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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홍규의 아나키스트 열전 22-제임스 조이스] 나는 더 이상 믿지 않는 것을 섬기지 않을 것이다
[박홍규의 아나키스트 열전 22-제임스 조이스] 나는 더 이상 믿지 않는 것을 섬기지 않을 것이다
  • 교수신문
  • 승인 2020.03.20 10:5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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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 표현의 신성 모독과 검열은
국가 권력의 폭정
조이스, 모든 국가 권력의
임의적인 기초 노출하고 거부하는
문학적 아나키 실현
제임스 조이스

조이스에 대한 오해

한국인이 쓴 유일한 조이스 평전인 《제임스 조이스》(1999)의 저자인 나영균은 그 책의 머리말에서 “우리는 읽는 데에도 쩔쩔 매는데 그는 어떻게 그것을 썼을까 하는 경이로움이 앞선다.”(5쪽)고 하는 등, 조이스의 천재성을 무한히 강조하는데 그것이 그렇게도 중요한 점일까? 보통사람들이 알기 어렵게 쓰는 재주를 가졌기 때문에 조이스가 위대한 작가일까? 그렇게 알기 어렵다면 왜 굳이 읽어야 할까? 문학작품을 읽는다는 것이 난해한 수학문제 푸는 것과 같은 것일까? 앞에서 오스카 와일드를 다루면서 언급했듯이, 내게는 이해하기 힘들고 이해한다고 해도 무익할 뿐인 《도리안 그레이의 초상》보다, 이해하기 쉬우면서도 유익한 《행복한 왕자》와 같은 동화가 훨씬 더 좋다. 내가 머리가 나쁘고 재주가 없는 탓이라고 해도 좋다. 와일드나 조이스의 작품이 오로지 어려울 뿐이라면 나는 처음부터 읽을 생각이 전혀 없다.   

나영균은 조이스를 좋아하는 또 다른 이유로 그의 연애편지를 보면 “천재임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인간적”이고 부모나 자녀에 대한 사랑과 같은 점이라고 했지만, 내가 아는 조이스는 부모를 멀리했을 뿐 아니라 돈이나 결혼이나 성과 같은 부르주아적 도덕을 철저히 무시한 아나키스트였다. 그러나 나영균은 물론 한국의 조이스 연구자들은 조이스가 아나키스트였다는 점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하지 않는다. 아니, 아나키스트라고 하기는커녕 조이스는 나영균 책의 표지에 나오듯이 “완전히 새로운 기법으로 소설의 혁명을 가져온 모더니즘의 기수”라는 식으로 마치 오스카 와일드를 소위 ‘예술을 위한 예술’의 희생자로만 다루듯이 조이스를 ‘예술을 위한 예술’의 승리자로 예찬한다. 

그러나 나는 조이스 소설을 그렇게만 읽지 않았다. 조이스는 나라뿐만 아니라 부모형제도 싫어서 아일랜드를 떠나 평생을 유럽의 여기저기를 다니며 살았다. 그러면서도 그가 평생 쓴 작품은 아일랜드, 특히 더블린을 배경으로 한 것이고, 또한 그곳에서 산 사람들이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이었다. 그런 조이스의 작품을 왜 현실묘사와 무관한 것이라고 하는가? 조이스야말로 그 누구보다도 정치와 사회의 현실을 묘사한 작가가 아닐까? 평생 식민지인 조국을 생각하고 조국에 대해 쓴 작가가 아닌가? 여기서 그가 조국을, 고향을 그리워했다느니 하며 오해해서는 안 된다. 그는 자기가 태어나 자란 나라를 철저히 고민했다. 어떤 예술도 그 시대의 반영이라는 진실이 왜 와일드나 조이스의 경우에 예외여야 하는가? 

