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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학자 김현경의 책] ‘게임의 바다’에서 유영하기 위하여
[인류학자 김현경의 책] ‘게임의 바다’에서 유영하기 위하여
  • 교수신문
  • 승인 2020.01.03 1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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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 게임』 |저자 에릭 번 |역자 조혜정 |교양인 |페이지 284

에릭 번의 <심리게임>(원제: Games People Play)은 왜곡된 의사소통을 ‘이면거래’라는 관점에서 분석한 책이다. 자취하는 딸의 집에 수시로 찾아가서 집이 왜 이 모양이냐고 야단치면서 청소를 해주는 엄마를 예로 들어보자. 평범한 관찰자라면 딸이 지나치게 의존적이라고 단정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에릭 번이라면 그 반대가 진실이라고 말할 것이다. 딸에게 인정을 요구하면서 어리광을 부리는 쪽은 엄마라고 말이다.  

엄마: 내가 안 오면 집이 이렇게 쓰레기장이 되는구나. (내가 아직도 필요한 존재라고 말해줘.)
딸: 내가 알아서 한다니까. (그럼요, 엄마. 엄마가 필요하고 말고요.) 
   
이 대화의 경우 딸은 엄마의 속마음을 알고 있고. 엄마가 원하는 역할―표면적으로는 어리광부리는 아이의 역할이고 심층적으로는 엄마를 다독거려주는, 엄마의 엄마 역할―을 한다. 그러므로 심각한 갈등은 없다. 하지만 일종의 속임수가 숨겨져 있으며 거래가 끝난 뒤에야 무엇이 거래되었는지 알 수 있는 상호작용의 연쇄들도 있다. 에릭 번은 그것을 ‘게임’이라고 부른다.

고전적인 게임의 예로 ‘이러면 어떨까요?-맞아요 그런데’가 있다. 화이트가 고민을 이야기한다. 그러면 블랙은 ‘...하면 어떨까요?’하고 해결책을 제시한다. 화이트는 ‘맞아요, 그런데...’하고 그의 제안을 기각한다. 블랙은 다른 해결책을 내놓고 화이트는 다시 다른 이유를 들어 기각한다. 블랙이 결국 포기하면 화이트가 이기는 것이다. (이 게임은 사람 수에 관계 없이 할 수 있는 게임이다. 화이트는 블랙, 그레이, 브라운...이 돌아가며 내놓는 제안을 차례로 기각할 수 있다.) 이것이 ‘게임’인 이유는 애초에 화이트에게는 고민을 상담받을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다. ‘아무도 나를 도울 수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이 화이트의 목표다. 

<심리게임>은 크게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1부에서는 게임의 정의, 게임과 다른 구조화된 상호작용의 차이, 게임을 분석하는 방법 등을 설명하고, 2부에서는 다양한 게임의 예를 간단한 분석과 함께 제시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3부에서는 사람들이 게임을 하는 이유를 성찰하고 ‘게임의 덫’에서 벗어나는 방법에 대해 이야기한다.      

상호작용의 연극성에 주목하고 그 숨겨진 각본을 읽어내려고 했다는 점에서 에릭 번의 작업은 어빙 고프먼과 유사하다. 하지만 번은 고프먼이 하지 않는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왜 게임을 하는가?’ 그의 대답은 이렇다. 우리는 모두 어루만져주는 손길을 원한다. 하지만 우리는 아이들처럼 솔직하게 친밀감을 표시하는 방법을 잊어버렸다. 그래서 우리는 아주 복잡하고 꼬여 있는 방식으로 우리의 자극-허기를 충족한다. 

고프먼에 대해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이지만, 번과 고프먼은 전기적인 면에서도 닮은 점이 많다. 두 사람은 모두 캐나다에서 태어나 거기서 대학교육까지 받은 뒤에 미국으로 왔다. 고프먼의 아버지는 우크라이나 출신 유대인으로, 20세기 초에 캐나다에 정착했다. 에릭 번의 친가와 외가도 각각 폴란드와 러시아에서 이주해온 유대인 집안이다. 에릭 번의 원래 성은 번슈타인인데, 유대인 정체성에 애착이 없었던 그는 (유대인 느낌이 물씬 나는) ‘슈타인’을 떼어버리고 프랑스 이름처럼 들리게 개명했다. 번은 1910년에, 고프먼은 1922년에 태어났지만, 그들은 문화적으로 거의 같은 시대에 속했다. 아웃사이더로서 그들은 주류 문화의 냉정한 관찰자였고, 솔직하고 유머러스한 비판가였다. 고프먼의 유머 쪽이 좀 더 음침했지만 말이다. 독창적인 이론가이면서 베스트셀러의 저자라는 점도 공통적이다. <심리게임>은 1964년에 초판이 나온 이래 지금까지 전세계적으로 500만부 이상 팔렸다. 이 책이 오늘날 지적 풍경 속에서 거의 눈에 띄지 않는 이유는 이미 지나치게 조명을 받아 색이 바랬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고프먼의 <수용소>나 <스티그마>도 베스트셀러였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번의 이름이 (고프먼과 달리) 대부분의 인문사회과학 전공자들에게 생소하다면, 그 가장 큰 이유는 그의 지적 유산 전체가 ‘교류분석’ 이론가들에게 의해 독점적으로 관리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번은 의대를 졸업하고 정신분석의가 되기 위한 과정을 밟았지만 프로이트주의자들이 그를 받아주지 않았다. 그가 ‘무의식’ 개념을 부정한다는 이유에서였다. 자아, 초자아, 이드를 어른, 부모, 아이라는 세 가지 자아 상태(ego state)로 대체하는 그의 이론은 교류분석(transaction analysis)이라는 독자적인 학파의 발전으로 이어졌다. <심리게임>은 오늘날 교류분석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면 반드시 읽어야 하는 고전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이렇게 이 책이 심리학 중에서도 꽤 주변적인 영역의 ‘교재’로 취급되면서 일반독자들의 시야에서는 그만큼 멀어졌다. 안타까운 일이다. 이 책에는 사회학적으로 귀중한 통찰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우리는 ‘감정노동’이라는 단어를 자주 쓰지만, 어째서 그런 노동이 필요한지 (자연스럽게 감정적 욕구를 충족하는 것이 왜 이렇게 어려운지)는 자문해보지 않는다. 사회학은 심리학적 질문들을 피해갈 수는 있지만, 그것의 존재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다. 사회학에서 신뢰나 감정, 그리고 수행성 같은 키워드들이 중요해질수록 이 책의 가치는 새삼스럽게 빛난다.

김현경 인류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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