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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홍규의 아나키스트 열전21] “가지려 하지 말고 살아라, 우기려 하지 말고 행하라, 지배하려 하지 말고 발전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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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교수신문
  • 승인 2020.03.13 0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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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트런드 러셀
촘스키와 그의 연구실에 걸린 버트런드 러셀의 초상화
ⓒChantal Berman/radioopensource|BY-NC-ND 

촘스키와 러셀

MIT에 있는 촘스키 연구실에는 러셀의 대형 초상화가 걸려있다. 그는 여러 책이나 인터뷰 등에서 자주 러셀에 대해 언급하면서 러셀을 스승으로 삼았다. 가령 1990년의 <누가 민주주의를 공격하는가?>라는 강연에서 촘스키는 “자유가 인간의 타고난 권리이자 가장 중요한 욕구라는 상식적인 원칙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아나키즘이 ‘사회가 지향해야 할 궁극적인 이상이라고 했던 러셀의 주장에 동의할 것”이라고 하면서 러셀의 아나키즘을 상세하게 했다. (《촘스키의 아나키즘》, 119쪽-번역은 수정됨)

1970년 러셀이 죽고 1년 뒤에 러셀의 모교인 케임브리지대학교에서 <지식과 자유의 문제>라는 제목으로 했던 ‘러셀 강연’은 우리나라에도 《촘스키, 러셀을 말하다》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어 있다. 그러나 그 강연 내용은 러셀에 대한 것이라기보다 러셀에 입각해 자신의 사상을 말한 것이어서 한국에서 붙인 그 책제목은 반드시 정확하지 않다. 뿐만 아니라 장의 제목도 멋대로 번역하여 문제가 많다.

 
그 책의 역자는 해제에서 촘스키의 책들이 불온서적 취급을 받았다고 하면서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과 조지 오웰의 《1984》등을 드는데(191쪽), 그런 책들이 언제 어디에서 그런 취급을 받았는지 나로서는 알 수 없으나, 촘스키 책은 한국의 독재시대에도 판금된 적이 없다가 2008년 국방부에 의해 불온서적 취급을 받았고, 소련에서도 일시적으로 그런 취급을 당했으니 2008년 한국과 소련은 촘스키에게 같은 나라로 취급될지도 모른다는 점을 역자는 밝히지 않아 유감이다. 촘스키는 자본주의에 반대한 사람이니 한국에서 불온 취급을 당한 것은 당연하지만, 마찬가지로 자본주의에 반대한 러셀은 한국에서 불온시 된 적이 전혀 없다. 도리어 소련에 반대했다는 이유로 한국에서는 오랫동안 친자본주의 반공주의자로 오해된 탓인지 해방 전부터 지금까지 널리 소개되었다. 한국에서 나온 어떤 책에도 러셀이 아나키스트라는 언급은 없다. 그러니 러셀을 아나키스트라고 함은 이 글이 처음일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촘스키, 러셀을 말하다》의 역자는 촘스키를 일부에서 아나키스트로 여기지만, 촘스키 자신은 자유주의적 사회주의자(libertarian socialist)로 자처하며 유럽의 골수 아나키스트와는 일정한 선을 긋는다고 하며, “조지 오웰이 《카탈로니아 찬가》에서 꿈꾼 무계급의 평등사회를 가장 이상적인 아나키즘 사회라고 언급한 적이 있다.”고 한다.(226쪽) 그러나 libertarian socialist가 바로 아나키스트이고, 그 libertarian은 우리가 보통 말하는 ‘자유주의’와는 달리 아나키즘과 같다는 점, 그리고 오웰이 꿈꾼 아나키즘 사회를 ‘무계급의 평등사회’라고만 말하기 어렵고, 그것은 도리어 아나키즘과는 다른 공산주의를 뜻하는 것일 수도 있다. 《촘스키, 러셀을 말하다》 본문에서도 촘스키가 libertarian이라고 하는 것을 자유주의라고 번역하는데 그것은 독자들에게 한국에서 말하는 자유주의, 특히 반공주의와 곧잘 오해되는 자유주의로 오해될 여지가 있다.