조이스의 모든 소설은 부패한 아일랜드 사람들에 대한 통렬한 비판이었다. 그런 비판은 그의 어린 시절부터 형성되었다. 그러나 나영균은 그 점에 대해 일언반구도 없다. 단 한 마디, “유치한 애국심을 철저히 경멸했다”(28쪽)는 말뿐이다. 마치 그것이 옳은 듯이 말이다. 그러나 나는 조이스야말로 진정한 애국자라고 믿는다. 조이스가 뒤에 《더블린 사람들》 등에서 통렬하게 아일랜드를 묘사하기 위해서는 그가 당연히 당대 현실을 뼈저리게 체험했으리라고 생각하기에 내가 그의 평전을 쓴다면 무엇보다도 그런 현실에 대한 묘사와 함께 어린 조이스가 어떻게 그 현실을 보았는지에 대한 상세 설명이 있어야 한다고 본다. 그러나 나영균에게는 그런 문제의식이 없었기 때문에 마치 부잣집에서 태어난 수재 아이가 어려서부터 글재주를 피운 것처럼 묘사할 뿐이다. 

《더블린 사람들》을 비롯한 조이스의 모든 작품은 식민지 더블린의 비참함을 그렸다. 식민지 군사도시이자 매춘굴이자 도박천지로 타락한 수도 더블린과 그 타락에 환호하는 식민지 인간들, 독립운동영웅을 배신한 정치인과 종교인의 타락과 부패, 식민지 당국의 하수인으로 타락한 토착민 경찰과 군인, 북부의 신교와 남부의 가톨릭의 분열과 알력, 가톨릭 사제의 변질이 보여주는 종교적 부패, 물질주의나 배금주의에 의한 문예운동의 타락, 19세기 중반의 대기근으로 인한 대량 실직과 이민사태 같은 제국주의가 결과한 비참함을 묘사한 소설들이다. 그런 소설을 쓰려고 하면 그런 현실에 대한 뼈저린 체험이 전제되어야 한다. 평전이라면 당연히 그런 체험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삼아야 한다. 그러나 나영균의 조이스에는 그런 체험이 전혀 없다. 우리가 조이스를 읽어야 한다면 그가 경험하고 묘사한 식민지 경험을 우리도 했기 때문이지, 의식의 흐름이니 뭐니 하면서 요란스럽게 그 기법의 기묘함을 탄상하는 수준에 그쳐서는 안 된다. 그런 형식의 혁신도 내용의 혁신에서 나오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도블린 노스 얼 거리에 있는 제임스 초이스 상 ⓒMarjorie FitzGibbon
/wikipedia|CC BY-SA 2.5 

 

조이스의 삶과 글

1882년에 아일랜드 더블린 근교에서 태어나 1941년에 스위스 취리히에서 죽은 조이스의 생애는 나에게 그와 비슷한 시대를 산 우리의 지식인들과 항상 겹쳐져 보인다. 가령 신채호는 1880년에 조선에서 태어나 1936년에 다렌시 감옥에서 죽었다. 두 사람의 생애나 작품은 많이 다르지만, 식민지에서 태어나 외국으로 망명해 힘들게 살다가 비참하게 죽은 것은 다름이 없다. 두 사람 모두 식민지인 조국의 독립을 염원했지만 조국의 현실은 비참하고 독립을 위해 싸운다고 하는 사람들도 그런 미명에도 불구하고 분열과 파당, 폭력과 배신으로 얼룩지는 추태를 보였다. 신채호는 그 속에서도 치열하게 싸우다 결국 외국의 감옥에서 숨진 반면 조이스는 평생 글 속에 숨어 살았지만, 그의 모든 글은 당대 아일랜드를 지배한 대영제국만이 아니라 아일랜드 역사를 지배한 로마제국과 그 종교인 가톨릭을 비판한 것이었다. 바로 앞에서 언급한 《더블린 사람들》이다. 우리에게 신채호는 역사학자로 더 유명하지만, 조이스와 마찬가지로 소설을 쓴 작가이기도 했다. 

그런데 《더블린 사람들》에서 노동자는 모든 것을 생산함에도 고생만 한다고 묘사하며 그것이 아일랜드의 근본문제라고 본 조이스는 정작 노동계층에 공감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들은 오로지 가난에서만 벗어나고 싶어 돈벌이에만 관심을 두기 때문이다. 이는 영국의 압제가 너무나 철저했음을 보여준다고 볼 수도 있지만, 식민지 지배를 벗어난 뒤에도 그러했다면 문제는 달라진다. 한국의 경우가 바로 그렇지 않은가? 한국에서는 해방 후는 물론이고 소위 민주화 이후에도 그렇지 않은가? 그래서 조이스는 아일랜드에 진절머리가 난다고 하면서 아일랜드어는 자신의 말이 아니라고까지 극언한다. 

