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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비평: 유근택 전을 보고
미술비평: 유근택 전을 보고
  • 김준기 사비나미술
  • 승인 2003.09.26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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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일상'은 당대성을 구현하는가

사비나미술관 학예실장 / 예술학

유근택의 그림 그리기를 일상성에 기대어 풀어내는 일은 자타가 공인하는 화가의 화두(畵頭)이자 논자들의 화두(話頭)이다. 시시하고 밋밋하게 반복되는 그저 그런 사물이나 풍경, 장면과 사람들 등의 총체를 일상이라고 부른다. 나는 그의 그림들을 일상이라는 범주로 규정하고 그 틀안에서(만) 해석하려 하는 데 대해 약간의 불편함을 가지고 있다.

그는 불안한 미래를 앞두고 앞이 보이지 않을 때에도 묵묵히 사군자를 치며 마음과 손을 가다듬어 왔으며, 지난 10여년 치열한 그림 그리기를 통해 어느덧 신진에서 중진의 길로 발돋움을 치고 있다. 90년대 초반에는 걸프전, 일제강점기의 역사 등 사회와 개인, 역사와 현실의 문제를 다뤘으며, 이후 지하철, 자화상, 창밖낡? 정원, 광장, 분수, 전화박스 등의 연작을 선보이며 일상(성)을 그리는 화가로 자리잡아 왔다. 군중, 학살, 전쟁, 가족, 개인, 풍경 등의 폭넓은 주제들은 유근택을 역사성에서 일상성에 이르기까지 포괄적인 범주의 이야기를 건네는 화가로 인식하게 했다.

나의 불편함은 여기에서 출발한다. 유근택이 읽어내는 일상 혹은 일상성의 근저에 깔린 것이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나는 그가 일상성에 대해 탐색하는 화가이기보다는 자신의 회화적 여정 가운데 하나로 일상(이라는 소재 또는 개념)을 그리고 있다고 생각한다. 르페브르가 읽어낸 일상성의 개념은 현대세계라는 틀을 전제로 하는데, 산업화와 도시화를 겪은 현대인들에게 일상성은 벗어나고 싶지만, 벗어날 수 없는 혹은 벗어나기 두려운 그 무엇이다. 과연 유근택은 자신이 살고 있는 이 시대의 일상(성)을 통해 인간성 회복에 다가서고 있는가. 내가 보기에는 절반 가까이 다가서고 있지만, 앞으로 내딛어야할 걸음들이 더 많이 남아있다.

그의 전화박스 그림를 예로 들어보자. 어느 가로변에 아무렇게나 놓여있는 볼품없는 일상이 소품들 가운데 하나인 전화박스가 있는 가로풍경을 그려내는 유근택의 미덕은 공중전화박스의 유리창을 농묵으로 처리하고 다른 부분들을 호분을 섞어 희뿌옇게 처리함으로써, 박스 내부와 외부를 농묵과 호분의 재료적 특성에 빗대어 은유적으로 변별해내고 있다는 점이다. 전화박스 하나를 그리는 데 있어서도 화가 유근택의 예리한 시각 장치는 재료적 특성을 잘 살리는 탁월함이 있다. 그 탁월함의 지향점은 무엇인가.

아파트 1층의 거실 창문 밖 풍경 연작도 마찬가지다. 똑같은 풍경을 반복해서 그려 낸 그 노작에는 아파트 정원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의 차이로 인해서 전혀 지루하지 않은 일상의 풍경으로 자리잡았다. 분수 그림에서도 그가 그리려고 하는 분수의 물줄기를 그리지 않음으로써 분수를 그려내는 방법에서는 먹그림의 미덕인 여백의 미를 살짝 변주하고 있는 재치도 엿볼 수 있다. 지리한 일상에서 발견하는 다양한 변주. 이것이 그의 풍경 연작이다.

