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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홍규의 아나키스트 열전18 - 윌리엄 모리스
박홍규의 아나키스트 열전18 - 윌리엄 모리스
  • 교수신문
  • 승인 2020.02.23 1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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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지의 제왕》과 모리스

윌리엄 모리스

21세기에 접어들면서 9.11이라는 사태로 인해 미국의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 침략이 시작됨과 동시에 J. R. R. 톨킨(J. R. R. Tolkien, 1892-1973)의 《반지의 제왕》이 범세계적으로 인기를 끌었다. 1999년 영국에서는 그 책이 20세기 최고의 걸작으로 평가되었다. 우리가 아는 《1984년》이나 《율리시즈》보다 더욱 위대한 최고 걸작으로 평가된 것이다. 그런데 흔히 재미있는 환상문학으로 읽히는 그 책이 윌리엄 모리스의 영향을 받은 것임은 제대로 알려져 있지 않다. 톨킨 자신 바로 모리스의 제자인 아나키스트임을 자랑했고, 그의《반지의 제왕》은 바로 모리스 아나키즘의 세계였다. 《반지의 제왕》이 그려내는 착한 주인공들의 이상사회는 지배계급이 없는 아나키한 사회이자 우리가 잃어버린 자연적인 사회라는 점에서 모리스가 발굴한 고대 신화의 세계이자 그가 찬양한 중세사회이며 모리스가 꿈꾼 에코토피아였다. 나는 우리에게 코미디로도 소개된 골룸이나 사우론을 비롯한 권력욕에 젖은 제국주의 침략에 전율하면서 다시 모리스와 톨킨을 읽으며 21세기를 맞아 더욱 비통해진 마음을 달랬다.

21세기 벽두에 터진 9.11을 둘러싼 전쟁을 하버드대학의 헌팅턴(Samuel Huntington, 1927~2008)은 ‘문명의 충돌’이라고 했지만 도리어 파리8대학의 아쉬카(Gilbert Ashcar)가 말했듯이 ‘야만의 충돌’로 보는 것이 옳으리라. 그리고 우리는 그런 ‘야만의 절망’을 긍정할 것이 아니라 ‘문명의 희망’으로 전환해야 하리라. 여기서 19세기라는 제국주의 시대에 그 제국주의에 유일무이하게 반대한 지식인 모리스를 다시 찾게 된다. 또한 인간의 생명과 생활의 질의 향상에 봉사해야 하는 예술적 가치를 주장한 모리스의 사상을 다시 절감한다. 

물론 모리스가 반대한 것은 19세기 영국의 산업자본주의 체제였고 대영제국주의 체제였다. 산업혁명을 역사적 기초로 삼은 그것은 대량생산의 추구에 의한 부의 획득을 최고의 가치로 삼았다. 그리고 그것은 대량채취, 대량생산, 대량소비, 대량폐기라는 20세기 미국을 위시한 세계의 이데올로기가 되었다. 그것은 자국은 물론 전 세계를 식민지로 삼아 자연환경과 자연자원을 가혹하게 파괴하고, 체제 밖 사람들, 특히 식민지 사람들을 대량으로 살상하는 무자비한 ‘군-산-학(軍-産-學) 복합체’였다. 따라서 9.11 전후의 전쟁은 우연이 아니라 그러한 19~20세기 체제가 낳은 필연이었다. 

사실 19세기 자본주의에 대항해 생긴 사회주의 역시 1920년대 이후 변한 스탈린주의로 1991년 구소련 해체까지 사실상 그런 산업자본주의와 제국주의 체제의 변형에 불과하다. 이상적인 사회주의라면 당연히 가졌어야 할 민주주의적인 자유나 자치도 없는, 무엇보다도 자연에 대한 중시도 없는, 천리마란 말로 상징되는 생산성 달성 지상주의에 불과한 것이었다. 

