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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홍규의 아나키스트 열전 23] 사회는 본능과 열정, 지성과 이성을 갖춘 살아있는 구조
[박홍규의 아나키스트 열전 23] 사회는 본능과 열정, 지성과 이성을 갖춘 살아있는 구조
  • 교수신문
  • 승인 2020.03.23 1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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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버트 리드
중앙 정부나 국가 기관이 없는 직접 민주적인 정치 형태
모든 시민이 자유롭게 참여할 수 있는 아나르코-생디칼리즘에 영감 줘
허버트 리드(1966) ⓒJac. de Nijs/Anefo/wikipedia│CC BY-SA 3.0

한국의 리드 

미술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허버트 리드를 알 것이다. 해방 이후 지금까지 75년 동안 미술 이론이나 미술사에 관한 한 리드만큼 많이 소개된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하우저나 곰브리치 정도가 있지만 리드에 비할 바 못 된다. 아주 단순하게 말하자면 하우저는 사회주의, 곰브리치는 자본주의라고 할 수 있는 반면, 리드는 아나키즘이라고 할 수 있다. 무명이었던 하우저의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가 출판되도록 도와준 사람이 리드였을 만큼 두 사람은 가까웠다. 그러나 존 러스킨과 윌리엄 모리스를 이은 그가 아나키스트라는 점은 우리에게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내가 리드를 처음 안 것은 막 중학교에 들어간 1964년부터 매일처럼 헌책방에서 헌책을 뒤지는 취미를 가지면서 샀던 《평화를 위한 교육》을 읽고서였다. 당시 ‘반공도덕’이라는 수업이 있었는데 주로 ‘무찌르자 빨갱이’ 같은 내용의 교육을 받았다. 어느 날, 북한 공산주의를 비판하라는 글을 숙제로 받고서, 빈부 차이 없이 누구나 평등하게 살고 민족문화를 잘 보존하고 있는 북한 공산주의를 무조건 나쁘게 보아서는 안 된다는 글을 학교에 냈다가 정학을 맞고 정신병원에 끌려간 적이 있다. 대학생이었다면 감옥에 갔고 퇴학을 당했을지 모르지만, 중학생이어서 다행히도 정신병원 방문을 이유로 다시 학교를 다닐 수 있었다. 반세기도 더 지난 어린 시절 일을 상세히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최하의 빈민굴에서 살면서 은밀하게 북한 방송을 즐겨 듣던 12-3세의 소년이 그런 글을 충분히 쓸 수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당시 리드의 책을 얼마나 읽었는지, 그 책이 그런 글을 쓰는데 얼마나 영향을 주었는지에 대해서는 기억이 없지만(예술이 평화의 수단이고, 예술적 능력은 누구나 갖기 때문에 그것을 펼치면 평화가 가능하다고 하는 그의 주장이 나를 미술실에 처박히게 했는지도 모르지만) 1959년에 나온 그 책은 ‘전쟁을 위한 교육’이 극성을 떨었던 당대에 저항한 유일한 ‘평화를 위한 교육’의 책으로 중대한 의의를 가졌다고 생각된다. 

이 글을 쓰기 위해 도서관에서 그 책을 다시 찾아보니(56년 전에 산 내 책은 분실했다) 누구도 읽은 적이 없는 새 책이었다. 61년 동안 아무도 읽지 않은 것이었다. 책이 나오고 61년 만에 내가 처음 찾은 것이었다. 이 책을 다시 보니 명실 공히 아나키즘 책이라는 것을 새삼 깨달았지만, 그 책의 역자 후기에서는 그 점에 대해 일언반구도 없고, 도리어 리드가 양심적 병역거부를 주장한 부분이 부당하다고 생각해 삭제한 점을 당당하게 말한다. 그 부분이 그대로 번역되었더라면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양심적 병역거부를 주장한 책이 아니었을까? 

