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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강의 스케치]이도흠 박사의 ‘현대사회의 위기와 대안의 패러다임’
[열린강의 스케치]이도흠 박사의 ‘현대사회의 위기와 대안의 패러다임’
  • 이세영 기자
  • 승인 2001.03.20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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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03-20 21:33:14

“원효의 和諍사상은 철저한 반이분법적 사유를 특징으로 합니다. 그런데 현대문명의 위기에 대한 근본적 성찰로 등장한 심층생태학조차 서구 근대성의 이분법적 사유체계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는 못합니다. 서구의 비판자들이 화쟁의 ‘不一而不二’(하나도 둘도 아님) 사상이나 노자의 無爲에 대한 사유를 좀더 일찍 접했더라면 지금과는 다른 양상이 펼쳐졌을지도 모릅니다.”

신촌에 자리잡은 한겨레문화센터 5층. 지난해 ‘화쟁기호학’이란 독창적 사유체계로 지식인 사회 안팎의 시선을 모은 바 있는 이도흠 박사(한양대 강사·국문학)의 강의 ‘현대사회의 위기와 대안의 패러다임’이 진행중이다. 시각은 이미 밤 10시 15분을 넘겨 예정된 시간을 훌쩍 넘어섰지만 이박사의 열강은 좀체 마무리될 기색이 보이지 않는다. 마침내 질의응답시간. “화쟁사상이 심오한 철학을 담고 있는 건 알겠습니다. 하지만 노장철학을 위시한 대부분의 동양사상이 그렇듯 화쟁사상 역시 하나의 구체적 대안이라기보다 서구의 근대성 담론에 대한 비판적 안티테제에 불과하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습니다.” 마흔은 족히 넘어 뵈는 중년신사의 질문치고는 상당히 예각적이다. 또 다시 질문이 이어진다.

“그런데 왜 반드시 화쟁사상이어야만 합니까? 선생님 말씀은 또 다른 독단론으로 들립니다. 화쟁같은 반이분법적·생태친화적·緣起적인 논리가 과연 아메리카 인디언이나 파푸아뉴기니의 원주민들, 그리고 前산업시대의 유럽에는 과연 없었을까요?” 이번엔 앳된 얼굴의 여대생. “수강생들로부터 오히려 배운다”는 이도흠 박사의 말은 역시 괜한 겸손은 아니었던 셈이다.

이박사는 이곳 한겨레 문화센터에서만 벌써 4년째 강의를 진행해오고 있다. 모교인 한양대에도 출강하고 있지만 그는 다양한 수강생들을 만날 수 있는 아카데미 밖의 강의에 보다 진한 애정을 갖고 있는 듯하다. “저는 종종 이곳을 인문학의 ‘성전’이자 ‘교두보’라고 부릅니다. 대학의 인문학은 지금 고사 위기입니다. 학부제를 시행하면서 형식적으로나마 남아있는 교양강의도 줄어든 데다 학생들 역시 취업난 때문에 인문학 강의를 외면하죠. 이곳에 오면 인문학을 진지하게 고민하는 사람들과 만날 수 있어 좋습니다. 무엇보다 소통이 가능하거든요.”

지금까지 그는 주로 기호학과 비평이론을 강의했다. ‘화쟁사상’을 들고 공개적인 대중강좌에 나서기는 이번이 사실상 처음인 셈이다. 그만큼 그가 이번 강의에 기대하는 바도 크다. 그는 자신의 강의를 이렇게 설명하곤 한다. “모든 질문과 답은 지금 우리가 맞고 있는 현실에서 출발해야할 뿐 아니라, 보편성을 지향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서양철학과의 대화가 필수적입니다. 저는 강의실에 원효와 마르크스와 데리다, 하버마스를 초대하여 토론을 벌이게 합니다.”

10시 30분. 그는 첫 강의부터 약속을 어긴 강사가 되고야 말았다. 강의시간 40분 초과. 하지만 강의실을 나서는 학생들의 표정에선 뿌듯함이 배어난다. 대학 강의실에선 좀체 보기 드문 풍경이다.
이세영 기자 sylee@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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