모리스가 디자인한 켈름스콧프레스 트레이드마크
모리스가 디자인한 켈름스콧프레스 트레이드마크

20세기말에 그러한 이름뿐인 사회주의는 끝났다. 21세기에는 19세기를 더욱 상회하는 치열한 경쟁 지상주의인 신자유주의로 인해 삶과 세상이 예술은커녕 비예술적인 상품만이 지구 규모의 시장을 석권하고 있다. 그나마 20세기말 한 때 유행한 지구환경 보호운동조차 망각되고, 전쟁이라는 가장 극단적인 지구환경 파괴현상이 자행되고 있다. 

이제 우리가 스탈린주의와 신자유주의라는 속박으로부터 해방되어야 한다면, 모리스를 다시 참조할 필요가 있다. 모리스와 톨킨이 꿈꾼 사회는 그들이 언제나 그렇게 살았듯이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모두가 자유롭고 평등한 이웃과 정을 나누며 자신의 사회에서 스스로 결정하는 자치를 누리고 소박하게 사는 것이다. 그 소박함은 자가용이 아니라 자전거를 타고, 사치가 아니라 검소한, 그러면서도 아름다운 집과 가구, 음식과 옷을 향유하는 멋있는 삶이다. 

나는 노동자가 톨스토이를 읽고 베토벤을 들으며 반 고흐를 감상하면서 스스로도 글을 쓰고 음악을 만들며 그림을 그리는 세상을 꿈꾼다. 톨스토이나 베토벤이나 반 고흐는 모두 노동자들을 위해 그들의 예술을 창조했고 그 자신들도 노동자로서 살았다. 나는 나아가 노동자 스스로 자신의 집을 짓고 가구도 만들 수 있으며 옷과 음식도 즐겁게 짓기를 희망한다. 나는 그러한 삶과 세상을 만드는 것을 모리스가 추구한 사회주의이자 유토피아라고 본다,

삶을 예술처럼, 세상을 예술처럼
1998년에 내가 낸 《윌리엄 모리스의 생애와 사상》은 모리스에 대한 한국 최초의 책이었다. 이 책 뒤로 그에 대한 논의나 번역이 이어지기를 바랐지만 그렇지 않았다. 그래서 모리스의 《News from Nowhere》을 2004년에 《에코토피아 뉴스》로 번역했다. 모리스의 유토피아가 생태를 중시한 점에 특색이 있다고 보아 그런 제목으로 번역했으나 말이 많았다. 그래서 당연히 새로운 번역이 나오리라고 기대했으나 아직까지 새 번역은 없다. 옛날 책이니 저작권 문제도 없는데 번역되지 않는 것을 보면 여전히 모리스에 대한 관심은 적은 것 같다. 값비싼 모리스 책의 초판본을 누가 샀느니 그것을 전시하는 박물관이 한국 어디에 생겼느니 하는 이야기도 숱하게 들려왔지만 나는 그런 것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  

《윌리엄 모리스의 생애와 사상》에서 모리스를 “삶을 예술처럼, 세상을 예술처럼 만들기 위해 노력했던 인물”이라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소개했다. 그는 변혁의 이념이 지배하던 19세기 서구 사상사에서 결코 빼놓을 수 없는 독창적인 사회주의 사상가로, 공예와 디자인, 건축 분야에서도 자신만의 독특한 이론을 설파하고 작품을 만든 예술가일 뿐만 아니라 저명한 시인이자 소설가다. 그래서 흔히들 그를 르네상스적 인간이라고 한다. 그는 당대의 다른 사상가들과는 달리 자유로운 노동에 기초한 예술을 통해 우리의 삶과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기 위해 노력했으며,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생태적인 삶을 이상으로 추구했다. 그는 삶의 환경만이 아니라 우리 삶의 모든 것, 예컨대 사랑이나 교육, 노동 같은 일상생활에서부터 정치와 경제, 사회 등 모든 공적 영역에 이르기까지 우리들의 모든 삶을 예술처럼 만들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나아가 인간 사회를 국가나 조직의 강제가 아닌 공동체 단위의 자유로운 자치로 자연스럽게 꾸려나가야 한다고 생각했고,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삶의 간소화와 아름다움과 품위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그가 자본주의에 반대한 것은 그 삶의 천박함 때문이었다. 
 

