왕초 노릇을 못하고 있어 씁쓸하다. 

영국에서 나온 생물학 교과서에서 바이러스는 사람과 공존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자기가 살기 위해서라도 인간을 죽이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들이 그렇게 의지가 있는지는 모르겠다. 생명과 생존은 거의 동가적인 의미를 지니지만, 바이러스님께서 그런 것까지 ‘생각하(시)면서’ 퍼지는지는 잘 모르겠다. 생물이란 산다는 것이고, 사는 것은 삶을 유지하는 것이고, 따라서 살아있는 것은 남을 죽여 자기를 죽이기보다는 남을 살려 자기도 살고자 한다는 명제인데, 옳은 것일까를 궁금하다. 그들이 생각하지 않더라도 삶의 기제가 워낙 그러하니 그렇게 갈 것이라면 철학적으로는 순환논증에 가깝다. 이 말을 할 때는 사람들이 안 믿을까봐 옥스퍼스 책이라고 우상을 덧붙인다. 

거기에 나오는 말 가운데 가장 재밌는 것은, 감기가 걸렸을 때 왜 재채기를 하느냐에 대한 설명이었는데, 흔히 사람들은 자기 입장에서 ‘그놈들 쫓아내려고’라고 대답하지만, 그 책의 설명은 달랐다. 말해보자면, 그런 것이 아니라 ‘그분들이 우리를 이용해서 멀리 퍼지려고 숙주에게 재채기를 일으킨다’는 것이었다. 역지사지(易地思之), 입장만 바꿔봐도 세상이 참으로 달라 보인다. ‘그분들이 그렇게까지 생각하시는지’는 여전히 모르겠지만. 

우리말에서 호스티스는 술집 여자다. 영어에서도 숙주만큼은 남성과 여성을 나누는 것 같지 않다. 숙주만큼은 남녀를 차별하지 않아 다행이다. 

호스트에 천주교 미사 때 먹는 밀떡의 뜻이 있는 줄 아는지? 대문자로 쓰면 성체(聖體), 성병(聖餠)의 뜻을 담는다. 어서 치료제가 나와, 오병이어(五甁二魚)의 기적처럼 물러가길 기도한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이것밖에 없다. 

정세근 충북대 철학과 교수
정세근 충북대 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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