그럼에도 영국이 아일랜드를 분열시키고 재산을 빼앗아 갔음은 일본이 조선에 저지른 것처럼 역사적 죄악이었음을 조이스는 부정하지 않았다. 아일랜드인들이 가톨릭이고, 가난하고, 무지하다고 깔본 영국처럼 일본인도 조선인을 그렇게 무시했다. 그래도 아일랜드인에게는 시민권이라도 주어졌지만 일본인은 오로지 총과 칼로 조선을 지배했다. 그러나 조이스는 예술이 선전으로 타락하는 것을 거부했다. 문학가나 예술가가 독자에게 작가의 관점을 수용하도록 강요하는 것은 예술적 가치를 폄하시키는 정치적 도구의 행위이자 이데올로기적 선전일 뿐이라는 이유로 거부했다. 

그런 점에서 조이스가 아나키스트였다는 점은 한국만이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영어권만이 아니라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소설가이자 창조적인 예술가로서 조이스는 아나키스트로서 자유 표현의 신성 모독과 검열을 국가 권력의 폭정의 또 다른 예로 간주했다. 국가는 외설을 금지할 뿐만 아니라 외설이 무엇인지를 결정하기 때문이다. 《율리시스》와 같은 소설을 출판함으로써 조이스는 모든 국가 권력의 임의적인 기초를 노출시키고 거부하는 문학적 아나키를 실천했다. 《율리시스》의 일부는 파리에서 불에 타 버렸지만 여전히 원고 초안에 불과했으며 책이 되기도 전에 뉴욕에서 외설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이어 그 소설은 영국과 미국에서 판매가 금지되었고 1922년에 영미 정부 당국이 압수해 천 부 이상을 불태웠다. 1933년 가을에 《율리시스》 사건이 법정에서 다루어지기 불과 4개월 전에 나치가 책을 태우는 사건이 터졌기 때문에 이 사건은 사소한 문제가 아니게 되었다. 《율리시스》를 둘러싼 법적 싸움은 전위 예술 운동의 표준적 지지자를 예술 전체의 대표자로 사실상 바꾸어 놓았다. 즉 그것을 구속하는 권위에 맞서 싸우는 창조성의 상징이 되었다. 《율리시스》는 모더니스트 시대를 이끌었을 뿐만 아니라 소설에 대한 생각을 전적으로 바꾼 걸작으로 평가되어 왔고, 특히 문학적 자유의 표현을 위한 기초를 마련한 점에서 역사적인 중요성을 인정받아 왔다.

조이스의 아나키즘

《젊은 예술가의 초상》을 쓰기 직전이었던 1903년, 21세였던 조이스는 아나키즘과 사회주의에 적극적인 관심을 가졌다. 그는 더블린에서 사회주의 집회에 참석했으며, 1905년에 당시 오스트리아의 지배를 받던(지금은 이탈리아) 트리에스테에서 자신의 정치를 ‘사회주의자 예술가의 것’이라고 선언했다. 조이스의 전기를 쓴 리처드 엘먼은 1982년에 개정한 《제임스 조이스》 상권 251쪽의 주석에서 당시 조이스가 읽은 아나키즘 책들의 저자들이 모스트(John Most), 말라테스타(Erico Malatesta),슈티르너(Max Stirner), 바쿠닌(Michael Bakunin), 크로포트킨(Peter Kropotkin), 스펜서(Herbert Spencer), 터커(Benjamin Tucker) 등이라고 했다. 반면 《자본론》의 첫 문장이 너무 터무니없다고 생각하여 대출자에게 돌려주었을 정도로 마르크스에는 무관심했다. 마르크스는 프롤레타리아나 자본가 같은 계급만 보았지만, 조이스가 주목한 아나키스트들, 특히 개인주의 아나키스트들은 무엇보다도 개인과 관련이 있었고, 인간의 잠재력을 억누르는 힘으로부터 그들을 해방시키려고 했다. 개인주의 아나키스트로서 특히 조이스에게 영향을 준 터커는 폭력적인 행동을 옹호하지 않았다. 조이스의 《젊은 예술가의 초상》 등에 나오는 스티븐 디덜러스에게 말하게 한 혁명은 폭력이 아니라 예술이라는 매개를 통해 야기될 것이었다. 