모리스가 디자인한 트렐리스 벽지(1862)
모리스가 디자인한 트렐리스 벽지(1862)

모리스는 자본의 논리를 추종하는 자본주의는 물론 국가의 엄격한 통제를 받는 경직된 사회주의에도 반발했다. 그 두 가지 모두 반인간적이고 반예술적이며 반자연적이었기에 그는 찬성하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그는 인간의 표현 행위인 자연스러운 생활예술을 꽃피우고,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자치사회를 이룩하기 위해 평생을 싸웠다. 모리스는 자본주의도 사회주의도 아닌 제3의 길, 아름답고 자연스러운 소박한 삶의 길을 모색했던 사상가였다.  

모리스가 살았던 19세기 후반 산업혁명 직후의 영국은 오늘 우리의 현실처럼 추악하기 짝이 없었기에, 그는 개인과 사회와 세계를 아름답고 자연스러우며 간소하게 만들기 위해 근본적인 변혁을 꿈꾸었다. 사실 아름다움과 자연스러움과 간소함을 추구하는 인간적인 삶은 책이나 머릿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아름다움은 소박한 일상생활과 사회 속에 살아 있어야 한다. 마찬가지로 자연스러움은 우리를 둘러싼 환경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과 제도 속에도 있어야 한다, 우리의 삶과 세상은 예술처럼 이름다워야 한다는 것이 바로 모리스의 신념이고 희망이었다. 

그는 평생 쉬지 않고 자신의 신념을 역사 속에서 실현하기 위해 싸웠지만 끝내 희망도, 아름다움도, 사랑도 갖지 못했다. 모리스가 세상을 떠난 지 1세기가 지난 지금도 그가 꿈꾼 것은 실현되지 않았다. 그의 이야기는 정말 공상이자 꿈에 불과했으며, 심지어 그 자신조차 평생 그것을 회의했다. 현재를 사는 우리들 역시 회의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모리스의 문학은 생활문학이며, 그의 예술은 생활예술이며, 그의 사회주의는 생활사회주의이고, 그의 유토피아는 생활유토피아다. 우리나라에도 모리스의 사상을 일부 소개하고 있는 소수의 사람들이 있지만 대부분은 모리스 전체를 보지 못하고 예술 세계 일부만 보는 우를 범하고 있다. 건축과 디자인을 비롯한 모리스의 예술 역시 사회주의라고 하는 ‘삶의 본질에 대한 인간적인 이해’에 근거를 두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는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은 고통의 상징이 되었지만, 노동이 즐거움이 되고 예술 행위가 될 수 있다면 인간의 삶은 보다 아름답고 이상적으로 변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모리스가 예술을 생각하는 기본 철학이며, 그의 생활사회주의로 표현되는 것이다.

모리스의 아나키즘 
현대문명의 추악함과 정서적 억제에 대한 증오로부터 모리스는 아름다운 사물뿐만 아니라 아름다운 사회를 창조하고자 중세의 이상화와 켈트 및 북유럽의 신화 창조에서 자유로운 사회라는 아나키스트 비전을 추구했다. 무엇보다도 노동의 즐거움을 표현하는 것이 예술이라는 것을 러스킨(John Ruskin, 1819~1900)에게 배운 그는 모든 인류가 노동에서 기쁨을 찾을 수 있는 것만이 정당한데 이는 자본주의에서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여 사회주의자가 되었다. 《유용한 노동과 무용한 노역》이라는 에세이에서 그는 정신적 노동과 육체적 노동을 구분하고 노동자를 단순한 기계 공작원으로 축소한 자본주의적 노동 분업을 비판했다. 계약 사회를 계급, 조잡한 공리주의, 대량 생산, 기계 지배, 강제 노동이라는 이유로 거부하면서 즐겁지 않은 노동에 소비된 시간을 최소화하는 적절한 기술과 함께 쾌적하고 자발적인 노동을 옹호했다. 나아가 《미래의 사회》라는 에세이에서 궁극적인 목표를 ‘개인 의지의 자유와 배양’에 두고 기존의 정치 사회를 대신하는 자치 공동체 연합을 주장했다. 그것은 부유나 가난, 재산권, 법이나 합법성, 국적이라는 말의 뜻을 모르는 사회, 즉 통치된다는 의식이 없는 사회다.

