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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전달할 것인가
무엇을 전달할 것인가
  • 박 섭 인제대
  • 승인 2003.10.06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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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강의시간

박 섭 (인제대 경제학과)

교양 교육에서 출발해서 기술 교육으로 대학의 교육 내용이 바뀌어 왔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서의 기술이란 과학기술이 아니고, 사람이 그들의 직업 생활에서 유리한 기회를 가지기 위해 곧바로 사용할 수 있는 수단이다.

긴 역사 속에서 보면 한국의 대학도 교양 교육에서 출발했고 최근에 이르러 기술을 가르치는 장소로 정착해 가고 있다. 외국과 비교해 보면 한국의 대학이 기술을 중시하게 된 일은 오래되지는 않은 것 같다. 그렇지만 대학의 현실에서 살펴보면 한국의 대학은 비교할 만한 외국의 어떤 대학들보다 기술 중심으로 바뀌어 있는 듯하다.

한국의 경제성장 과정을 압축적 성장이라고 요약하는 일이 많은데 대학의 성장 과정도 그와 그리 다르지 않아서 선발 국가들이 긴 시간 속에서 만들어온 것을 짧은 시간에 압축하여 성취하는 한국사회의 특징을 공유하고 있는 듯하다. 압축적 성장은 성장의 폐해까지도 압축적으로 만들기 때문에 폐해를 치유할 시간이 부족하게 되는데 이 점은 대학에서도 예외가 아니어서 교양 교육에서 기술 교육으로 단시간에 이동하는 과정에서 한국의 많은 대학이 우왕좌왕하고 있다.

나의 전공은 경제학이다. 경제학과에서는 전통적으로 경제주체의 행위양식 및 그들의 경제행위에 의해 빚어진 경제 시스템의 작동원리를 가르쳐 왔다. 그런데 이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기술이 되지 못한다. 그 때문인지 요즘은 경제학과도 기술을 가르치려 노력한다. 내가 소속한 대학교는 경제학과와 무역학과를 합해서 국제경상학부를 만들었고 그 속에 경제학 전공을 두었는데 최근에 경제학 전공을 경제금융 전공으로 바꿨다. 금융은 많은 기술을 포함하고 있고 그런 만큼 학생들이 전공으로 선택하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이 변화가 내가 속한 대학교에서만 일어나고 있는 것은 아닌 것 같다.

나의 세부 전공은 경제의 역사이다. 경제사는 이론 경제학 이상으로 기술에서 멀리 떨어져 있고 그런 만큼 학생들이 경제사 강의에 흥미를 가지게 하기 어려워지고 있다. 경제사와 이론 경제학이 기술이 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지만 학부 학생의 입장에 서면 그렇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생들의 흥미를 끌어야 하는데 나의 수업은 그것을 겨냥하며 세 가지 지점을 순회한다. 지식, 사고방법, 기술이 그 세 가지이다.

지식은 호기심을 자극하면 전달해 줄 수 있다. 한국의 많은 학생들이 그들의 두뇌 속에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자신들이 그것들을 가지고 있음을 모르는 일이 허다하다. 그것은 그들이 지식을 단순히 암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학생들이 지식을 얻는 과정을 조금이라도 이해하면 호기심을 자극하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다.

지식을 전하는 일에 비하면 사고방법을 전하는 일은 다소 어렵다. 나는 수업에서 가능한 한 많은 사고방법으로 전해 주려 하는데 수업을 요약하며 사고방법을 끌어내는 일이 어렵기도 하지만 그것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학생들도 그것을 어렵게 한다. 사고방법을 전달하는 방법은 지식을 전달하는 방법과는 다를 것이고 내가 그것에 익숙하기 못하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어렵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기술을 주는 일은 더 어렵다. 나는 강의 첫 시간에 경제사가 직업생활과 일상생활의 기술이 될 수 있음을 이야기한다. 예를 들면 장기변동을 관찰하며 예측하는 기술과 같은 것인데 사실 연구자에게도 어려우며 학생들에게는 더더욱 어려운 일이다.

위의 세 지점은 강의의 내용에 포함되는 것이고 강의의 형식이 그 내용을 둘러싼다. 이 형식은 말투, 눈맞춤, 몸짓, 농담, 옷매무새 등으로 이루어진다. 최근에 연구년을 얻어 캐나다에서 일년간 공부하는 동안 토스트 마스터즈 (www.toastmasters.org) 라고 하는 동호회에서 몇 개월간 말하기 연습을 했다. 그 동호회는 말의 내용보다 말하기 형식에 더 많은 관심을 쏟고 있었는데 그 동호회에서 활동하는 동안 내가 말하기 형식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지 못하다는 생각을 했다.

미숙한 말하기 형식을 가지고 내용의 세 가지 지점 사이를 균형 잡히지 못한 상태로 순회하는 것이 내 강의의 모습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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