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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있는, 반전의 박물관
살아있는, 반전의 박물관
  • 교수신문
  • 승인 2020.03.20 1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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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물관 여행
박찬희 박물관 칼럼니스트
전곡선사박물관
‘인류 진화의 위대한 행진’. ⓒ박찬희

살아있는 박물관, 언제 들어도 반갑다. 박물관이 살아있다는 건 세상의 변화를 예민하게 감지하고 관람객과 소통할 수 있는 지점들을 만들어간다는 것이다. 경기도 연천에 있는 전곡선사박물관, 이곳은 이런 박물관 가운데 한 곳이다. 1978년 한탄강에서 그렉 보웬이 주먹도끼를 발견한 일을 계기로 전곡리는 세계적인 구석기 유적지로 부각되었고 2011년 전곡선사박물관이 세워졌다. 그러나 뛰어난 명성으로 박물관을 세울 수는 있었지만 그 명성으로 살아있는 박물관을 만든 건 아니었으며 오히려 박물관 앞에는 큰 어려움이 놓였다. 박물관의 주제가 사람들이 큰 관심을 보이지 않는 구석기 시대였다. 또한 위치도 대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데다가 휴전선에서 가까워 심리적 거리는 더욱 멀었다. 

해결의 실마리는 구석기 시대 그 자체에 있었다. 구석기 시대는 남아있는 유물이 많지 않지만 거꾸로 사람들의 상상력과 호기심을 자극하는 시대이기도 하다. “그 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이 도구들은 어떻게 사용했을까, 무엇을 먹고 살았을까, 인류는 어떻게 진화했을까, 구석기 시대는 현재와 어떻게 이어지고 있을까?” 이 호기심을 해결하기 위해 박물관에서는 도구를 당시 방식대로 만들고 사용해 그 시대의 이해를 높이는 실험고고학과 이 성과를 대중들에게 널리 알리는 대중고고학에 깊은 관심을 기울였다. 또한 구석기 시대와 현재가 이어지는 지점들과 관람객과 소통할 수 있는 부분들을 찾기 위해 노력하였다. 이러한 노력은 박물관의 전시와 교육에 적극적으로 반영되어 전곡선사박물관에서는 일반적인 전시 문법과 구석기 시대에 대한 선입견이 깨지는 순간을 자주 경험하게 된다.  

통나무배. ⓒ박찬희

관람객은 박물관 건물을 만나는 순간 흔들리기 시작한다. 구석기 박물관이라면 은연중에 예스러울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정겨운 진입로를 따라가다 느닷없이 나타난 박물관 건물을 보는 순간 당황스러워진다. 주먹도끼를 모티프로 만든 화강암이나 시멘트 건물 대신 야트막한 계곡을 가로지르는 거대한 은빛 물체가 꿈틀거리고 있기 때문이다. 용에서 모티프를 얻었다는 박물관 건물은 공상 과학 영화에 나올 법한 미래의 우주선처럼 보인다. 깜짝 반전을 경험한 관람객들은 먼 미래의 우주선에 담긴 오랜 과거의 모습이 어떨지 은근히 기대한다.

박물관으로 들어간 관람객들은 낯설면서도 편안한 느낌을 받는다. 박물관에서 낯설고 딱딱한 느낌을 받기는 쉬워도 이런 느낌을 받기는 쉽지 않은데, 전시실을 포함한 내부 공간은 구석기 사람들 삶의 터전이자 구석기 시대 유물의 보고였던 동굴을 닮았다. 일반적인 박물관처럼 직선이 아니라 부드러운 곡선으로 공간이 구성되었다. 벽면도, 전시 공간도, 통로도 물이 흐르는 것 같이 유연하고 각 공간의 경계도 자연스럽게 이어져 관람객의 발걸음은 막힘없이 자연스럽게 움직인다. 또한 시원하게 보이면서도 적절하게 공간이 가려져 호기심을 자극한다. 심리적으로 편안한 공간에서 구석기라는 낯선 시대가 한 발자국 가깝게 다가온다. 

전곡선사박물관 전경. ⓒ박찬희

이곳에서는 바로 본론을 보여주지 않는다. 오른쪽으로 가면 전시실이, 왼쪽으로 가면 다양한 변신을 거듭하는 공간이 펼쳐진다. 왼쪽 공간은 주로 체험 관련 시설 위주로 바뀌었는데, 최근에는 ‘INTERSCOPE’라는 고고학 체험실이 자리 잡았다. 거대한 매머드 뼈와 신석기 시대 사람 외찌의 모형이 전시되었고 넓은 공간에는 도서실과 의자가 마련되었다. 이러한 구성은 선사 시대가 우리와 상관없는 머나먼 과거 어느 시대가 아니라 바로 우리 곁에 있고 또 우리가 들어가 있는 친근한 시대라는 느낌을 준다.

