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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의 신경향 : 법학, 비판적 사회과학으로서의 가능성 모색
연구의 신경향 : 법학, 비판적 사회과학으로서의 가능성 모색
  • 이지영 기자
  • 승인 2003.10.04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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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법 정체성 확립 겨냥...주류 법학계 비판도

법학계가 들썩이고 있다. 비주류에 서있던 법학연구자들이 주류 법학계의 요지부동을 비판하며, 새로운 흐름들을 만들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적 법학'을 찾아가는 연구들이 수면 위로 오르면서, 법학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고 있다. 

그 동안 법학 교수들의 성찰이 담긴 에세이는 대중적으로 알려지기도 했다. 박홍규 영남대 교수의 '그들이 헌법을 죽였다'(개마고원 刊)나 안경환 서울대 교수의 '법과 문학 사이'(까치 刊) 등이 법학의 현실을 폭로하거나 법학적 사고의 확장을 시도하긴 했고, 최종고 서울대 교수는 '한국의 법학자들', '한국법사상사'(서울대출판부 刊) 등을 통해 한국법의 자취를 추적한 바 있다.

그러나 이것은 학자 개개인의 관심과 역량에 따른 것이었을 뿐, 일련의 학풍을 형성해 내지는 못했다. 하지만 지난 몇 년 동안, 반란을 꿈꾸는 법학자들이 도약하면서 한국적 법학은 서서히 그 면모를 드러내고 있다. 
 
세대교체속 한국법의 위상 세우기 활발

현재 법학계의 연구혁신의 기류는 크게 두가지 차원에서 살펴질 수 있다. 첫째, 근대법 체계의 현실성 검토작업이다. 이것은 근대법의 역사적인 형성을 되짚어보는 형식으로 진행되고 있는데, 세계 속에서의 한국법의 위상이라는 과제를 동시에 수행중이다. 둘째는 법학을 실천적 사회과학으로 정립하려는 담론적 활동이다. 일종의 세대교체의 흐름과도 맞물린 이런 연구경향들은 법학계를 활기찬 공간으로 바꿔놓고 있다.

현행 법학의 모태는 일제 식민지시기에 수입된 독일법이지만, 법학계에서 여타의 사회과학에서 볼 수 있는 식민지 연구나 자성의 목소리는 찾기 힘들었다. 요즘 들어 이런 분위기를 바꾸는 흐름 가운데 눈에 띄는 것은 서울대 법대 교수 24인이 중심이 돼 지난 1999년 말 발족한 BK21사업단(단장 안경환 교수)이다. 이 연구는 '21세기 세계 속의 한국법의 발전'을 화두로 내걸었는데, 말 그대로 역사적 관점에서 한국법사 연구기반 구축과 동아시아법, 세계법과 관련해 한국법의 정체성을 확립하겠다는 것. 전통을 찾기 위한 연구도 한창이다. 현재까지는 조선시대의 법률서 '대명률'과 '국조오례의' 강독을 하고 있다. 식민지시대의 법령 목록 작성도 거의 마무리 단계에 있다. 전통 법제와 단절된 현행 법제의 단독성을 반성하고 법사상사의 연속성 내지는 전통과의 관계를 회복하겠다는 야심이 깔려있다.

서울대 법학연구소의 한국헌정사연구회(단장 정종섭 교수) 역시 같은 맥락에 서있는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1999년 12월에 시작한 이 모임은 학국법학을 세워야 한다는 결의를 더 늦기 전에 실행에 옮겨야 한다는 공감해서 시작됐다. 2002년에 학진의 기초학문육성지원사업을 받아 현재 '한국근현대사 헌상사 연구'를 진행하는 중이다. 지난 5월에는 '미군정기 및 제헌기의 한국헌장사'라는 제목의 학술대회를 열어, 식민지 이후의 법 제정 역사를 검토하기도 했다. 이같은 연구들은 단순한 법제 제정과 적용 차원이 아니라, 법체계를 연구하고 성찰하겠다는 문제틀의 패러다임적 전환을 품고 있는 것이라 학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한국법사 성찰에서 눈에 띄는 저작물도 출간됐다. 김욱 서남대 교수는 '마키아벨리즘으로 읽는 한국헌정사'라는 책을 펴냈다. 마키아벨리의 사상을 한국 헌정사에 투영시켜 군주, 즉 역대 대통령들의 마키아벨리스트로서의 면모를 분석했다. 이승만 정권의 헌법제정권력 문제, 박정희의 개발 독재와 정권의 정당성, 김영삼의 3당합당, 김대중의 도덕성 문제, 노무현의 반지역주의 등 대통령들의 정치 행보와 반공법, 유신헌법, 5·18 특별법 등 통치행위의 정당성 확보를 위해 이용됐던 법의 그늘을 통시적으로 조명한 작업이다.

법학자들의 현실참여 두드러져
 
현 사회의 제반문제에 대해 법학자들의 참여가 두드러지는 것도 하나의 흐름이라면 흐름이다. 각종 시사 프로그램에 법학자들이 불려 다니는 것은 전문가의 코멘트를 필요로 하는 언론의 요구를 반영하는 것이기에 제외하더라도, 법학계에는 점차 구체적인 현실로 눈을 돌리는 경향이 자리잡고 있다. 민주주의법학연구회(회장 김순태 한국방송통신대 교수)는 최근 연달아서 '신자유주의와 민주법학', '공공부분과 민주법학', '제주 4.3과 인권' 등을 주제로 학술대회를 열고 있다. 1980년대 학술운동을 하던 대학원생들이 모여 만든 이 모임은 초창기에는 반민주적인 법학 비판을 주로 했지만, 요즘은 한국 사회현실에 대한 법리적 접근을 제도화하는 데 고민중이다.

이들에게는 현실에 침묵했던 주류 법학계가 주요한 비판과 넘어서기의 대상이기에, 지난 9월 27일부터 국순옥 전 인하대 교수의 순회강연을 시작했다. 국 교수는 30년간 강단에서 강단법학을 비판해 온 원로교수. '열린 눈으로 보는 헌법학'을 제목으로 달고 있는 이번 강연의 첫 주제는 강단헌법학 비판이라는 다소 도발적인 물음으로 시작한다. 한국 법 아카데미의 보수성을 시작으로 해서 헌법학 연구 등 테마별로 비판할 예정이다. 2∼3년 정도 진행될 이번 강연이 끝나고 나면, 강연원고를 모아 책으로 출판할 계획도 갖고 있다.

이러한 노력은 하나의 모색으로 귀결될 수 있다. 바로 '한국적 현실'과 '법학연구'가 만났다는 것이다. '고시'라는 실용적 차원에 매몰됐던 법학계에서는 눈에 띄는 변화다. 법의 외부를 관심있게 들여다보기 시작한 이런 흐름들이 앞으로 법학을 실천적 사회과학으로 거듭나게 하는 데 계기로 작용할 수 있을 지 주목된다.

이지영 기자 jiyoung@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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