 
촘스키는 물론 그가 스승으로 삼은 러셀도 아나키스트이지만 위 역자는 그 점에 대해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러셀이 아나키즘을 논의한 1918년의 《자유로 가는 길: 사회주의, 아나키즘, 생디칼리슴》은 러셀의 책이 우후죽순처럼 번역되는 풍조 속에서 거의 유일하게 제외되다가 2012년에야 처음으로 번역되었다. 그 책의 ‘옮긴이의 글’은 러셀이 그 책에서 당시 테러리즘과 동의어였던 아나키즘을 위해 해명하면서도 아나키즘의 국가부정론은 반대했다고 하는 설명으로 끝나지만(272쪽) 국가가 갖는 최소한의 긍정적 기능을 인정하는 것 외에 러셀은 아나키스트로서 전혀 손색이 없었다. 그러한 러셀의 아나키즘은 많은 아나키스트들에게 의해서도 인정되는 것이므로 그 점을 이유로 러셀이 아나키즘에 반대했다는 식으로 볼 수 없다. 촘스키도 이 점에 동의한다. 촘스키가 책의 처음에 인용하는 러셀의 아나키즘에 대한 비전은 《자유로 가는 길》의 마지막에 나오는 다음 구절이다. 

“우리가 반드시 찾아야 할 세상은 창조적 정신이 살아있는 세상, 삶이 곧 기쁨과 희망으로 가득한 모험인 세상이다. 그 세상의 토대는 우리가 소유한 것을 지키려는 욕구나 타인이 소유한 것을 갖고자 하는 욕구가 아니라 창조적 충동이어야 한다. 그 세상에서 애정은 대가를 바라지 않을 것이고, 연애는 지배본능을 벗어던질 것이며, 잔인성과 시기는 행복한 삶을 일구고 그 삶을 정신적 환희로 채우기 위하여 자유롭게 진보하는 모든 본능에 밀려 설 자리를 잃을 것이다. 그러한 세상은 실현될 수 있다. 지금은 다만 사람들이 마음먹고 만들어 주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268쪽) 

위 구절은 《자유로 가는 길》 처음에 인용된 노자의 “가지려 하지 말고 살아라, 우기려 하지 말고 행하라, 지배하려 하지 말고 발전하라”라는 구절과 일치한다.  

러셀의 삶

버트란드 러셀

위에서 인용한 말들은 적어도 러셀이 살았던 20세기에 이루어지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자신의 삶에는 해당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러셀 자서전》의 서두에서 이렇게 썼다. 

“단순하지만 누릴 길 없이 강렬한 세 가지 열정이 내 인생을 지배해왔으니, 사랑에 대한 갈망, 지식에 대한 탐구욕, 인류의 고통에 대한 참기 힘든 연민이 바로 그것이다. 이러한 열정들이 마치 거센 바람과도 같이 나를 이리저리 제멋대로 몰고 다니며 깊은 고뇌의 대양 위로, 절망의 벼랑 끝으로 떠돌게 했다.”

위 구절에 나오는 ‘인류의 고통에 대한 참기 힘든 연민’이 러셀에게 아나키즘에 관심을 갖게 했다. 1895년 23세의 나이에 그는 비어트리스 웹에 의해 ‘아나키적’이었다고 묘사되었고, 자신도 아나키즘에 기울어진 기질적 성향을 고백했다. 그러나 영국의 수학자, 논리학자, 철학자, 역사가, 사회개혁운동가, 사회주의자, 평화주의자 등으로 불리는 러셀을 아나키스트로 부르지는 않는다. 1872년에 영국의 명문가에서 태어난 러셀의 대부는 존 스튜어트 밀이었다. 밀은 러셀이 태어난 이듬해에 사망했지만 그의 저작들은 러셀의 인생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특히 자유와 사회주의에 대한 아나키스트적 열정이 그렇다.

