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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근 교수의 ‘철학자의 가벼움’(39)-다윈 예찬
정세근 교수의 ‘철학자의 가벼움’(39)-다윈 예찬
  • 교수신문
  • 승인 2019.12.05 2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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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근 충북대 철학과 교수
정세근 충북대 철학과 교수

이번에 새로 나온 진화론 번역을 훑어볼 시간이 있었다. 진화론도 여러 판본인데, 초기본을 번역해서 다윈의 처음 생각을 엿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진화라는 말도 쓰지 않았다는 것, 아시는지? ‘진화’(evolution) 대신 ‘전개’(unfold) 정도였단다. 그것도 결론에서 비로소 그런 말을 쓴다. 거듭 새 판본과 다른 책을 내면서 진화라는 말을 안착시킨 것이었다. ‘진화’ 또는 ‘진전’(evolve)이라는 말은 『인간의 유래와 성 선택』(1871)에서 처음 쓰고, 이듬해 『종의 기원』 제6판에서 비로소 쓴다. 

사실 다윈과 비슷한 생각을 한 사람이 있었다. 월리스라는 사람인데, 다윈이 자신이 해왔던 다년간의 연구에 앞서 같은 주장을 논문으로 발표한다. 다행히 실의에 빠진 다윈에게는 좋은 친구가 있어서 그의 격려로 정리해서 낸 책이 바로 『종의 기원』이다. 

그런데 다윈의 전략은 월리스를 띄우는 것이었다. 전략이라기보다 정직이 최선이었던 것 같다. “월리스 씨는 ‘모든 종은 유연관계가 밀접한 기존 종과 우연히 동일한 시공간에서 생겨났다’라고 결론을 내리고 있다”(장대익 옮김, 484쪽)면서 “월리스 씨의 감탄스러운 열정과 연구 덕분에”(534쪽)라고 칭찬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 학계와 비교됐다. 아이디어는 글이 아니니까, 훔치는 것이 다반사다. 고마워하는 것이 아니라 내거란다. 이제야 글을 훔치는 것이 죄라는 상식이 자리 잡고 있으니, 아이디어도 언젠가는 자기 것과 남의 것이 구별되겠지만, 다윈의 태도를 보면서 누가 승자인가 생각하게 된다. 아무리 기가 막힌 아이디어가 있더라도 자료를 정교히 모은 사람이 이기는 것이다. 머리가 발랄한 것도 좋지만, 끈질긴 연구가 더 무서운 것이다. 배를 타고 오지를 가거나, 자기의 영지를 발판으로 삼아 끊임없이 관찰일기를 쓰는 다윈이 바로 그렇다. 

또한 놀라운 것은 다윈의 꼼꼼함이었다. 관찰과 기록, 그리고 쉴 틈 없는 탐구심으로 이루어진 책이 『종의 기원』이었다. 그리고 다윈은 결코 혼자 나오지 않았다. 똑같은 주장에 대한 존경심부터(1858), 학문적 축적, 학자와의 교류, 엄청나게 많은 편지가 그를 만들었다. 다시 말하지만, 자신이 20년 넘게 공들여 온 논리가 겨우 20쪽 논문에 들어있다는 것을 알고 느꼈을 좌절감이 어땠을까 싶다. 그것을 해결하는 방법을 가르쳐준 지인과 그 논문의 저자를 띄우는 것으로 극복한 다윈의 지혜가 놀랍다. 

다윈의 책은 창조설에 대한 반발이었다. 에둘러 말하지 않고, “창조가설로는 설명이 불가능하다”(483쪽)고 까놓고 말한다. 아울러, 라마르크의 용불용(用不用)설에 대한 일정한 용인이 엿보인다. 지금의 모양이 곧 “사용 및 불용의 결과”(208쪽)라고 말하고 있다.  

가축화된 동물에서 습성 또는 본능의 대물림(308쪽), 무사개미처럼 동물끼리 노예를 만드는 본능(313쪽), 흔적기관(604쪽), 교배(614쪽), 잡종에서 다리와 어께에 줄무늬가 나오는 말을 보니 공통의 조상이 얼룩말이라는 이야기(630쪽)는 오늘날 생물학의 모든 분야를 다루고 있다. 거꾸로 그가 다루는 것이 ‘생물학의 기원’이 된다는 말이다. 

그리고 헤켈의 ‘개체 발생은 계통 발생을 반복한다’는 주장처럼 “성장초기에는 아주 비슷하다는 것”(592쪽)을 포유류가 아가미구멍과 고리모양으로 연결된 동맥이 있다면서 ‘배아가 유사’(637쪽)함을 들어 옹호한다. 다윈, 관찰의 왕이었다. 

“나는 거대한 ‘생명의 나무’도 이와 마찬가지라고 믿는다.…시들어 떨어진 나뭇가지들은 지표를 뒤덮는 반면, 계속해서 갈라져나가는 아름다운 나뭇가지들은 그 나무를 뒤덮고 있다.” 다윈, 이렇게 시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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