내가 읽은 두 번째의 리드 책은 1969년부터 을유문화사에서 낸 을유문고의 2번이었던 《예술이란 무엇인가》였다. 당시 고등학교 3학년이었던 내가 그 책을 집에서는 물론 학교에서도 참고서 안에 숨겨서 읽다가 아버지나 선생님들에게 들켜 혼이 났던 추억이 있다. 그 책은 1974년까지 5년 사이에 10판을 찍었으니 당시로서는 대단한 베스트셀러였다고 짐작되고, 그 뒤로도 다른 번역판들이 최근까지 나온 것을 보면 리드 책으로서는 가장 많이 팔린 스테디셀러인 듯하다. 게다가 그 뒤로 리드의 미술 관련 책이 계속 번역된 것을 보면 그 책을 계기로 리드는 한국에서 미술사가 내지 미술이론가로서의 명성을 굳힌 듯하다. 

그러나 리드의 미술책으로 한국에 처음 소개된 것은 《예술과 사회》로 1949년에 한상진이 번역한 책이었다. 이 책도 그 뒤 지금까지 여러 역자에 의해 몇 번이나 번역되었고, 예술사회학에 관한 한 가장 선구적으로 소개된 책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책의 가장 두드러진 주제는 과거의 가장 위대한 예술은 모두 공동체에 속했고, 현대 예술가는 새로운 현실에 대한 비전으로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능력을 의식하여 자본주의의 마지막 단계의 미적 관습과 타협하기보다 더욱 일관된 사회주의자가 되어야만 한다는 것이었다. 이런 내용의 책이 1949년의 해방공간에서 나올 수 있었던 것은 그 시대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한다. 1936년에 나온 그 책의 원저를, 어지러웠던 해방 공간에서 읽고 번역했다는 것이 놀라웠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태도를 잇지 못했다. 

리드의 삶

리드는 영국 중부의 요크셔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그 주변에서는 가장 큰 도시인 리드에서 점원 등으로 일하며 독학을 하다가 리드대학교에 들어갔으나 1차 대전이 터져 학업을 중단하고 장교로 참전했다. 하워드 진은 리드가 그 뒤 볼셰비키혁명에 기울었다가 러시아의 일당독재에 환멸하여 아나키즘으로 나아갔다고 하지만 리드가 1차 대전 중인 1917년에 군대에서 쓴 일기를 보면 이미 러스킨이나 모리스나 소로에 공감하는 표현이 나온다. 특히 1918년 4월 1일 일기에는 소로의 《월든》을 읽고 “모든 것은 나를 개인주의로, 우리를 각자가 깨달아야 할 아나키즘에로 몰고 간다”(121쪽)고 썼다. 이 일기는 리드의 《자전》에 수록되었는데 그 책도 1987년에 장경룡에 의해 소개되었다. 그 때쯤이면 리드의 책 중에 중요한 책들은 거의 다 번역되었다고 볼 수 있다. 

리드의 정치에 관한 글을 예술과 문화에 관한 글로 나누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그는 예술, 문화, 정치를 인간의 의식에 대한 하나의 일치된 표현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그의 총 저작은 1,000여 권의 출판물에 이른다. 그의 아나키즘은 고드윈, 크로포트킨, 슈티르너의 영향을 받았다. 아나키스트임을 자처하지 않은 모리스나 카펜터와 달리 리드는 스스로 아나키스트라고 말했다. 그는 스페인의 프랑코 정권에 적극적으로 반대했고, 스페인의 정치범을 위해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53년에 그는 ‘문학에 대한 봉사’로 기사 작위를 수락하여 대부분의 아나키스트들에 의해 배척당했다. 

프리드리히 셸링, 요한 고틀리프 피히테, 사무엘 테일러 콜리지로 대표되는 유럽의 관념론 전통에 가까운 그의 철학적 관점은, 인간의 정신에 의해 경험되는 현실은 어떤 외적 또는 객관적 실재만큼이나 인간의 마음의 산물이라고 믿는 것이었다. 이는 많은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예술을 단순히 부르주아 사회의 산물이라고 믿었던 것과 달리, 예술을 의식의 진화와 동시에 진화해 온 심리적 과정이라고 보는 것을 의미했다. 따라서 리드는 1930년대의 앤서니 블런트 같은 마르크스주의 비평가들과 자주 대립했다. 정신분석을 예술과 문학비평을 위한 도구로 사용하는 영어권 세계의 선구자가 된 리드는 원래 프로이드주의자였으나 칼 융의 분석심리학으로 옮겨갔고, 융의 영어판 전집의 출판인이자 편집장으로 일했을 만큼 그의 영향을 받았다. 

