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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와 함께 발전해 온 과학의 역사, 지금까지 걸어온 길과 앞으로 걸어갈 길을 제시하다
인류와 함께 발전해 온 과학의 역사, 지금까지 걸어온 길과 앞으로 걸어갈 길을 제시하다
  • 이혜인
  • 승인 2020.03.09 14:5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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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 문명과 함께 보는 과학의 역사 | 저자 곽영직 | 세창출판사 | 464쪽

■ 책소개

과학사라니. 어려운 과학에 따분한 역사까지 얹으면 끔찍하게 지루하지 않을까?
저자는 오랜 세월 과학사 강의를 하면서, 과학사가 과학의 테두리 안에서만 논의되어서는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과학사 역시 인류 역사의 일부분이며, 예술, 문화, 철학의 발전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그렇게 『인류 문명과 함께 보는 과학의 역사』가 세상에 나왔다.

이 책은 인류 문명이 우주의 역사에서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문명의 바다 속에서 과학이 어떻게 발전해 왔는지 시대별로 조명하였다. 인류 문명의 변화가 과학이라는 학문에 영향을 주기도 했고, 과학의 발전이 인류 문명의 운명을 바꾸기도 했다. 우리는 이 책을 통해 인류 문명 속에서 과학이 걸어온 발자취와 앞으로 걸어갈 길을 한눈에 볼 수 있을 것이다.

 

■ 편집자의 말

신을 만나기 위해 숫자를 연구하다
술을 통해 신을 만나려고 했던 디오니소스교 신도들의 풍습을 이어받아, 피타고라스학파는 숫자에 대한 연구를 통해 신의 세계에 다가가려고 했다. 그들은 세상을 이루는 근본적인 물질이자, 근본 원리인 ‘아르케’를 자연수로 보았다. 신들의 힘인 ‘아르케’의 비밀을 파헤치기 위해 자연수를 연구하던 그들은, 완전수, 비례와 평균, 피타고라스의 정리 등을 발견해 수학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현대의 종교와 과학은 서로 대척점에 서 있지만, 고대에는 오히려 종교적 열망이 과학의 발전을 가져온 것이다.

유럽의 천문학은 아랍인이 발전시켰다
프톨레마이오스의 지구중심설은 행성의 운동을 정확하게 설명했으며, 이를 통해 태양과 달, 여러 행성들의 위치를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게 도와준 중요한 이론이었다. 그러나 로마가 기독교를 국교로 삼으면서, 그리스 문화가 배척당하기 시작했고 지구중심설도 함께 사라졌다. 유럽에서 자취를 감춘 지구중심설이 다시 등장한 곳은 다름 아닌 아랍이었다. 아바스 왕조의 칼리프 ‘알 마문’의 학자들이 학술서 번역을 하고 있었고, 이 가운데 프톨레마이오스의 지구중심설이 『알마게스트』라는 이름으로 번역되었다. 아랍인들은 이 책이 하늘의 비밀을 탐구하는 위대한 책이라고 여겼다. 『알마게스트』는 지속적으로 번역되다가 10세기 이후 다시 유럽으로 흘러들어가, 16세기까지 유럽 천문학의 체계를 닦는 소중한 기반이 되었다.

흑사병이 미적분법을 밝혀내다
뉴턴은 1665년에 케임브리지 대학의 학사학위를 받고 본격적으로 자신의 능력을 펼치려고 했으나, 그해 여름 영국에 흑사병이 돌기 시작했다. 뉴턴은 대학이 문을 닫은 2년 동안 고향으로 돌아가 있었다. 그런데 뉴턴은 그곳에서 휴양을 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그곳에서 미적분법과 만유인력의 기본 아이디어를 모두 정리했으며, 훗날 뉴턴역학이라고 불리는 역학의 핵심 이론에 대한 구상을 마쳤다. 흑사병을 피해 고향으로 내려가 있던 기간이 그에게는 집중과 사색의 시간이 되었고, 라이프니츠보다 먼저 미적분법의 아이디어를 정립할 수 있었던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서양사의 재앙이었던 흑사병이, 과학사에서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인류와 함께 발전해 온 과학의 역사
지금까지 걸어온 길과 앞으로 걸어갈 길
과학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수많은 역사적 사건 속에서 함께 발전해 왔다. 또한 문화, 예술, 철학을 비롯한 여러 학문과 밀접하게 소통하며 다양한 방식으로 발전해 왔다.
인류 문명은 이제 기술혁신과 세계화로 그 어느 때보다 빠른 전환기를 맞이하고 있다. 과거에는 여러 부분으로 나뉘어 있던 학문이 한데 뒤엉켜 거대한 지식이 되어 가고 있다. 미래 사회에 가장 필요한 지식인 과학. 앞으로 더 빠르고 역동적으로 변해 갈 우리 사회와 과학의 발전을 예측하기 위해서는 과학이 걸어온 역사를 알아야 한다.
역사는 과거의 유물이 아니라, 지금도 살아 숨쉬는 생물이다. 우리는 이 책이 보여 주는 과학의 역사를 통해 앞으로 우리가 걸어갈 길을 내다볼 수 있을 것이다.