 
제1차 세계대전에 영국이 참여하는 것을 반대한 탓으로 1918년 6개월 징역형을 선고받기도 한 러셀은 1920년 여름에 러시아를 방문하여 모스크바 주변에서 엠마 골드만, 알렉산더 버크만을 비롯한 여러 저명한 아나키스트들과 볼셰비키 지도자들을 만났다. 그 방문의 결과인 그의 《볼셰비키의 실천과 이론》(1920)은 좌파가 볼셰비키 독재를 비판하면 배신으로 여겨졌던 시기에 대단한 용기로 쓴 책이었다. 골드만이 2년 후 영국에 정치적 망명을 하려고 했을 때, 러셀은 내무부와 함께 그 사건을 맡았고, 골드만이 더 폭력적인 형태의 아나키즘에 관여하지 않을 것이라고 그들에게 말했다. 그녀를 환영하기 위해 옥스퍼드에서 열린 저녁 식사에서 소련 정부에 대한 그녀의 격렬한 공격에 박수를 보낸 유일한 사람은 러셀이었다.

 
그러나 러셀은 폭력적인 아나키스트들과는 거리를 두었다. 볼셰비키 정부보다 더 잔혹할 수도 있는 러시아의 대안 정부를 지지하지 않았기 때문에 러시아 정치범들을 돕기 위한 위원회를 구성하려는 골드만을 돕지 않은 그는 골드만에게 “나는 모든 정부의 폐지가 우리 시대나 20세기에 가능하다고 상상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나 러셀은 볼셰비키의 정치적 반대자들에 대한 끔찍한 대우를 비난했으며, 아나키스트들인 사코와 반제티 형제가 미국에서 처형되었을 때 그들이 정치적 견해 때문에 부당하게 처형되었다고 비판했다.

무신론자이자 원자론자인 러셀은 더 나은 세상을 향한 희망에도 불구하고 인류에 대한 어두운 비전을 가지고 있었고, 휴머니스트로서 러셀은 인간의 자유와 행복을 확장하는 데 관심이 있었지만 그 일은 쉽지 않다고 생각했다. 인간은 동물 가운데 가장 합리적이고 창조적인 존재로 진화해 왔고, 심지어는 불쾌한 활동에도 바람직한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참여할 준비가 되어 있지만, 여전히 파괴적이고 공격적인 욕망에 사로잡혀 있다고 본 그는 그 자연적 충동은 근절될 수 없고 오로지 덜 해로운 출구로 흘러들어갈 뿐이라고 보았다. 나치가 전쟁을 준비하고 있을 때 쓴 《권력》(1938년)에서 그는 홉스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무한한 욕망 중에서도 최고가 권력과 영광이라고 하고 따라서 도덕성은 ‘아나키적 자기주장’을 억제하기 위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1943년 자신의 입장을 ‘상대적, 정치적 평화주의’라고 불렀던 러셀은 나치 독일과의 전쟁을 지지했지만, 그 경험은 인간의 가능성에 대해 더 비관적으로 만들었다. 전후에 그는 심지어 미국이 핵무기에 대한 국제 협정을 시행하기 위해 소련을 위협하도록 촉구했다. 1948년 판 《자유로 가는 길》의 서문에서 그는 만약 그 책을 다시 쓰게 된다면, “아나키즘에 대해 훨씬 적게 동조할 것”이라고 말했다.(16쪽) 가난한 세계에서, “엄격하게 통제하지 않으면 비참한 빈곤을 막을 수 없을 것이다.” 게다가 독일과 러시아의 전체주의 체제는 그가 ‘독재적 충동을 강제로 억제하지 않을 때’ 인간이 어떤 모습이 될 지에 대하여 ‘더 비관적인 견해’를 갖게 했다.

 