이제 박물관의 핵심인 전시를 만나는 순간이다. 박물관에서는 하고 싶은 이야기를 전시로 들려주고 관람객은 전시로 그 이야기와 그 시대를 만난다. 상설 전시실은 길쭉하고 널찍한 동굴 같은 분위기로 구성되어서 그런지 아늑하고 편안하다. 그런데 석기가 든 진열장 대신 구석기 시대를 이해할 수 있는 여러 모형물로 전시실 대부분을 채웠다. 진열장 밖으로 나온 모형물은 관람객들에게 심리적인 거리감을 좁혀 한걸음 다가서도록 만든다. 동굴 벽화를 재현한 공간은 실제로 관람객들이 그곳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해 마치 그 시대로 돌아간 듯한 느낌을 받도록  만들었다.

전곡선사박물관 내부. ⓒ박찬희

상설 전시실에서 전시실의 중심을 잡아주는 작품이 ‘인류 진화의 위대한 행진’이다. 상설전시실 초입에 전시된 이 작품은 길쭉한 타원형 안에 인류의 진화를 대표하는 14명의 인류를 전시해 수백만 년에 걸친 인류 진화의 역사를 한눈에 살펴보도록 했다. 기나긴 구석기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다는 점에 놀라고 진짜 그 시대 사람들을 보는 것 같아 다시 놀란다. 이 작품은 석기 유물이 대부분인 구석기 시대의 이미지를 바꾸어 놓고 나아가 다양한 상상력을 불러일으키는 한편 전곡선사박물관의 대표적인 포토존 역할을 한다. 

상설전에서 구석기 시대에 이르는 심리적 거리를 좁혔다면 기획전에서는 실험고고학과 대중고고학을 접맥시켜 적극적으로 대중과 소통한다. 최근 열린 전시 가운데 <돌과 나무의 시대>는 단연 돋보이는 전시였다. 전시실 한가운데 전시된 통나무배는 매우 상징적이었다. 독일의 실험고고학자를 이곳으로 초청해 직접 나무를 깎아 통나무배를 만들고 강에서 띄워본 후 전시하였다. 뿐만 아니라 해당 작업 과정을 영상으로 담아 전시실에서 볼 수 있도록 하였다. 이 전시에서는 석기와 짝을 이루었던 나무 부분을 복원하였고 석기들이 어떻게 사용되었는지, 구석기 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도구가 어떻게 바뀌었는지 그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도록 하였다.

기획전은 기획 전시실에서만 이루어지지 않는다. 다양한 주제의 실험적인 전시는 갤러리 PH-×에서 이루어진다. 이곳은 상설 전시실 앞쪽에 있기 때문에 관람객들이 상설 전시실로 들어갈 때 자연스럽게 시선이 머무는 곳이다. 이곳에서 이루어지는 전시는 주제가 다양하고 전시 구성도 자유로워 딱딱하고 엄숙한 느낌보다는 미술관의 설치 미술 같은 느낌을  받을 때가 많다. 이 공간은 자칫 딱딱해질 수 있는 박물관의 분위기를 환기시키고 박물관이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다는 이미지를 만드는데 적지 않은 기여를 하고 있다.

선사 시대를 주제로 관람객과 소통하려는 노력은 다양한 교육 프로그램으로 이어졌다. 흥미로운 여러 프로그램 가운데 단연 돋보이는 것이 ‘선사의 법칙, 1박2일 구석기 가족캠프’다. 참여하는 가족들은 1박 2일 동안 박물관 안팎에서 다양한 구석기 체험을 한다. 박물관에서 진행되는 교육 프로그램이 대부분 하루 안에 이뤄지는 상황을 감안하면 상당히 이례적이다. 이 프로그램은 막집 만들기, 석기 만들기, 석기로 고기 자르기, 불 피우기, 창던지기와 같은 구석기 체험으로 구성되었다. 이 체험들은 실험고고학의 성과를 바탕에 둔 것으로 진열장 안의 유물들이 실제로 어떻게 사용되었는지 몸으로 해볼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이 프로그램에서 가장 흥미로운 것은 잠자리다. 잠자리가 박물관 밖이 아니라 금기의 영역으로 여기는 박물관 내부다. 박물관은 저녁 시간 이후에는 닫고 따라서 관람객은 모두 박물관 밖으로 나가야 하는 현실에서 박물관에서 하룻밤을 보내는 건 영화에서나 볼 법한 매우 특별한 경험이다. 박물관에서 밤을 지낸 사람들에게 이곳이 특별하게 다가오는 것은 당연하다. 이러한 프로그램은 무엇보다 상식을 뒤집는 발상의 전환과 확신이 필요하다. 현재 이 프로그램은 공지를 올리자마자 마감될 정도로 인기가 높다.

2019년 한해 약 20만 명이 전곡선사박물관을 찾았다. 결코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이곳을 찾은 건 박물관이 현재를 살아가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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