1949년 초에, 리드는 프랑스 실존주의자들, 특히 장 폴 사르트르의 작품에 관심을 가졌다. 자신을 실존주의자로 묘사하지는 않았지만, 그는 그의 이론이 종종 실존주의자들 사이에서 지지되었음을 인정했다. 유럽 전통의 실존주의 이론가들과 가장 가까운 영국인이었던 그는 1963년에 쓴 《문화를 타도하라》에서 문화라는 것에 대한 경멸을 구체적으로 다루었고, 예술가를 장인으로 보는 아나키즘적인 시각을 확대했다. 그 책은 2002년에 다시 출판되었을 정도로 여전히 중요한 관점을 갖는다. 

리드는 교육, 특히 예술 교육에 대해 주목했다. 그는 2차 세계대전 중 연합국과 중립국을 순회하는 영국 미술 전시회를 위한 작품들을 수집하도록 요청받은 후, 아이들의 그림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중요한 국가유산인 작품들을 대서양 건너 운반하는 것은 너무 위험하다고 여겨졌기 때문에, 대신 어린이들의 그림을 보내야 한다는 제안이 있었고, 이에 따라 아이들의 작품을 수집하면서 그들의 표현력과 감정적 내용에 뜻밖에 감동을 받았다. 

그 경험은 아이들 예술의 문화적 가치에 대한 특별한 관심을 불러일으켰고, 전위예술에 대한 그의 헌신과 일치하는 진지함으로 어린이들의 창의성 이론을 추구하게 했다. 이는 그의 후반생 25년 동안 그의 작업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켰고, 미술 교육에 헌신하게 했다. 앞에서 언급한 《평화를 위한 교육》과 함께 《예술을 통한 교육》(1943), 《자유인의 교육》(1944), 《세계 질서에서의 문화와 교육》(1948) 등이 그의 교육관을 보여준다. 

리드의 예술론이나 예술사론도 아나키즘에 입각하는데 우리에게는 그 점이 전혀 소개되어 있지 않다. 리드의 예술론이 아나키즘 예술론을 대표한다고는 할 수 없지만, 하나의 관점을 보여주는 것은 사실이다. 이는 반공주의적이라고 할 수 있는 곰브리치의 미술론이나 사회주의적이라고 할 수 있는 하우저의 미술론과는 대조적이라는 점에서도 주목할 필요가 있는데, 이러한 점은 한국에서 무시되어 왔다. 가령 ‘아는 만큼 보인다’는 식의 지식주의적 미술론은 곰브리치의 반공주의적 미술론에서 나오는데 그것이 한국에서는 좌파의 진보적 주장으로 오전되어 왔다. 반면 인간은 누구나 예술적 능력을 갖는다고 보고 그 능력을 개발하는 교육이 중요하다고 주장한 아나키즘 예술론이야말로 민주주의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하워드 진 ⓒJared and Corin/wikipedia│CC BY-SA 2.0

