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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급제언 학술 출판 살리기] 코로나19 사태와 대학 교재의 저작권
[긴급제언 학술 출판 살리기] 코로나19 사태와 대학 교재의 저작권
  • 교수신문
  • 승인 2020.03.06 1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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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의 원격 강의 실행으로
학술 출판사 줄도산 위기
이용희 대한출판문화협회 연구위원
이용희 대한출판문화협회 연구위원

코로나19 사태로 인해 전국 대부분의 대학들은 개강 일정을 늦추고 한시적으로 원격 강의 등의 재택 수업을 실시하기로 결정했다. 그 덕분에 각 대학의 많은 강사와 교수들은 익숙지 않은 강의 동영상 제작에 안간힘을 쏟고 있다. 최근 교육부가 코로나 사태가 안정될 때까지 재택 수업을 실시하라는 방침을 내놓음에 따라 대학은 최소 2주 이상 온라인 교육을 실시하게 될 예정이다.

이 같은 전국 대학의 대규모 원격 강의 시행은 그야말로 전례가 없는 사건이다. 그만큼 큰 혼란이 예상된다. 온라인 강의 시스템의 구축·보강, 수강 방법과 관리, 수강 인정 기준 마련 등 원활한 학사 운영을 위해 넘어야 할 산이 한둘이 아니다. 그나마 온라인 강의 시스템을 어느 정도 갖춘 대학들은 급하게 동영상 강의 제작 매뉴얼을 만들어 교강사들에게 배포하고 있다. 동영상 강의 경험이 없는 교강사들은 그 매뉴얼을 읽고 더듬더듬 원격 강의를 배워가고 있는 중이다.

이번 사태를 계기로 각 대학에서는 온라인 강의 관련 매뉴얼, 공지사항, 보도자료 등을 내놓았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문건들 가운데 올바른 교재 이용과 저작권 문제에 대해 언급한 대학은 어디에도 없었다. 각 대학들이 내놓은 자료는 대부분 동영상 제작과 학습관리시스템 사용법 같은 기초 정보로만 채워져 있다. 현재 학교당 수천 개의 동영상 강의가 만들어지고 있고, 상당수의 대학 도서관들이 휴관 내지는 단축 운영에 들어간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교육부나 저작권 유관 기관인 한국저작권위원회에서도 원격 수업과 관련된 저작권 보호 지침을 전혀 내놓지 않고 있다.

주지하듯 대학가에서 횡행하는 교재 및 학술 출판물 관련 저작권 침해는 어제오늘의 병폐가 아니다. 여기에는 저작권법의 맹점을 비롯한 여러 문제들이 걸려 있다. 현행 저작권법 제25조에 따르면, 교육기관은 수업 목적상 필요하다고 인정되는 경우에 공표된 저작물의 ‘일부분’을 복제·배포·공연·전시 또는 공중송신할 수 있다. 공표된 저작물의 인용과 관련해서도 “정당한 범위 안에서 공정한 관행에 합치하게”(동법 제28조)만 하면 된다는 규정이 전부다. 다시 말해서 저작물의 이용 범위나 분량, 비중 등에 대한 구체적이고 정량적인 기준이 마련되어 있지 않은 것이다.

저작권법의 사정이 이러하다면, 현장에서 활용되는 지침이라도 명확해야 한다. 그런데 2015년 정부 부처와 저작권 관련 민간 단체들이 협의해서 만든 수업목적 저작물 이용 가이드라인에는 “어문저작물 전체의 10%를 초과하는” 복제·배포·공연·전시 또는 공중송신의 경우 저작권자로부터 사전 이용 허락을 받도록 규정하고 있다. 학술서적이나 대학교재의 내용을 요약하여 PPT 형태의 교안을 만들어 사용하는 것도 “일부분의 이용”과 “필요한 최소한의 범위” 같은 모호한 표현으로만 한정했다. 이는 미국 저작권청이 ‘책과 정기간행물의 수업목적을 위한 복제 관련 지침’을 마련해 수업에서 활용되는 저작물의 복제 범위와 분량을 상세하게 정해놓은 것과 대비된다. 한국의 저작권법과 관련 가이드라인도 저작자와 출판사의 권리를 실질적으로 보호할 수 있도록 개정하는 것이 시급하다.

저작권에 대한 낮은 인식 수준과 저작권법의 허술한 ‘구멍’으로 인해 한국의 학술 출판은 심각한 위기이다. 2019년 저작권 보호 연차보고서에 따르면, 우리나라 출판 불법복제물 시장 규모가 약 1,600억 원에 이른다. 이 가운데 학습 교재(약 382억 원), 학술서적(약 816억 원), 대학 외부 복사기를 통한 불법복사물(약 401억 원)의 비중이 거의 99%에 달한다. 저작권법의 성긴 감시망을 뚫고 엄청난 양의 출판물 불법복제가 일상적으로 벌어진다. 그에 따라 학습 교재 및 학술서적 출판사와 해당 저작권자들은 속수무책으로 피해를 입고 있다. 만약 이러한 저작권 침해 실태가 현하의 대학 동영상 강의에서도 반복·확산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이제 곧 개강이 되면, 대학교재로 사용되는 학술 출판물의 내용은 동영상 강의를 통해 PPT 자료나 각종 강의안의 형태로 학생들에게 제공될 예정이다. 저작권에 대한 인식이 낮은 일부 교강사들과 학생들은 몇 주간의 동영상 강의에서 ‘정당한 범위’를 넘어 무분별하게 학술출판물을 활용할 가능성이 있다. PPT 자료가 교재를 대체하거나 저작권을 침해하는 사례는 이미 예전부터 오프라인 강의나 온라인 공개 강좌에서도 만연해 왔으니 무리한 추측은 아닐 듯하다.

이번 전국 대학의 대규모 동영상 강의 시행을 계기로 저작권에 대한 인식과 관행을 혁신하고 준법 교육을 강화할 방안을 강구해야 한다. 교육부나 저작권 유관 기관에서는 당장 대학 동영상 강의에서 지켜야 할 구체적인 저작권 보호 지침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 수업 목적 저작물의 공정한 이용을 촉구하고, 각 대학이 교강사와 학생들을 대상으로 충분한 저작권 교육을 실시하게 해야 한다. 저자들의 저술 의욕을 저하시키고 학술 출판사의 도산을 야기하는 저작권 침해의 확산을 더 이상 방관할 수는 없다. 이번 기회에 저작권에 대한 인식과 관행을 바꾸는 노력이 시작되어야 한다. 그래야 대학가의 고질적인 불법복제 행태를 근절하고 저작권법과 관련 제도를 정비하여 저자, 출판계, 대학이 상생하는 건강한 생태계를 키울 수 있다.

이용희 대한출판문화협회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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