런던에서 일어난 백인위원회의 반핵운동 행진 장면에서의 러셀 부부(1961)
ⓒTony French/wikipedia|CC BY-SA 3.0

러셀의 아나키즘

러셀은 《자유로 가는 길》의 서두에 노자의 “가지려 하지 말고 살아라, 우기려 하지 말고 행하라, 지배하려 하지 말고 발전하라”라는 구절을 실었다. 이는 《도덕경》 51장에 나오는 ‘소유 없는 생산(生而不有)’, ‘자기주장 없는 행동(爲而不恃)’, ‘지배 없는 발전(長而不宰)’을 달리 번역한 것인데, 그것이 그 책에서 러셀이 말하고자 한 아나키즘을 요약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러셀은 노자의 그 말을 1920년에 북경대학에서 1년간 강의한 뒤 1922년에 쓴 《중국 문제》(우리말 번역은 《러셀, 북경에 가다》)에서도 언급하면서, 그것이 ‘소유, 자기주장, 지배’를 추구하는 니체를 대표로 하는 서양인의 가치관과 반대라고 한다. 러셀이 중국을 대표하는 사상으로 공자보다 노자를 언급하면서 노자를 아나키즘으로 이해한 반면, 서양사상을 반아나키즘이라고 보고 니체를 그 대표로 언급한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는 것은 그런 이해가 우리나라에는 전무하기 때문이다. 노자를 중시하는 김용옥 등도 그렇게 말한 적이 없고, 도리어 아나키즘을 무시하는 경향이 강하다.

 
러셀은 《나는 이렇게 믿는다》(1925)에서 노자의 자연사상에 대해 “공감은 가지만 종국에는 동의할 수 없는 사상”이라고 평했으나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1927)에서는 예수의 말이 이미 노자, 석가모니에 의해 벌써 나왔던 사상임을 강조했다. 그리고 《서양철학사》에서 서양철학을 자율적 철학과 타율적 철학으로 나누어 고찰하면서 전자의 대표가 아나키즘적 경향인데 반해 플라톤에서 니체에 이르는 서양의 주류철학이 후자의 경향이라고 보았다.  
러셀은 《자유로 가는 길》에서 아나키즘을 모든 종류의 강제적 정부에 반대하는 이론으로 정의하고, 아나키즘 신조의 최고선인 자유는 공동체가 개인에게 가하는 모든 강제적 통제를 폐지하는 직접적인 길에 의해 확보된다고 하며 장자를 인용한다. 그리고 바쿠닌을 중심으로 아나키즘에 대해 설명하는데 특별한 내용은 없다. 그리고 아나키즘이 사회가 지속적으로 가까워져야하는 궁극적인 이상이어야 하고, 아나키즘이 과학과 예술, 인간관계 및 삶의 기쁨에 특히 강하지만 당분간은 그런 이상의 실현이 불가능하다고 본다.

 
그 책 앞에 쓴 《사회재건의 원리》(1916)에서 러셀은 국가와 사유재산이 현대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두 제도라는 점을 인정하고, 국가의 강력한 권력이 유해하고 불필요하지만, 인간관계에서 폭력을 법으로 대체하는 데에는 여전히 유용하다고 보았다. “법에 앞서는 원시적 아나키는 법보다 더 나쁘다. 국가는 또한 의무교육과 위생 조치를 보장하고 경제 정의를 감소시키는 데 긍정적인 역할을 한다.” 《자유로 가는 길》에서도 공동체에 의한 약간의 강압은 법의 형태로 불가피하고 국가는 특정의 제한된 목적을 위해 필요한 제도라고 본다. 정부가 없다면 강자는 약자를 억압할 뿐이라는 점에서 그는 모든 이데올로기 중에서 길드 사회주의에 찬성하지만 “개인의 자유로운 성장은 세계를 재편성하는 정치 체제의 최고 목적”이 되어야 한다는 믿음은 평생 버리지 않았다. 그래서 그 책이 발표되자, 크로포트킨 등이 창간한 아나키즘 저널인 <프리덤>은 ‘건설적인 제안에서 아나키즘과 매우 유사한 성향’을 보여주었다고 평했다.

 
1949년에 《권위와 개인》으로 출판된 그의 리스(Reith) 강의에서 러셀은 인간의 본성이 수세기에 걸쳐 크게 변하지 않았고 우리는 본능적으로 인간을 친구와 적으로 나누어 하나와 협력하고 다른 하나와 경쟁한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그는 ‘안전, 정의 및 보전’을 주된 목표로 하는 정부가 필요하다고 본다. 러셀은 1958년에 만들어진 핵무장반대운동(CND)의 총재로 활동했으나 매너리즘에 빠진 운동 및 의장들과 의견이 맞지 않아 시민불복종운동을 제창하며 1960년에 백인위원회(Committee of 100)를 결성하여 아나키스트들과 다시 연대했다. 합법적인 설득이 효과가 없었기 때문에 베테랑 반체제 인사는 이제 비폭력적인 직접행동과 대규모 시민 불복종을 다시금 요구했다. 

