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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습으로 그려보는 삶
학습으로 그려보는 삶
  • 교수신문
  • 승인 2020.02.03 08: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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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규미 중앙대학교 박사 과정
박규미 중앙대학교 박사 과정

최근 영어 공부를 시작했다. 계기는 영문 보고서였다. 감사하게도 한국연구재단사업에 선정되어 보고서를 쓰게 되었는데 부족한 영어가 못내 아쉬웠다. 그런데 때마침 마음에 드는 온라인 강의를 찾게 되어 이번 기회에 영어를 좀 더 배워 볼 요량으로 수강신청 버튼을 눌렀다. 따뜻한 커피 한 잔을 홀짝이며 컴퓨터 앞에서 수업을 들을 때가 하루 중 가장 즐거운 시간이다. 어려운 우리말 문장을 눈에 익은 쉬운 영어로 옮길 때면 무릎을 ‘탁’ 치면서 빠져든다. 배운 내용을 환기하며 제법 세련된 표현으로 보고서 몇 줄도 다듬어 보았다.

우리는 누구나 학습을 한다. 학교 수업은 물론 인터넷, 매체, 일터, 심지어는 가족이나 친구들과의 일상 대화 속에서도 학습은 이루어진다. 평생에 걸친 학습 경험은 겹겹이 층화되어 삶을 구성하는 밑바탕이 된다. 예컨대 대학원생은 강의, 스터디, 학술대회, 논문, 프로젝트 등 다양한 학습을 매개로 해당 학문 분야의 연구 지형을 파악하고, 관심 주제를 정하여 자신만의 연구를 준비하며, 다른 연구자들과 논의를 통해 연구를 한 단계 발전시킨다. 대학원에서의 학습 경험을 토대로 연구자로서의 삶을 이해하고 연구자다운 정체성을 점차 갖추어 나가는 것이다.

교육학 연구자로서, 정체성을 설명하기에 보탬이 되는 것은 학습 경험인 것 같다. 과거 정체성 연구와 관련하여 가장 대중적으로 알려진 Erikson의 이론에서는 연령과 발달단계를 중심으로 패턴화한 선형 모형을 제시한다. 하지만 복잡한 현대인의 삶을 떠올려보면 해당 모형으로 현대 사회의 정체성을 설명하기는 다소 어려워 보인다. 반면 학습 경험은 개인이 속한 독특한 사회문화적 맥락 속에서 역동적으로 구성되는 정체성을 통합적으로 이해하는 관점이다. 지식과 기술은 물론 학습 과정에서의 느낌, 감정, 동기, 상호작용, 상황과 맥락까지 정체성 형성 과정 전반에 걸쳐 발휘되는 학습의 강력한 영향력을 포착한다.

‘학습과 정체성’을 큰 주제로 그 동안 몇 가지 연구를 진행하였다. 의대생을 대상으로 한 연구에서는 병원 실습을 전후로 예비 직업인으로서의 정체성 변화를 탐색하였다. 실습에서 처음으로 마주하는 진짜 의사의 삶, 환자와의 상호작용, 일과 가정을 사이에 둔 전공 선택에 대한 진지한 고민은 의사를 바라보는 일반인의 시선을 거두고, 의사 정체성을 형성하는 데에 중요한 학습 경험을 제공하고 있었다. 또 다른 연구에서는 비교과 프로그램에 참여한 대학생의 학습 경험과 정체성을 살펴보았다. 비교과 프로그램에서의 학습 경험을 토대로 자신의 진로 분야에서 일컫는 전문성의 의미를 찾아가고, 직업인에게 요구되는 역량을 갖추기 위해 자발적으로 변화를 꾀하며, 실무자와의 네트워크를 바탕으로 새로운 경력 경로를 확보한다. 이 연구 역시 학생에서 직업인으로 이행하는 정체성 형성 과정을 학습 경험의 관점에서 보여준다.

앞으로 정체성 연구는 발달단계로 규정된 선형 모형의 구현을 목표로 하던 과거와는 달리, 역동적, 통합적, 맥락적으로 구성되는 정체성을 탐색하는 방향으로 전환될 것이라 기대한다. 학습 경험은 정체성을 새로운 관점으로 바라볼 수 있는 하나의 중요한 이론적 렌즈로서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나이가 아닌, 학습이 그려내는 우리의 삶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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