모리스가 1889년에 쓴 유토피아 소설 《에코토피아 뉴스》에는 처참한 내전을 겪고서야 자유롭고 계급 없는 사회가 등장한다. 거기에는 조직화된 삶도 없고, 권위주의적인 유토피아에 필수적인 중앙집권적 정부도 없다. 가난한 사람들로부터 부자들을 보호하는 ‘폭정의 기계’인 정부는 평등한 사회에서 쓸모없게 된다. 정부만이 아니라, 사유재산, 법, 범죄, 결혼, 돈 또는 교환도 없다. 사회는 공동체의 연합으로 구성되고 일반 동의에 의해 도달된 일반적인 관습에 의해 관리된다. 의견의 차이가 발생하면 이웃집회가 만나 손을 보여줌으로써 측정되는 일반적인 합의가 있을 때까지 이 문제를 논의한다. 다수는 소수에게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그 의지를 강요하지 않는다. 물론 공동체의 이익과 관련되는 경우에는 다수 의견에 복종해야 한다는 조건이 붙지만 의식주 등의 일상생활에서 개인의 자유는 철저히 보장된다.  

켈름스콧프레스에서 낸 에코토피아뉴스 1893년판
켈름스콧프레스에서 낸 에코토피아뉴스 1893년판

모리스의 이상적인 공동체에서는 모든 인간이 조건의 평등 속에서 살아가며, 한 사람에게 해가 되는 것이 모두에게 해가 되는 것임을 충분히 알고 있다. 그들은 풍요로운 삶을 누리고, 모든 사람을 위한 자유로운 공간이 있다. 공장은 워크숍으로 대체되고 사람들은 일에서 기쁨을 느낀다. 진정한 사용을 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만들어지지 않으며 손으로 하기에 귀찮은 모든 작업은 개선된 기계에 의해 수행된다. 노동의 유일한 보상은 생명과 창조의 보상이다. 

그리하여 행복은 인위적인 강압이 없는 상태에서, 그리고 모든 사람이 최선을 다할 수 있는 자유를 누리면서, 우리가 진정으로 원하는 노동의 생산에 대한 지식과 결합한다. 그들은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단순하면서도 아름다운 삶을 산다. 연어는 돌다리로만 뻗어 있는 템즈 강에서 뛰어논다. 모리스가 묘사한 그림은 고드윈의 자유사회와 매우 흡사하다. 사람들을 판단하는 관습적인 규칙체계가 없고 그들의 마음과 삶을 확장시키거나 비좁게 만드는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가 없다.

모리스의 분권 사회는 크로포트킨이 《들판, 공장, 워크숍》에서 상상한 사회와 매우 유사하다. 그는 또한 카펜터(Edward Carpenter, 1844~1929)가 시골에서 단순하고 공동체적이며 자급자족하는 삶을 살고자 시도한 것에서 영감을 얻었다. 그러나 밀의 의도에 반해 밀로부터 사회주의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듯이, 그는 아나키스트들의 의도에 반해 아나키스트들로부터 아나키즘에 문제가 있음을 알았다고 말했다. 당시의 아나키스트들에 대한 반발은 아나키스트 그룹이 1888년 시카고에서 행해진 헤이마켓 대학살 이후 다수를 확보하면서 사회주의 연맹에서 우두머리가 되어 폭력 행위를 옹호하자 극단에 이르렀다. 1890년대 초 유럽 전역의 테러리스트들의 테러에 반발한 모리스는 강제력의 폐지를 주장하는 아나키즘 원칙에서 학살은 인정될 수 없다고 비판했다. 