인간의 통제할 수 없는 본질에 대한 아나키스트들의 이별 방식에도 불구하고, 러셀의 글은 근본적으로 아나키즘적이었다. 그는 평생 동안 사상의 자유를 확고히 옹호하는 인물로 남았다. “사상은 파괴적이고 혁명적이며 끔찍하다. 사상은 특권과 기성 제도, 그리고 편안한 습관에 무자비하다. 사상은 아나키하고 무법적이며 권위에 무관심하고 시대의 잘 시도된 지혜에 부주의하다. 사상은 지옥의 구덩이를 들여다보고 두려워하지 않는다. 사상은 위대하고 신속하며 자유롭고 세상의 빛이며, 인간의 최고 영광이다.”

 

스톡홀롬의 러셀 법정(Russell tribunal)에서 네이팜 탄에 의해 피해를 입은 8살 어린이(Do van ngoc)의 증언 과정(1967)

평가와 영향

러셀의 자유로운 사고는 《회의적 에세이》(1928)와 《왜 나는 기독교인이 아닌가》(1957)와 같은 저술뿐만 아니라, 여성의 해방을 요구하고 건강한 성생활의 가치를 증진시킨 《결혼과 도덕》(1929)에서도 뚜렷하게 나타났다. 러셀은 열린 성교육과 피임에 대한 광범위한 접근을 옹호하고 동성애를 지지한 최초의 지식인 중 한 명이었다. 그는 아동의 개성을 철저히 존중하는 교육에 대해서도 폭넓게 썼다. 그의 《행복의 정복》(1930)은 크로포트킨의 《빵의 정복》이라는 제목과 내용 중 일부를 연상시킨다. 그는 경이로운 에세이 《행복의 찬양》(1932)에서 개신교 윤리를 거부하고 행복으로 가는 길은 ‘일의 조직적 축소’에 있다고 주장했다.

마찬가지로 ‘무용한’ 지식에 대한 그의 축하는 고드윈 이래 여가와 자유로운 탐구의 가치에 대해 많은 아나키스트들의 사상을 반영한다. 러셀의 글은 여러 언어로 엄청나게 번역되었다. 그들은 더 큰 개인적이고 사회적인 자유와 인간성의 즐거운 개화를 요구하는 독자들의 세대에 큰 해방적 영향을 주었다. 정치권에서도 정부의 필요악은 최소한으로 유지해야 하며 개성과 개인적 주도권, 그리고 자발적 조직이 번창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공인으로서 그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신념을 당당하게 주장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비록 그 대가가 감옥에 갈 것이라는 것을 의미하더라도 말이다. 그의 마지막 캠페인 중 하나는 베트남 전쟁범죄를 종식시키는 것이었다(Russell Tribunal, 1966). 20세기에 걸쳐있는 그의 다양한 삶은 최고의 삶이 ‘창의적인 충동 위에 가장 많이 지어지고 소유에 대한 사랑에 의해 가장 영감을 얻은 것’이라는 그의 격언을 예시했다. 그러나 러셀은 처음부터 평화주의자이지는 않았다. 원래 자유주의적 제국주의자였으나 1901년에 제2차 보어 전쟁 이후 반문명적이라는 이유에서 제국주의에 반대하고 평화주의를 옹호했다. 그러나 같은 논리로 더 진보된 문명을 가진 쪽이 그 땅을 더 잘 사용할 수 있다면 정복은 정당하다는 이유에서 식민지 전쟁을 옹호한 점에서는 한계가 있었다.

 
마지막으로 《촘스키, 러셀을 말하다》의 서문에 나오는, 촘스키 친구가 만난 오키나와 농민 집의 벽에 적힌 다음 글귀를 보자. “어느 길이 올바른 길인가? 어느 길이 정당한 길인가? 공자, 부처, 예수 그리스도, 간디, 버트런드 러셀의 길이 옳은가? 아니면 알렉산더 대왕, 칭기즈칸, 히틀러, 무솔리니, 나폴레옹, 도조, 존슨 대통령의 길이 옳은 길인가?”  

박홍규 영남대 법학과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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