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20 22:20 (토)
[낱말산책] 인간에는 왜 '사이 간(間)'자가 들어있는가
[낱말산책] 인간에는 왜 '사이 간(間)'자가 들어있는가
  • 교수신문
  • 승인 2020.01.31 12:2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빈섬 이상국 시인 편집고문
빈섬 이상국
시인/편집고문

시간과 공간을 말할 때 '간(間)'자를 쓰는 까닭은 무한한 시간과 무한한 공간을 스푼으로 떠내기 위해서다.
무한한 시간을 말할 수 없는 존재가 시간을 이해할 때 필요한 것이 이 스푼이다. 시간 전체를 이해할 수는 없지만 자신이 숨쉴 수 있는 잘려진 시간을 통해 무한에 대한 작은 통찰을 맛본다. 무한한 시간의 어떤 점에서 어떤 점까지를 잘라내어 선분(線分)처럼 이해하는 방식이다. 인간은 무한을 사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산다. 태어나면서부터 살고 죽을 때까지 산다. 인간의 지혜와 경험은 이 생명의 시간을 연장하기 위해, 과거라는 개념을 만들고 미래라는 개념을 만들어 그 전체로 보이는 더 큰 시간으로 확장하여 살고자 한다. 그러나 인간이 누릴 수 있는 현실적인 시간은 시(時)와 시 사이의 100년 가량의 그릇 속에 들어있는 시간일 뿐이다.
무한한 공간을 말할 수 없는 존재가 공간을 이해할 때 필요한 것 또한 이 스푼이다. 공간 전체를 이해할 수는 없지만 자신이 경험하고 인지할 수 있는 잘려진 공간을 통해 무한에 대한 작은 통찰을 맛본다. 무한한 시간의 일부인 자신이 발 딛은 지구 중에서 자신이 가보고 들어보고 눈으로 보고 감각으로 느껴본 것들의 범위까지를 잘라내어 자신의 세계로 이해하는 방식이다. 어떤 시인의 말을 빌려 얘기하면, 그 사람이 몸과 마음으로 가본 거기까지가 그 사람의 세계다. 사람은 무한 공간을 모두 누리며 사는 것이 아니라, 자기 공간을 산다. 간 곳까지 살고 온 곳까지 산다. 인간의 지혜와 경험은 이 존재의 공간을 연장하기 위해, 우주라는 공간을 향해 줄기차게 기웃거리고 인간의 감각이 도달할 수 없는 극미세의 공간을 탐험하려 노력한다. 이런 노력들이 삶의 공간을 더 확장시킬 것이라고 꿈꾸면서 말이다. 그러나 인간이 누릴 수 있는 현실적인 공간은 지구 안쪽의 아주 조그만 마을에 있는 작은 방에서 살다가 좁은 관속으로 들어가 미세하게 흩어지는 그 감옥 같은 공간일 뿐이다.
이렇게 시간과 공간에 들어있는 간(間)이 무한에 대한 그리움이란 것을 통찰하게 된다면, 도대체 인간이란 말 속에 들어있는 간(間)은 어떤 의미인지 궁금해질지도 모른다. 저 무한의 시간과 무한의 공간처럼 사람 속에 어떤 무한이 있다는 뜻인가. 왜 한 사람을 가리킬 때도, 그냥 인(人)이 아닌 인간(人間)인가. 시간과 공간을 의식해서 이 말을 만들었다면, 그것은 시간인과 공간인 즉 시간을 사는 존재인 인간과 공간을 사는 존재인 인간을 가리키기 위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그러나 굳이 그것을 '인' 뒤에 '간'을 붙이는 형태로 표현했다고 말하는 데에는 무리가 있어 보인다. 시간이 시시간(時時間)의 준말이고, 공간이 공공간(空空間)의 준말의 뜻으로 쓰이는 것이라면 인간 또한 인인간(人人間)이란 뜻일 가능성이 더 크다. 인인간은, 사람과 사람 사이란 뜻이다.
인간은 인간의 탄생과 지속의 비밀을 품고 있다. 우선 나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태어난다. 부모가 바로 그 사람과 사람이다. 나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존재로 살아간다. 내가 아닌 다른 사람들이 나를 '나'라고 인식하는 그 무리 속에서 그것이 '나'라고 스스로 생각하며 살아간다. 나 스스로 먼저 생각한 내가 아니라 남이 보고 반응하고 말해주고 행동하는 그 '나'를 나로 받아들이며 살아간다. 그 사람들이 없다면 나는 나를 확인할 수가 없다. 나를 내 스스로가 확인하고 느끼고 이해해서 '나'라고 생각하는 것까지 나아가는 일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울 정도다. 오죽하면, 어떤 종교는 그 전체 목표를 이 가짜 '나'를 파괴하는 것으로 삼았겠는가. 그 인간을 하나로 표현한 말이 바로 세(世)다. '세'는 무리인간 혹은 복수의 인간이다. 세상은 사람들로 이뤄진 공간이나 시간을 말한다. 인간은 타인 속에 둘러싸여 있는 존재에 대한 통찰을 담고 있다. '너'로 호명되는 존재들과 그 밖의 존재들이 세상을 이루며, 나를 이해하게 하는 거울로서 기능한다.
인간은 죽을 때도 사람 사이에서 죽는다. 산 사람에 둘러싸여서 죽어가고 죽은 뒤에도 죽은 사람 사이에서 소멸을 진행한다. 육체만 그런 것이 아니라, 명성이나 존재 기억 같은 것들도 비슷한 운명을 겪는다. 죽음이나 주검까지 같은 죽음이나 주검 사이에 놓이는 까닭은, 그것이 우주 속에 단독자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종(種)이나 류(類)같은 무리로 존재하여 전체 생태계를 움직이는 인자(因子)로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의 죽음은 하나에게는 절대적으로 보이지만, 그것은 죽음이 아니라 다른 탄생을 물고 있는 상대적인 소멸의 고리와도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이란 말 속에는, 뜻밖에도 우리가 생각하는 그 '인간'보다 훨씬 심오하고 절망적인 개념의 인간이 들어있다. '나'라는 주체로 존재하는 인간이 아니라, '나'라는 존재를 생성하고 관찰하고 동행하는 존재들이 인식한 '나'에 대한 정의(定義)가 들어있거나, 섭리 속에 존재하는 한 톨의 개체이자 유한적 대체물로서의 함의가 들어있다. 그런 인간이란 존재가 '하느님'을 찾고 그와 같은 존재가 되고자 한다. 어떤가. 인간이 자기 속에 들어있는 유일한 단독자를 부양하여 일대 자각을 해내고 그 주체성을 우주보편의 수준으로까지 확장하여 존재 구원을 받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가 '인간' 두 글자에 이미 들어있는 것이 아닌가.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