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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준 교수의 내가 본 함석헌 26
김용준 교수의 내가 본 함석헌 26
  • 김용준
  • 승인 2003.09.26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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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계'의 장준하, 씨알의 목소리오 정권 꾸짖다

 <벼르면서 못하고 있는데 먼저 편지 주셔서 고맙습니다. 나는 마음이 急해져서 모든 旅程 을 끊고 도라왔지오. 오니 역시 잘 왔다는 생각납니다. 내가 하기야 뭘하겠어요 그래도 옆에서 보기라도 해야지. 지금 나라 형편은 아주 切迫되었습니다. 나라 재산은 이젠 아주 비었다는군요. 그리구는 軍政府와 野黨이 다 마찬가지로 政權얻기에 必死的입니다. 보는대로는 國民輿論이 확 이러나서만 이것을 廓淸하고 나라를 바른대로 이끌겠는데 그길이 막막하군요. 그래서 이 사람 저 사람 만나 보기도 하지요. 저번 저녁은 조향록氏外 몇 사람이 초동교회에 모혔었지오. 天安갔다가는 댁에 잠깐 들려서 아버님 어머님 인사만 하고 왔습니다. 天安농장도 강원도도 여러 가지 말성이어서 어떻게 해야할지 걱정입니다.

지난 6일 토요일엔 五山學校에서 강연을 하자해서 했지오. 당초엔 학생에게 말을 하며 一般人도 許하려 했는데 사람이 너무 와서 학생을 내보내고 一般人만도 千명넘어 一千명이 되기도 하고. 정치 잘못된 것을 좀 비난했지오. 그랬더니 형사가 집에 작구 오지 않어요? 어제는 金浦邑 국민운동지부서 청해서 말을 하러 갔더니 갑자기 사람들이 農藥 뿌리러 나가고 없어 강연을 못하겠다는 거 아니오? 뒤에 알고 보니 경찰에서 壓力을 加해 못하게 됬다는 거요. 이러니 어떻게 해요. 답답할 뿐이지. 오는 21일 主日 午前 九時半 엔 市民관에서 思想界 주최로 강연을 또 해요. 싸우야지 그 밖에도 학교마다 단체마다 말해달라 글 써달라 하는데 바쁩니다. 어찌 되겠는지 注視하고  必要하면 싸우야지요. 아무 걱정말고 어서 연구하시오. 이만 씁니다. >

인도로 가지 않고 서울로 간 사연

1963년 7월 11일자의 선생님의 편지이다. 나는 이때 텍사스에서 이제는 인도에서 올 선생님의 편지를 기다리고 있었다. 지난 번 편지에 6월 11일에 다시 독일로 돌아올 예정이라고 하셨으니 지금쯤은 인도에 가 계실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누가 보내 주었는지 기억이 안되지만 우리나라 신문을 보니 선생님께서 시민관에서 사상계사 장준하 사장의 인도로 귀국 강연회가 있었는데 선생님 사자후에 수많은 청중들이 모여들어 대성황을 이루었다는 기사와 보도사진을 보고 나는 너무나 놀라서 선생님께 드린 편지에 대한 선생님의 회답의 서신이 위에 소개한 글이다.

여기서 우리는 당시의 사정을 잠시 되돌아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선생님의 ‘5․16을 어떻게 볼까?’라는 글이 ‘사상계’ 1961년 7월호에 발표되었을 당시의 정황은 이미 소개한 바 있다. 그런데 최근에 소설가 박경수님이 지난 8월초에 ‘장준하: 민족주의자의 길’이라는 저서를 돌베게출판사에서 출간함으로써 당시의 사정을 좀더 소상히 알 수 있게 된 것은 어느 모로나 뜻있는 일이라고 생각된다. 여기서 이 저서에 소개된 당시의 정황을 자세하게 소개할 수는 없지만 ‘사상계’ 7월호가 발매된 지 4-5일 후에 장준하 사장이 정보부원에게 연행되어 상식적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묘한 절차를 거쳐 당시 군사혁명군의 제2인자였던 김종필 정보부장과의 만남은 많은 궁금증을 풀어 주는데 도움이 되었다.

