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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학자 김현경의 책] 자동화 시대의 자본, 노동, 권력
[인류학자 김현경의 책] 자동화 시대의 자본, 노동, 권력
  • 교수신문
  • 승인 2020.03.06 1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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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평준화’에서 ‘대반전’으로의 이행은
피케티의 ‘21세기 자본’을 비롯해서
최근에 많은 저서에서 다루고 있는 주제다.

테크놀로지의 덫 | 저자 칼 베네딕트 프레이 | 역자 조미현 | 에코리브르 | 원제The Technology Trap | 624쪽

칼 프레이는 4차 산업혁명에 대한 논의에서 약방의 감초처럼 등장하는 이름이다. 그는 마이클 오스본과 같이 쓴 논문 “고용의 미래”(2013)에서 미국의 일자리의 47%가 로봇에 의해 대체될 위험이 있다는 유명한 주장을 폈다. 물론 ‘대체될 위험이 있다’는 것이 반드시 그렇게 된다는 뜻은 아니다. 일자리가 없어지기만 하고 새로 생기지는 않아서 문자 그대로 고용이 반토막 난다는 의미도 아니다. 하지만 47%라는 숫자에 형광펜이 쳐진 채, 그의 주장은 기정사실처럼 인용되고 또 인용되었다. <테크놀로지의 덫>은 바로 그 칼 프레이의 최신작 Technology Trap(2019)의 번역이다. 나오자마자 판권을 사서 번역한 것을 보면 출판사 측에서도 어느 정도 기대를 했던 게 아닐까? 그런데 어쩐 일인지 이 책은 변변한 주목을 받지 못하고 서점 구석으로 밀려나 있다. 

이 책이 제목에서 연상되는 것과는 꽤 다른 내용을 담고 있다는 점을 말해두기로 하자. 우선 이 책은 ‘4차 산업혁명’에 대한 것이 아니다. 이 책 전체에 걸쳐 ‘4차 산업혁명’이라는 단어는 한번도 나오지 않는다. 수십 페이지에 달하는 참고문헌 목록에도 클라우스 슈밥의 베스트셀러는 빠져 있다. 다음으로 이 책의 원제인 ‘테크놀로지 트랩’은 ‘테크놀로지가 만드는 덫’이 아니라, ‘테크놀로지가 빠지게 되는 덫’을 말한다. 어째서 러다이트 운동 같은, 테크놀로지의 발전에 반대하는 흐름이 생기는가? 이것이 이 책의 질문이다. 다시 말해서 이 책은 기본적으로 기술발전을 지지하는 관점에 서 있다. 마지막으로 프레이는 그의 논문을 인용하는(더 정확히 말하면 논문을 읽지 않고 47%라는 숫자만 인용하는) 국내의 여러 논자들과 달리, “대량실업의 시대에 대비해서 기본소득 제도를 도입해야 한다”거나 “아이들에게 로봇이 할 수 없는 일을 가르쳐야 하므로 전통적인 교육은 쓸모가 없어졌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그는 기본소득보다는 근로소득세액공제가 더 좋은 제도라고 본다. 그리고 자동화는 주로 저학력 노동자들이 종사하는 저임금 일자리를 없애므로, 학력의 중요성이 더욱 커질 거라고 말한다. “지난 30년간 새로 만들어진 일자리 중에서 대학을 졸업하지 않은 사람을 위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 

그러므로 자동화와 고용의 미래에 관심이 있는 사람은 이 책을 읽어야 한다. 두께 때문에 망설일 필요는 없다. 아주 재미있는 책이기 때문이다. 프레이는 에디슨이 전구를 발명하면서 점등원들이 직업을 잃게 되는 이야기로 시작한다. 1900년 초 뉴욕 맨해튼에는 2만5천여개의 가스등이 있었고 600명의 점등원이 사다리와 횃불을 가지고 다니면서 그것을 관리했다. 전기가로등의 등장은 처음에는 점등원의 업무를 쉽게 해주었다. 횃불을 가지고 다니지 않고 스위치를 올리기만 하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술의 역사에서 단순화는 자동화의 첫걸음에 지나지 않을 때가 많다. 전기 가로등이 점점 더 변전소의 제어를 받으면서 점등원들은 대폭 감원된다. 그들은 해고에 맞서서 시위를 벌였지만, 거대한 변화의 흐름을 막을 수 없었다. 

그런데 테크놀로지의 발전이 언제나 실업을 가져오는 것은 아니다. 반대로 새로운 직업들을 많이 만들어내기도 한다. 타이프라이터의 발명이 타이피스트라는 직업을 만들어내어 수많은 여성에게 경제적 자립의 기회를 준 것이 그 예다. 2차 산업혁명이라고 불리는 20세기 초의 기술발전 전체는 일자리를 없애기보다는 늘렸다. 국가는 교육과 복지를 통해 노동자의 적응을 돕고 실직자의 개인비용을 최소화했다. 대략 1970년대말까지 이어지는 이 시기를 프레이는 ‘대평준화’ 시기라고 부른다. 역사적으로 어느 때보다 평등한 시기였기 때문이다. 엥겔스가 목격했던 산업화 초기의 참상은 영원히 지나가버린 것처럼 보였다. 노동자들이 집과 자동차와 가전제품을 사들이는 것을 보고 경제학자 사이먼 쿠즈네츠는 산업화 경로를 따라가면 자동적으로 불평등이 완화된다는 가설을 제시했다. 

그러나 1980년대가 되자 ‘대반전’의 시기가 도래한다. 컴퓨터가 공장과 사무실에 광범위하게 도입되면서(컴퓨터의 가격 하락이 이를 촉진했다), 제조업 일자리를 비롯한 중간소득 일자리가 줄어들고 대졸자와 고졸 이하 노동자의 소득 격차가 점점 커지기 시작한 것이다. “자동화 시대는 20세기 기계화의 연장이 아니다. 반대로 그것의 완벽한 반전이었다. 로봇과 그밖의 컴퓨터 제어계기는 정확히 기계화가 창출한 공장 및 사무실의 중간소득 일자리를 잘라냈다.” 프레이는 앞으로도 이런 추세가 계속되리라고 본다. 인공지능 기술을 비롯한 새로운 테크놀로지는 일자리를 만들기도 하겠지만 그 이상으로 없앨 것이다. 

‘대평준화’에서 ‘대반전’으로의 이행은 피케티의 <21세기 자본>을 비롯해서, 최근에 많은 저서에서 다루고 있는 주제다. 이 책은 동일한 주제를 다루면서 테크놀로지에 초점을 맞추고 있으니, 균형을 잡는다는 의미에서라도 한번 읽어볼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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