리드의 아나키즘

리드는 미술 이론이나 미술사에 대한 책 외에도 시인으로서 시집을 냈고 문학비평집도 썼으며 정치에 관련된 책도 다수 집필했으나, 아나키즘과 관련된 것은 단 한 권, 1983년에 나온 《시와 아나키즘》뿐이다. 이 책 원저의 제목은 《아나키와 질서》였는데 그 내용 중에 1938년에 쓴 ‘시와 아나키즘’이라는 글이 처음에 나오고 가장 긴 글이며 제목으로서도 그럴듯해서 책 이름을 바꾼 듯하다. 또는 리드의 책이 일본어 번역본으로 처음 나온 것이 ‘시와 아나키즘’이어서 그것을 기억하는 사람들을 독자로 생각해 그렇게 책 이름을 붙였는지도 모른다. 일본어 번역본은 1952년에 나왔고, 당시 그것은 영국에서 나온 ‘시와 아나키즘’을 포함한 몇 개의 팸플릿을 묶어 번역한 것이었다. 이어 1954년에 영국에서 《아나키와 질서-정치론집》이라는 제목으로 나왔고, 이 책은 1971년에 미국에서 같은 제목으로 나왔다. 미국판도 내용은 같은데 하워드 진이 쓴 서론이 붙은 점이 달랐다. 한국어 번역판에도 진의 서론이 있다. 그 서론에서 진은 원저가 나온 지 16년이 지난 1971년에야 미국에서 나온 점에 대해 1950년대의 미국은 아나키즘을 받아들이기에 호의적이지 않았으나 1970년대에는 분위기가 달라졌다고 했다. 한국에서는 1980년대에야 분위기가 달라져서 번역본이 나왔을까? 불행히도 그 책은 그다지 주목받지 못했으나, 나는 아나키즘 책으로는 최고라고 본다. 

일본에서는 리드를 처음 소개한 책이 《시와 아나키즘》이었으나 한국에서는 그것이 거의 마지막으로 소개되었다. 1968년에 일본에서 나온 《아나키즘의 철학》은 1954년의 《아나키와 질서》를 번역한 것으로 나온 지 3년도 안 되어 7판을 찍었으나, 한국에서 1983년에 나온 《시와 아나키즘》은 1판으로 끝난듯하다. 그 뒤 한국에서 그 책은 물론 리드의 아나키즘에 대해 언급한 글을 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여기에서 허버트 리드의 아나키즘을 다루는 것이 몹시 감격스럽다. 리드는 무엇보다도 아나키스트이기 때문이다. 그는 《시와 아나키즘》 머리말 처음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이 책에는 내가 특히 아나키즘을 주제로 하여 쓴 몇 개의 에세이를 모두 수록했다. 그런데 내가 이 주제에 대해 쓴 것과 사회문제 전반에 대해 쓴 것(《비정치적 인간의 정치론》), 예술의 사회적 측면에 대해 쓴 것(《예술과 사회》 및 《예술의 뿌리》), 교육의 사회적 측면에 대해 쓴 것(《예술교육론》과 《평화를 위한 교육》) 사이에 근본적인 차이는 없다. 나의 문학비평이나 시에도 같은 철학이 나타나 있다.”(3쪽-번역은 수정) 
    
리드는 각 개인이 독립적으로 자신의 진로를 추구하면서 이웃의 간섭 없이 자신이 생산하고 싶은 것을 행복하게 만들어 내는 사회에서 가장 적합한 방식으로 자신을 표현하는 것을 상상했다. 리드에게 예술의 모든 유형은 단순히 허용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바람직한 것이다. 그는 각자에게 잠재해 있는 예술가를 격려하는 방법을 찾았다. 그 방법 중 하나는 교육이었다. 리드는 《예술을 통한 교육》과 《자유인의 교육》에서 어린이의 예술은 자신의 형태와 아름다움을 갖기 전까지 자신의 개성을 발전시키는 것이기 때문에, 자신의 자유에 대한 통행권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므로 교사는 일차적으로 교육자가 아니라 사람이어야 하고, 주인이나 정부가 아니라 친구여야 하며, 무한히 참을성 있는 협력자여야 한다.

리드는 예술 교육을 통해 충분히 균형 잡힌 인격을 발전시킨다는 원칙에 바탕을 둔, 더 큰 국제적 이해와 응집력을 제공하면서 사회 문화적인 차원의 창조적 교육을 발전시켰다. 그는 《예술을 통한 교육》에서 “모든 아이들은 이러한 전망으로부터 구할 수 있는 잠재적인 신경적 능력자라고 한다. 만약 일찍, 대부분 선천적으로 창의적인 능력이 전통적인 교육에 의해 억압되지 않았다면 말이다.”라고 했다.  