김종필 당시의 정보부장이 여러 곳에 붉은 밑줄이 그어진 ‘사상계’ 7월호의 선생님 글이 실려있는 곳을 장준하 사장에게 보이면서 <“정신분열자 같은 영감쟁이의 이 따위 글을 도대체 무슨 저의로 여기에 실었소? 성스러운 혁명 과업 수행에서 당신은 우리 군사혁명을 모독하는 거요? 이걸 싣게 된 경위와 목적을 말하시오.” “이 글은 내가 직접 함선생께 부탁해서 내 손으로 받아다 내가 읽어보고 실은 것이오.…여러분은 이 글을 좋지 않게 보는 모양이오만 내 나름으로는 이 글이야말로 군사혁명을 일으킨 여러분을 위하고 혁명 과업을 수행하는 데 있어 가장 시의에 맞는 충언이라고 확신하여 실은 것이외다. 좋은 약은 입에 쓴 법으로 당장은 다소 거슬리는 데가 있을지 모르지만 내 확신이 틀리지 않는 한 여러분을 위하고 나라의 장래를 위하는 충정이 들어있는 글인 것만은 틀림없소. 지금 우리나라의 모든 언론기관이 혁명과업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잘한다는 말 이외의 다른 말들은 일체하지 않고 있소. 그러나 내가 보기에는 아무래도 나라의 향방이 옳은 길로 걸어가는 것 같지가 않고 또한 뜻있는 여러 사람들이 말로는 못하지만 생각은 나와 같기 때문에 충고로 이 글을 실은 겁니다. 나와 함선생 외에는 이런 시기에 이런 충고를 할 사람이 없소.”>로 시작되는 두 사람의 면담은 내가 보기에는 김종필이 완전히 압도당하고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장준하와 김종필의 면담

면담이 끝날 무렵 후일에도 장준하 사장이 그 의미를 알 수가 없었다고 말한 긴 한숨을 내쉰 다음에 김종필은 처음에 좀 무례하게 대한 일을 사과하면서 좋은 말 많이 들었다는 치하와 함께 앞으로는 밖에서 말하지 말고 뛰어들어오셔서 직접 책망해주면 고맙겠다는 인사까지 했다는 것을 보면 지난번에 풍문으로 소개했던 함 선생님의 체포를 최고회의에서 김종필이 반대로 성사가 되지 않았다는 이야기도 다소 수긍이 되기도 하였다. 후일담으로 장준하 사장이 당시의 면담 중에 김종필 정보부장이 당시 재건국민운동본부장이었던 유진오 고대총장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면서 곧 해임시키겠다는 말까지 했다는 것을 보면 장준하 사장을 은근히 회유하려고 노력한 흔적까지 보는 듯 흥미로운 면담이었다고 생각된다. 그후에 ‘사상계’의 동인 필자였던 유달영 서울대 농대교수에게로 그 자리는 넘어 갔는데 유달영 선생이 그 자리에 취임하기 전에 함 선생님께서 간곡하게 말리셨다는 이야기를 직접 들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그 이후로 조금도 타협의 여지가 보이지 않자, 군사정부의 ‘사상계’지 枯死 작전은 주효하게 되었고 결국 ‘사상계’지는 쇄락일로를 걷게 된다. 여기서 ‘사상계’사의 우여곡절을 상세히 논할 필요를 느끼지 않지만 어떻든 장준하를 부폐 언론인으로 정치정화법에 걸어서 일체의 정치활동을 금지시키고 만다. 바로 그때 생각지도 않게 장준하에게 ‘막사이사이’언론상의 수상자로 결정되었다는 통보를 받게 된다. 이것은 당시의 장준하에게 있어서는 그야말로 천우신조가 아닐 수 없었다. 이 수상결정에 관한 장준하님의 글을 직접 들어보자.

<내가 그 상을 받을 만한 자격이 있는지 여부는 차치하고라도 국내에서는 ‘부패 언론인’이라고 낙인을 찍어 정정법으로 묶어놓은 사람을 갖다가 외국에서는 ‘국가 재건에 지식인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촉진시키기 위하여 불편부당한 잡지를 발간함에 있어 성실을 다하고 금전상의 이익이나 정치 권력을 떠나서 한국의 새로운 세대를 계몽하여 그들로 하여금 보다 자유로운 사회를 건설하는 길을 찾게 하였다’는 내용의 수상 결정서를 발표하고 상까지 주었으니 참 아이러니칼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때 어떤 경로를 통하여 당시 대통령 권한대행이자 최고회의 의 장 박정희 장군과의 면담 요청이 왔다. 그때 장준하는 “상 타러 간다고 그 사람을 찾아 갔다하면 후세에 누가 나를 장준하로 보겠는가”라며 이를 단호히 거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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