조이스가 아나키즘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정부든 종교든 모든 권위가 개인의 동의 없이 통제한다는 그의 견해에서 비롯되었다. 통치는 개인의 주권을 침해하는 것이며, 모든 정부가 강압적 힘의 사용에 대해 독점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모두 억압적이다. 군주제를 민주주의로 바꾸는 것조차도 단순히 왕의 폭정을 대다수의 폭정과 교환하는 것이다. 조이스가 교회와 국가를 ‘이중적 괴물’로 묘사한 터커에게 끌린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 괴물은 사람들이 ‘정통성이라는 권위 허구에 대한 미신적인 경외심에 사로잡혀 있기에 유지되었다. 두 사람은 종교와 정치적 권위의 정통성을 박탈함으로써 교회와 국가가 조잡한 권력 행사에 지나지 않기를 바랐다.

1907년 이후 사회주의 단체에서 관찰된 ‘끝없는 분열’로 인해 그의 실제 참여는 줄어들었지만, 많은 조이스 학자들은 조이스의 사회주의와 평화주의 아나키즘에 대한 관심이 조이스의 삶과 작품을 지배했고 그가 민주주의적, 사회주의적 사상에 공감했음에 동의한다. 1918년에 그는 ‘모든 국가에 대항’한다고 선언하고 터커와 와일드의 《사회주의적 인간의 영혼》의 개인주의 철학에 따랐다. 조이스가 개인정신의 노력과 발전을 저지하는 국가와 종교를 거부한 것도 와일드를 비롯한 여러 아나키스트들의 주장과 유사했다. 박해받은 유태인의 후손임에도 불구하고 보편적인 사랑을 강조하는 《율리시스》의 불룸은 폭력, 증오, 박해를 포용하는 평화주의자, 인도주의자, 이타주의자, 박애주의자이다. 

조이스는 1789년 프랑스 혁명의 출발점이었던 바스티유 감옥의 파괴를 국가와 왕권의 전복으로 보고, 1871년의 파리코뮌을 중앙 집권, 특히 정당 국가에 대한 반동으로 보았던 크로포트킨의 아나키즘을 지지했다. 그러나 동시에 개인을 구속시키는 국가 체제를 비난하면서도 그러한 국가 체제에 대한 폭력에 대해서는 단호히 반대했다. 나아가 불룸이 구상한 유토피아, 즉 모든 개인에게 수공 노동을 장려하고, 공중을 위해 모든 공원을 개방하며, 질병과 전쟁을 끝내고, 나아가 자유 화폐, 자유연애, 자유로운 평민 국가, 자유로운 평신도 교회를 인정하는 새로운 아나키즘 세계를 구상한 점에서도 크로포트킨을 따랐다.

《더블린 사람들》에서 아나키스트 조이스를 연상시키는 인물은 ‘참혹한 사건’에 나오는 중년의 제임스 터피다. 그는 동료나 친구도, 교파나 신앙도 없이 세상과 떨어져 혼자만의 정신적 생활을 영위하며 최소한의 의례 외에 관습을 따르지 않는다. 이는 조이스가 부르주아 도덕성에 평생 반대하며 살았던 것과 같다. 미국의 아나키스트인 엠마 골드만처럼 조이스는 오랜 망명 생활 끝에 영국에 재입국하기 위해 결혼을 해야 할 때까지 결혼 증명서 없이 가정부인 노라 바나클과 함께 살았다. 조이스는 정부 사무원이나 성직자를 상대하고 싶지 않았고 규정된 도덕성에 대해서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그렇게 오랫동안 미혼으로 남아 있었다. 조이스는 어려서부터 종교를 거부했다.