모든 사람은 크게 대수롭지는 않더라도 특별한 능력을 갖는 예술가로서, 집단생활의 무한한 풍요로움에 기여하는 것으로 격려되어야 한다, 즉 모든 사람에게는 아동기와 성인기의 창의성이 본질적으로 연속한다고 보는 리드의 새로운 관점은, 20세기 예술 교육의 두 가지 반대되는 모델을 합성한 것이었다. 리드는 교과과정이 아니라 순수와 진실의 이론적 방어를 제공했다. 그의 순수와 진실에 대한 주장은 아동 예술에 대한 연구에서 드러난 개성의 압도적인 증거에 근거한 것이었다. 1946년부터 1968년 사망할 때까지 그는 뒤에 ATG로 개칭된 예술교육협회(Society for Education in Art, SEA)의 회장을 맡아 유네스코와 함께 활동했고, 1954년에 유네스코의 집행기관인 국제교육협회(INSEA, International Society for Education)를 설립했다.

머레이 북친

평가와 영향

1968년의 죽음 이후, 리드는 그의 사상을 경시하는 마르크시즘을 포함한 예술 이론이 학계에서 점점 더 우위에 서게 되면서 무시되었으나 그의 저술은 계속 영향력을 행사했다. 머레이 북친이 1960년대 중반 아나키즘과 생태계의 연관성을 탐구하기 위해 영감을 받은 것은 아나키즘에 대한 리드의 글을 통해서였다. 《시와 아나키즘》에서 리드는 자신이 추구하는 것은 아나키즘과 초현실주의, 이성주의와 낭만주의, 이해와 상상력, 기능과 자유의 조화라고 썼다. 정치적 관점에서 이는 지역 자치를 옹호하는 것으로 해석되어, 중앙 정부나 국가 기관이 없는 직접 민주적인 정치 형태, 즉 모든 시민이 자유롭게 참여할 수 있는 아나르코-생디칼리즘에 영감을 주었고 이는 특히 북친의 후기 개념인 아나키 자치주의를 낳게 했다. 

1965년 쓴 에세이 ‘에콜로지와 혁명사상’에서 북친은 리드가 진보란 ‘사회 내의 분화의 정도’에 의해 측정된다고 한 점에서 리드에게 진 부채를 인정했다. 1940년에 리드는 《아나키즘의 철학》에서 “사회는 유기적인 존재다. 식욕과 소화, 본능과 열정, 지성과 이성을 갖춘 살아있는 구조다. 이러한 능력의 적절한 균형에 의한 개인이 자신의 건강을 유지할 수 있듯이, 공동체도 범죄라는 질병 없이 자연스럽고 자유롭게 살 수 있다.”라고 했다. 리드는 제2차 세계대전의 압도적인 대재앙이 ‘운명적 체제의 최종 발작’인지, 아니면 ‘자발적이고 보편적인 반란의 서막’인지는 우리 앞에 닥친 운명에 대한 신속한 이해에 달려 있다’고 말했다.

이처럼 북친만이 아니라 많은 새로운 아나키스트들에게 리드의 영향은 컸다. 앞에서 말했듯이 1971년 아나키즘과 정치에 관한 그의 저술집 《아나키와 질서》가 하워드 진의 소개와 함께 다시 출판된 것을 시작으로 1990년대에 그에 대한 관심이 되살아났다. 그 후 더 많은 그의 저술이 다시 출판되었고 2004년 6월 테이트 브리튼에서 토론회가 열리는 등의 관심이 기울어졌으며, 키프루스 예술대학(Cyprus College of Art)의 도서관이나 캔터베리 창조예술대학의 미술관 등이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런던 현대미술연구소에서 열린 연례 허버트 강연에는 살만 루슈디와 같은 유명한 연사들이 포함되었고, 그의 아나키즘 예술론은 다시 각광을 받았다. 반면 한국에서는 허버트 리드에 대한, 또는 그를 계승하는 새로운 미술사나 미술교육 나아가 평화교육에 대한 논의가 거의 없다시피 하여 유감이다. 나는 그의 《아나키와 질서》를 비롯하여 몇 권의 책을 번역해 소개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박홍규 영남대 교양학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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