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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속 인물과의 말 없는 대화
그림 속 인물과의 말 없는 대화
  • 교수신문
  • 승인 2020.01.16 1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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갤러리 현대 "한국 근현대인물화 - 인물, 초상 그리고 사람" 전을 보고 와서

 

영화를 그림의 연속이라고 본다면 이는 인물화의 연속이다. 공간이나 사물만 나오는 장면들이 있긴 해도 대부분의 이미지들은 인물들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촬영의 싸이즈도 인물이 화면에서 얼마나 크게 또는 작게 나오는가에 따라 나뉜다. 영화의 대선배, 미술은 늘 인물화를 그려왔다. 경복궁 옆 사간동, 갤러리현대에서 열리고 있는 전시 <한국 근현대인물화 - 인물, 초상 그리고 사람>은 화가들이 남긴 인물화들을 모아 한국의 근현대와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삶을 보여주고 있다.
 전시는 화랑의 본관과 신관 두 곳에서 열리고 있는데 전시물의 시대순대로 보려면 본관에서부터 관람하는 것이 좋다. 맨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인물의 배꼽, 또는 가슴 위 상반신이 그려진 그림들이었는데 화가의 자화상들이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화가 고희동이 정자관(조선 사대부들이 쓰던 관모)을 쓴 자신을 그린 작품을 시작으로 이인성, 김관호 등 일제강점기 일본 유학생 화가들이 그렸던 자화상들이 이어졌다.

도쿄미술학교(현 도쿄예술대학)에서 공부했던 김관호는 졸업작품으로 누드화를 제작해 큰 주목을 받았다. 평양 능라도를 배경으로 목욕하는 두 여인의 뒷모습을 부드러운 터치로 그린 유화 작품이다. 유교 문화가 강했던 당시 일반인들에게 누드화는 그 자체로 충격이어서 많은 관람객이 몰렸었다고 한다. 러시아에서 활동하며 평생 고향 땅을 그리워했던 변월룡은 흙바닥에 앉아 있는 조선 여인의 모습을 그렸다. 짙은 녹색 치마와 대비되는 새빨간 저고리를 입은 여인은 화가를 보면서 미소를 짓고 있다.

역시 이국땅 독일 베를린에서 미술가의 길을 걷던 배운성은 자신이 신세 졌던 당대의 갑부 백인기의 <가족도>를 그렸다. 가로 길이가 2m나 되는 대작에는 배운성 자신을 포함해 17명의 인물과 개 한 마리가 그려져 있다. 인물들의 얼굴은 사진처럼 정밀하지만 작품 전체의 색감과 구도는 온화하고 안정적이다. 해방 공간의 다양한 인물들이 뿜어내는 감정들을 마치 중세 유럽의 벽화 같은 서사 구조로 담은 월북 화가 이쾌대의 <군상III>도 인상적이다.  

 한국전쟁이 발발한 1950년부터 급속한 경제발전을 이루기 시작한 70년대까지의 인물화들은 격동의 시대를 살아간 사람들의 시간 속에서 역설적으로 기쁨이 느껴지는 추억이나 담담한 일상의 순간을 잡아냈다. 소가 끄는 마차 타고 피난길 오른 가족의 모습을 마치 소풍 가는 것처럼 표현한 이중섭의 <길 떠나는 가족>(1954), 흰색 한복을 입은 여인들이 보릿단을 터는 노동의 현장을 그린 김기창의 <보리타작>(1956), 어머니가 아이에게 수유하는 모습을 돌을 쪼아낸 것처럼 수많은 덧칠로 완성한 박수근의 <모자>(母子, 1961), 보라색 상의에 보라색 담배를 피고 있는 자화상을 그린 천경자의 <탱고가 흐르는 황홀>(1978) 등에서 나타나는 한국 여성상의 변화 과정을 보는 것도 또 하나의 재미다.
전쟁만큼이나 치열했던 1980년대의 미술은 신관에서 전시되고 있었다. 판화가 오윤 등 민중미술을 대표하는 화가들은 빈민, 여성 등 착취 받는 사람들의 현실을 형상화하여 현실을 날카롭게 비판하면서 자신을 성찰하려고 했다. 남성 작가들이 편견과 오만에서 벗어나 여성을 형상화하는 태도를 바꾼 시기도 이때다. 상인들이 모여 따뜻한 밥을 함께 먹고 있는 <시장 사람들>(강영균), 이마에 주름살 가득한 농부가 누런 한우와 함께 정부양곡 쌀가마니에 그려진 <아버지의 소>(이종구) 등은 건강한 노동으로 삶을 지탱해 나가는 민중에 대한 작가들의 존경과 애정을 가득 담고 있다.
전시와 함께 평론가들의 강연도 진행되고 있다. 2월 14일에는 최열 평론가의 <슬프지만 아름다운 사람들, 그토록 아픈 시대를 물들이다: 1980년대 이후 인물화의 전개>라는 강연이 있다. 강연의 주제처럼 ‘슬프지만 아름다운’ 삶을 살았던 사람들과 말없이 대화하며 지금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의 자화상을 들여다볼 수 있는 전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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