그림그리는 사람으로서의 유근택의 치열함은 '달리는 풍경'과 '앞산 연구'에 이르면 탄성을 자아내게 한다. <달리는 풍경>연작은 그가 대전에 출강하던 시절, 매주 같은 시간대에 서울에서 유성까지 버스를 타고 이동하면서 순간적으로 지나가는 풍경을 그리겠다는 무모한 발상에서 시작되었다. 달리는 버스의 속력과 화가의 시선이 머무는 곳은 카메라가 아닌 화가의 손으로 그것도 모필과 먹으로 대적하기에는 불가능한 싸움이다. 그 싸움을 지속한 결과 그는 10여미터에 이르는 대작을 선보였다. 단절되는 풍경들의 편린을 이어붙인 유근택의 움직이는 풍경은 지독한 그리기의 전형이 아니겠는가. 유근택은 '그림을 그리는' 화가으로써 '일상을 그리는' 화가라는 점이 명확해지지 않는가.

앞산 연구를 들여다보면 그의 집요한 면모가 더욱 빛을 발한다. 파주 하제마을에 있는 그의 작업실 앞에는 있으나마나한 작은 둔덕이 있다. 흔히들 앞산이라고 부르는 그것 말이다. 화폭에 담을 만한 변변한 바위하나 없고 낙락장송은커녕 그럴싸하게 드러나는 나무하나 없는 민둥산이다. 그 산을 아침, 저녁 비올 때와 맑을 때, 기분 좋을 때와 우울할 때, 여러 장을 반복해서 그려둔 것이다. 같은 대상을 두고 지속적으로 쌓아올린 앞산의 변주는 한편의 장대한 서사시처럼 둔중하게 다가온다.
이렇게 전화박스, 아파트정원, 달리는 풍경, 앞산연구에 이르기까지 유근택은 그의 치열한 그리기의 대상으로 일상을 포착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것은 작가와 견자(見者) 모두가 합의하고 있는 사실(fact)이다. 문제는 그 일상 그리기가 일상성을 현대사회의 한 모습으로 읽어내고 그 일상성의 굴레를 벗어나 인간 존재의 본래성을 탐문하는 데까지 나아가고 있느냐 하는 점이다.

유근택의 그리기는 역사에서 일상으로, 과거에서 현재로, 관념에서 현실로 그 중심축을 옮겨왔다. 화가로서의 민감한 촉수를 들이대고 여러 가지 방법으로 관찰하고, 해석하며, 그려낸다는 것과 그것인 온전히 예술가로서의 숙명과도 같은 '당대성을 구현해내는 일'로 이어진다는 점은 1대1로 대응되는 관계가 아니다. 그만큼 작가가 생각하고 있는 일상을 통한 현실의 모습과는 다른 모습의 현실, 즉 사건이나 역사로부터 유추되는 현실에 대해서도 고려해야할 것들이 많다는 얘기다.

그는 내년 이맘때 즈음 사비나미술관에서 개인전을 열 예정이며, 나는 그 전시를 담당할 큐레이터이다. 앞으로 일년 동안 그와 나는 공식 비공식적인 자리에서 여기 짧은 지면에 내비친 일상(성)과 당대성에 관한 얘기를 나눌 것이다. 나는 유근택이 최근 한겨레신문 소설 삽화에서 놀라운 힘을 보여주고 있으며, 베이징과 평양의 붉은 색을 대비시키기도 하고, '앞산연구'라는 회화적 탐색을 지속하고 있다는 점에서 다원성과 균형감각을 지닌 좋은 작가라는 점을 새삼 확인하고 있다. 그 신뢰를 바탕으로 나는 그에게 건낼 얘기가 많다. 지리멸렬하게 반복되는 일상의 굴레 앞에서 분연히 그 암연에 맞서 대결하는 화가의 아름다운 투쟁과 더불어 예술적 당대성을 구현하는 문제를 비롯해 더 보태야할 것들이 많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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