책 속에서

p.47 데모크리토스는 물질뿐만 아니라 영혼도 원자로 이루어져 있다고 했다. 구형의 원자인 영혼은 다른 것을 움직이는 일종의 불로, 신체의 구석구석까지 스며들 수 있다고 했다. 그는 맛이나 색깔은 그 자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 원자의 조합에 의해 나타나는 성질일 뿐이라고 했다.

p.66 고대인들이 아리스타르코스의 태양중심설을 받아들이지 못했던 것은 당시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역학으로는 태양이 우주의 중심이라는 것을 설명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p.117 개신교에서는 종교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과학을 사용할 것을 권장했다. 특히 칼뱅은 과학 활동을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해야 할 선한 일에 포함시켰고, 그 결과 많은 사람들이 과학 탐구에 나설 수 있었다.

p.127 파라켈수스는 또한 다양한 광물질을 합성하여 만든 약품으로 페스트를 지료하려고 시도했으며, 체내에 축적된 납이 종양을 발생시킨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파라켈수스의 명성이 높아지자 그를 비난하는 사람들도 늘어났다. 그들은 파라켈수스가 마술의 힘을 빌려 질병을 치료하려 한다고 비난했다. … 파라켈수스는 연금술이나 신비주의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사람이었지만 질병에 대한 새로운 개념을 확립하는 데 공헌했으며, 의학과 화학의 기초를 마련하는 데도 크게 기여했다.

p.166 천문학자들에 의해 태양중심설이 널리 받아들여지자 교회의 태도에도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지식인들이 사실로 간주하는 것을 계속해서 교회가 부정할 경우 자신들이 오히려 어리석게 보일 것이라는 점을 깨닫기 시작했다. … 교회는 이제 더 이상 과학에 간섭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 18세기에 과학자들이 자유롭게 자연과학을 연구할 수 있었던 것은 교회의 이런 변화된 태도 때문이었다.

p.223 레이던병의 발명으로 훨씬 더 많은 전기실험이 가능해졌다. 그러자 많은 유랑 전기학자들이 나타났다. 그들은 전기 발생 장치로 발생시킨 전기를 레이던병에 담아 가지고 다니면서 길거리에서 사람들을 상대로 전기 쇼를 보여 주고 돈을 받는 사람들이었다. … 이로써 많은 사람들이 전기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지만, 아직 전기는 실용적인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신비한 것일 뿐이었다.

p.227 볼타 전지는 아연판과 구리판을 버갈아 쌓고 판 사이에 소금물에 적신 천을 끼워 넣은 것이었다. … 1801년에는 파리로 가서 당시 제1통령으로 있던 나폴레옹 앞에서 볼타 전지를 발명하게 된 실험들을 재현하고, 볼타 전지를 이용하여 물을 분해하는 실험을 하기도 했다. 이 실험으로 그는 많은 상금과 훈장을 받았고, 1810년에는 나폴레옹 황제로부터 백작의 작위까지 받았다.

p.266 산업혁명으로 인해 과학기술의 위상이 이전과 크게 달라졌다. … 산업혁명 이후 과학이론을 바탕으로 하는 새로운 기술의 중요성이 대두되면서 과학과 기술이 현학적인 학문에서 실용적인 학문으로 바뀌게 되었다. 과학지식이 세상을 바꾸는 원동력으로 부상하기 시작한 것이다.

p.303 빛을 전파시키는 에테르라는 매질을 찾아내기 위한 마이컬슨과 몰리의 실험은 실패로 끝났지만, 그것은 결과적으로 에테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한 실험이 되었다. 그들의 실패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성공으로 바뀌었다. 이 실패한 실험으로 인해 마이컬슨은 1907년 노벨상을 수상한 최초의 미국인이 되었다.

p.344 지구상에서 생산하는 식량으로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의 수는 약 40억 명 정도이다. 20세기 초에 독일의 프리츠 하버가 화학 반응을 통해 질소를 고정하는 방법을 알아냈다. 이로 인해 지구상에서 생산할 수 있는 식량의 양이 대폭 증가했고, 따라서 20세기 말 지구는 70억 명에 달하는 인구를 지탱할 수 있게 되었다.

p.443~444 포퍼에 따르면 비판적 연구 태도는 과학적 연구 방법의 가장 큰 특징이다. 비판적인 태도를 견지하는 과학자는 모든 편견으로부터 자유롭게 경험적 사실과 그로부터 연역될 수 있는 논리적 추론을 통해 과학 연구를 수행한다. … 포퍼는 과학철학뿐만 아니라 정치철학 분야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포퍼는 전체주의와 역사주의를 비판하고 사회를 구성하는 개개인의 자발적 선택을 바탕으로 한 ‘열린 사회’가 바람직한 사회라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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