그런 터피는 《젊은 예술가의 초상》의 주인공인 스티븐 디덜러스의 분신이지만 아나키스트적인 모습은 《율리시스》에서 더욱 분명하게 나타난다. 《율리시스》에서 조이스는 아일랜드 악몽의 역사적 책임이 영국에 있다고 고발하면서 영국을 아일랜드만이 아니라 모든 인류의 적으로 규정한다. 동시에 조이스는 영국에 대한 폭력혁명만을 고집하는 국수주의자에 대해서도 경계한다. 그는 식민지 통치세력, 그리고 그들과 결탁하여 민족을 배신한 세력과 함께 그들과 폭력적으로 대립한 국수주의 세력에 의해 아일랜드가 마비되었다고 보고 그 마비에서 깨어나는 사상혁명이야말로 역사적 과제라고 본다. 

평가와 영향

조이스의 아나키즘은 《젊은 예술가의 초상》과 《율리시스》의 주인공인 스티븐 디덜러스에게 ‘섬기지 않겠다’(Non serviam)고 말하게 할 때 단적으로 나타난다. 《젊은 예술가의 초상》에서 스티븐은 친구 크랜리에게 “나는 그것이 내 집, 조국 또는 교회라고 부르든 간에 더 이상 믿지 않는 것을 섬기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소설의 마지막 장면인 일기에서 스티븐은 영국과 아일랜드의 지배체제를 비판한다. 무식하고 신부로서의 역할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는 대학의 학감과 같은 영국인들이 아일랜드를 지배하면서 자신과 같은 아일랜드인들에게 가르치려고 하는 점에 분노한다. 동시에 그는 그런 지배체제에 세뇌되어 자신을 억압하는 아일랜드인들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그리고 그들을 해방시키고자 자신의 양심을 갈고닦기 위해 떠난다. 그는 조국을 ‘자기 새끼를 잡아먹는 암퇘지’에 비유하며 거기에서 자유롭게 되고자 한다.     

《율리시스》에서도 스티븐은 여전히 지배체제 하에 있지만 그것에 반항한다. 그는 지배와 억압을 상징하는 “사제와 왕을 죽여야 하는 사람은 바로 나야”라고 하면서, 지배세력인 국가와 교회는 개인의 자유와 예술을 억압했기 때문에 없어져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그것들을 제거하려고 한다. 그는 영국을 ‘야만적인 제국’이라고 모멸하며 《젊은 예술가의 초상》에서처럼 조국을 ‘자기 새끼를 잡아먹는 암퇘지’로 비판한다. 교회는 어머니의 유령의 형태로 나타나 영웅적으로 “아니, 어머니, 나를 그대로 살려주게 해줘요.”라고 주장하는 스티븐을 괴롭힌다. 벨라 코헨의 매춘굴에서의 극적인 순서로, 스티븐의 어머니는 아들에게 마음먹고 회개하라고 권유하지만 스티븐은 반항적으로 외친다. “섬기지 않겠다. 할 수 있다면 내 영혼을 모두 부숴라! 내가 너희 모두를 뒤꿈치로 데려올게!” 매춘굴은 매춘부로 가득 찬 아일랜드를 상징한다. 스티븐은 친영파 아일랜드인인으로 돈과 권력을 섬기고 지배세력에 속하려고 하는 디지 교장에게 “역사는 내가 깨어나려고 애쓰는 악몽이다”라고 말하는데, 이 장면에서 나에게는 신채호가 떠올랐다. 스티븐은 역사를 통해 아일랜드인이 편협하고 식민지 지배체제에 순응하면서 그 권력에 의존한다는 것을 깨닫고 거기에서 깨어나려고 교장에게 사표를 던지고서 학교를 떠난다. 그리고 지배에서 벗어나 개체와 상호평등이 인정되는 에덴이나 이상의 도시로 가려고 한다. 아민 아놀드(Armin Arnold)가 말했듯이 조이스의 분신인 스티븐은 부르주아 전통의 장벽을 타파하고, 가톨릭교회의 기만적인 가면을 벗어던지며, 예술의 진리를 위해 행복한 삶을 희생하는 찬란한 영웅이며 자유의 투사이며 예술가이다.

박홍규 영남대 교양학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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