그가 아나키즘을 공격할 때, 그는 분명히 슈티르너나 니체와 같은 유형의 아나키즘 개인주의를 염두에 두었다. 1894년 1월 27일, 프랑스 자치 클럽의 한 프랑스인이 그리니치에서 왕립 천문대를 파괴하기 위해 가는 도중에 폭발한 사건에서 모리스는 아나키스트들의 비참한 반란 방법뿐만 아니라 아나키즘이 ‘사회를 부정하고, 인간을 외부에 두기 때문에’ 아나키스트들에게 반대하게 되었다는 것을 분명히 했다.

Morris co의 직물공장의 작업 모습(1880년대, 영국 런던 머턴)
Morris co의 직물공장의 작업 모습(1880년대, 영국 런던 머턴)

모리스 아나키즘의 한계

모리스의 아나키즘에 대해서는 그가 살아 있을 때부터 엥겔스를 비롯한 사회주의자들은 물론 여러 사람들이 비판했고, 그에게 호의적인 사람들도 그의 한계를 지적했다. 좌파의 전형적인 비판은 부르주아적 도피주의라거나 낭만적 아나키스트라는 것이었는데, 그런 비판은 가령 E. P. 톰슨이 모리스에 대한 방대한 저서를 쓰면서 ‘낭만주의자에서 혁명가’로라는 부제를 붙인 것에서도 드러난다. 이는 대체로 모리스가 부르주아 집안 출신이고 50대까지는 예술에만 종사했다는 점을 경멸하는 좌파의 편견에서 나온 것으로 평가할 수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리스의 한계는 분명하게 보인다.  

그러나 내가 모리스의 아나키즘이 20세기 말에 자멸한 공산주의에 대해 새로운 대안 사회주의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온 이유는 다른 아나키스트들의 유토피아와 달리, 모리스의 아나키즘은 유토피아에 이르기 위한 계급투쟁의 불가피성을 인정하면서 사회주의에 이르는 이행과정을 상업적 도덕이 소멸해가는 도덕 비판의 차원에서 상세히 그려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물론 그러한 이행과정의 서술은 상대적으로 그것이 미비했던 아나키즘 전통의 문제점을 극복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고 해도, 그것이 과연 적정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얼마든지 비판이 있을 수 있음을 부정할 수는 없다. 또한 현실사회주의를 경험한 우리로서는 개인의 자유와 개성을 최대한 존중하는 사회주의, 즉 만인의 평등과 함께 만인의 다양성을 존중하는 모리스 사회주의가 과연 가능한지에 대해서도 의문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내가 모리스 아나키즘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유는 그가 예술의 의미를 모든 사람이 향유하고 모든 사회가 추구해야 할 인간 존엄성의 차원에서 새롭게 모색했다는 점이다. 모리스는 당대의 톨스토이에 대해 그다지 호의적이지는 않았지만, 모리스의 예술관은 톨스토이의 예술관과 반드시 모순되는 것이 아니고, 도리어 현대의 공공예술이나 사회예술의 관점과도 통하는 점이 많다고 본다. 삶을 예술처럼, 세상을 예술처럼 만들고자 노력한 모리스는 꿈꾸는 사람이었지만 그 꿈을 무의미하다거나 현실도피라거나 시대착오라고 볼 수는 없다. 《에코토피아 뉴스》나 《존 볼의 꿈》에서 모리스 자신이 묘사하듯이 꿈이라고 해도 우리는 그 꿈을 꾸지 않을 수 없다. ‘내가 본 대로 다른 사람들도 볼 수 있다면 그것은 하나의 꿈이라기보다 오히려 하나의 비전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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