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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백장짜리 레포트에도 학생들이 몰리는 강의
1백장짜리 레포트에도 학생들이 몰리는 강의
  • 최나래
  • 승인 2003.10.08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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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대학 명강의- 김왕배 연세대 교수(사회학)

강의를 하는 교수라면 교수의 말과 행동에 모든 신경세포를 곤두세우는 학생들의 모습을 보고 싶어 한다. 그래서 새로운 교수법을 알아보기도 하고, 선배 교수의 생생한 경험 속에서 도움이 될만한 전략을 찾아보기도 한다. 물론 진정으로 효과가 있는 강의기술인지, '잔기술'에 불과한 것인지 확신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좋은 수업이 무엇인지 학생들의 입을 통해서 확인해보는 건 어떨까. 교육 수요자의 언급이니 가장 정확한 평가가 될 것이다. 이번 호부터 교수신문은 학생의 눈을 빌어 각 대학의 소문난 명강의를 찾아간다.

 

최나래(연세대 4학년, 사회학 전공)

문제의식 콕 찔러...'왕배리언' 일화 유명  

 

▲김왕배 연세대 교수 ©
수강신청 기간이면 김왕배 교수님의 수업에 붙여지는 별명이다. 다양한 주제를 갖고 사회현장에 직접 뛰어들어 느끼고 생각한 것들을 ‘두꺼우면 두꺼울수록 좋은’ 레포트에 충분히 담아내라는 것이 수업의 과제이기 때문이다. 100장으로 대변되는 방대한 레포트에 고개를 젓는 학생들에게 그 이면에 깔려 있는 밀도 있는 경험의 깊이를 들어 수강을 설득하고 싶은 것이 두 학기 동안 강의를 들었던 학생의 진심이다. 사회학과 학생이라면, 아니 대학생이라면, 사회의 깊숙한 곳에서 자신과 사회를 성찰해보는 살아있는 학문의 감동을 맛봐야 하지 않겠느냐고.

대학생이라면, 사회의 깊숙한 곳에서 자신과 사회를 성찰해보는 살아있는 학문의 감동을 맛봐야 하지 않겠는가 

강의는 열정적이며 설득력이 있다. 사회계층이나 노동과 같은 주제가 자칫 이념적 지향에 의해 그 내용이 좌우될 수 있음에 반하여 주제와 관련된 다양한 측면을 조목조목 정리해주는 것은 학문적 이해를 바탕으로 주제에 대한 문제의식과 자기 생각을 정립해나가는 데 훨씬 도움이 됐다. 특히 교수님 스스로의 충분한 이해와 깊이 있는 문제의식에서 나오는 강의는 ‘무엇이 논의돼야 하고 어디로 가야 하는가’ 하는 강의의 기본틀을 살아 있는 것으로 만든다. 강의는 마치 ‘의식의 흐름 기법’을 따르는 것처럼 하나의 주제로부터 관련된 주제로 물 흐르듯 혹은 가지를 쳐가듯 진행된다. ‘다소 산만하다’는 일부 학생의 평가도 있지만 이로써 강의는 마치 하나의 이야기를 듣는 것과 같이 풍성해진다. 강의의 큰 줄기가 있으므로 언제든지 본 맥락으로 돌아올 수 있고 여러 이야기를 아우르는 과정에서 주제와 관련된 다양한 측면은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것이다.

또한 강의에는 일종의 공감대가 형성된다. 수강인원이 많은 탓에 토론이나 질의응답으로 강의가 운영될 수는 없지만, 마치 대화를 하듯 언제나 학생들에게 말을 걸고, 질문을 던지고, 때로는 학생들의 의견을 듣는 과정에서 학생들은 강의에 ‘포함’되어 있음을 절실히 느끼게 되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교수님은 자주 ‘말을 해라’, ‘질문 없어?’라며 학생들이 적극적으로 문제의식을 갖고 강의에 참여하기를 요구하신다. 문제의 영역에 직접 뛰어들어봐야 배우는 것이 있다는 강의시간의 원칙은 나아가 문제의식을 갖고 사회현장에 뛰어들 것을 요구하시는 현장 레포트 과제로 이어지는 것이다.  

강의시간의 원칙은 나아가 문제의식을 갖고 사회현장에 뛰어들어 현장 레포트 과제로 이어지는 것이다.  

사실 처음엔 누구도 엄두를 내지 못한다. 사회계층 강의에서 공장 노동자나 외국인 노동자, 혹은 고졸 사원 등에 대한 소주제를 잡고 이들과의 인터뷰를 계획하면서 느끼는 암담함은 어려움의 시작에 불과하다. 공장의 노조 사무실이나 백화점 지하 직원 쉼터와 같은 낯선 환경에서 사람들을 실제 만나 생활수준, 소비양식, 근무 만족도와 같은 민감한 질문들을 두고 이야기를 해야 하는 것은 두렵기까지 하다. 그러나 이 모든 과정을 통해 이미 사회에는 보이지 않는 그러나 쉽게 만나지지 않는 계층이 존재한다는 것을 실감하고 그 차이가 어떻게 드러나는지를 직접 확인하는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되는 것이다.

두 번째로 듣게 된 산업사회학 강의에서는 우리나라 산업사회 초기의 역사적 자료를 수집하는 과제에 나름대로의 포부를 갖고 적극적으로 임했다. 일제시대에 노동 경험을 가진 할아버지, 할머니를 찾아 서울 곳곳을 다 뒤지는 어려움이 있었지만, 그동안 한번도 들어보지 못했던 살아있는 역사 이야기는 감동적이기까지 했다. 이것은 방대한 양의 레포트로 정리됐고 대학생활 전체를 통틀어 잊을 수 없는 레포트로 남았다. 이것이 ‘100장 레포트’의 이면이고 실재다. 현장으로 떠미는 듯한 요구가 원망스러울 수도 있겠지만, 대학의 문턱을 넘어 사회 속에 들어가고자 하는 작은 용기를 갖는다면 그것은 사회에 대한 깊이 있는 경험에 대한 소중한 안내와 격려가 되는 것이다.

칼 맑스와 막스 베버를 따르는 일군을 학자들을 맑시스트와 베버리언으로 칭하는 것에 대해 언젠가는 ‘왕배리언’이 나타날 것

강의에 매력을 더했던 것은 교수님의 진솔한 인간적 면모와 유머감각이었다. 10여 년에 걸친 강사 생활의 어려움을 솔직히 토로하시며 그동안 가져왔던 문제의식을 공유하는 것으로 교수로서의 첫 수업이었던 사회계층 수업을 시작하셨던 기억이 나다. 연세대학교에서 박사를 마치고 국내대학이 아니라 미국의 시카고 대학으로 처음 초빙된 역설적인 상황, 외국 생활 중에 서양에서 시작된 학문인 사회학에 대해 ‘the West'와 ’the Rest'의 대비로 고민하셨던 경험 등 솔직한 문제의식들은 학생들의 문제의식 또한 자극했다. 나아가 직접 저술하신 교재에 서명을 해주겠다고 하시며 쉬는 시간에 찾아간 학생들에게 일일이 서명을 해주셨던 것은 재미있고도 인간적인 기억으로 남는다. 사회학의 거장으로 일컬어지는 칼 맑스와 막스 베버를 따르는 일군을 학자들을 맑시스트와 베버리언으로 칭하는 것에 대해 언젠가는 ‘왕배리언’이 나타날 것이라고 하셨던 얘기는 많은 학생들에게 유명한 이야기로 남아있기도 하다.

명강의는 고정불변의 것이 아닌 현재진행형의 것이다. 삶을 통해 체화된 문제의식을 가진 교수의 열정이 학생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유도하는 교수·학생간의 인간적인 교감이 이뤄질 때 교수와 학생 모두에게 감동으로 기억될 수 있는 강의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학생들의 성실과 학구열이 요구되는 것과 같이 늘 교수의 새로운 열정이 함께 요구되는 것은 당연하다. 이런 의미에서 역설적으로, 안주하기보다 부단히 노력하는 강사들의 강의가 학생들에게 좋은 강의로 기억되는 것이다. 김왕배 교수님의 강의는 연륜에 의해서가 아니라 바로 이러한 열정으로 인해 좋은 강의로 기억된다. 앞으로도 현재진행형의 열정적인 강의들로 대학이 가득하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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