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19 17:00 (금)
음식공장에서 경계넘나들기
음식공장에서 경계넘나들기
  • 원용찬 / 전북대 경제
  • 승인 2003.09.22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생각하는 이야기-교수의 밥상

예전에 그랬다고 한다. 1년이면 점심, 저녁으로 보신탕을 5백 그릇 정도 먹던 어느 교수가 결국 50대 후반에 동맥경화로 사망하게 됐다. “매일 보신탕을 먹지 말라!”는 유언을 남기고서 말이다. 거기에는 무시로 자신을 대접했던 후배교수와 대학원생들에게 미안하다는 속뜻이 담겨있었을 것이다.


해가 중천을 넘어 점심이 길다보면 때로 휴강이었다. 강의실에서 멀뚱멀뚱 기다리고 있는 학생들에게 조교가 “오늘 교수님께서 세미나가 길어진다!”라고 하면 그것으로 끝이었다. 그렇게 교수들의 점심식사는 이름하여 세미나로 통칭됐고 그것이 갖는 시니피앙은 교수들만의 독특한 특권이 됐다. 그 속에는 고담준론과 토론도 있을 것이지만 대개는 서열이 확인되고 상하간의 인격이 실험되는 장소이기도 했다.

독특한 특권 - '세미나'라는 시니피앙의 소멸

그러고 나서 30년이 흘렀다. 내 옆방 S교수는 월초에 30장의 식권을 구입한다. 정확히 11시 50분에 혼자 구내식당으로 가서 밥을 먹고 30분 동안 캠퍼스를 거닐다 연구실로 돌아온다. 나도 몇 번 따라갔는데 그것도 학생식당이었다. S교수의 지론은 이랬다. 가끔씩 교수들이 학생식당에 가야 학생들이 먹는 음식의 질이 높아진다는 것이었다. 그래선지 S교수만 보면 식당 아줌마들은 잔뜩 긴장하기 일쑤였다.


나 역시 연구실의 원탁의자에는 신문이 수북히 싸여 있다. 느긋이 앉아 신문 뒤적이는 것을 금기로 삼고 있던 터라(혼자만의 공간에서 게을러지지 않기 위해 내 스스로 정한 愼獨規則) 중국 음식을 불러 먹을 때를 이용해 주마간산으로 읽다보니 신문은 항상 구문이 되고 있다.


저녁때는 연구실의 신문이나 잡지를 들고 어슬렁거리며 객지 학생들이 밥 먹는 매식집으로 향한다. 거기서나 교수들이 대접을 받지 혼자서 일반 음식점에 가면 눈총맞기 십상이다. 이제 밥 먹는 것은 귀찮은 일이고 혼자만의 행위가 됐다.


서로가 함께 먹고 마시고 집에까지 와서 귀한 양주까지 먹던 시절은 더 이상 우리들의 삶에 끼어들지 못하게 됐다. 낭비가 되어 버린 셈이다. 점수 업적의 계량화된 시대에 특히나 학생들과 추억을 만들고 인생의 중요한 시기에 들려줄 수 있는 강의실 밖의 속 깊은 언술과 몸동작도 예전 같지 않다.


그래도 음식남녀라 했던가. 인간의 욕망 중에서 식도락을 즐기고 밥을 나누며 공동체의 성원을 확인하는 원형이 어디로 도망칠 수는 없다.


오랜만에 동료교수들과 저수지 근방의 메기탕 집에서 흐르는 물을 보고 한마디 했다. “이렇게 나와 본지가 얼마인가, 참으로 좋네!”


다음 주에는 자동차로 20분 정도 걸리는 인근 면 단위에 가서 순대국밥을 먹기로 했다. 좌석이 비좁아 한번에 열명 이상 들어갈 때가 없다고 하니 分班해야 할 모양이다. 우리들이 수시로 가는 곳은 순두부 탕집이다. 그 곳에 가면 먼저 콩 국물을 주고 나중에는 연구실에서 먹으라고 누룽지도 싸준다. 한번은 주인아줌마가 우리들 단골손님을 모두 초대했다. 아파서 병원에 누워 있었는데 가만히 깨달아 보니까 지금까지 자기네들이 살아왔던 것이 전부 손님 덕분이라는 것이었다. 고마워서 초대했다는 것이다. 그들에게서 헤겔의 변증법처럼 나는 손님이자 주인이 됐다.


솔직히 한달 가봐야 밖에서 먹는 점심이 한 시간 이상 넘게 걸리는 경우는 없다. 이것도 조급증이 아닌가 싶지만 연구실에서 존재를 확인하다가 길들여지고 이제는 연구실의 중압감에 싸여 있어서 밖에 있는 시간은 언제나 불안하다.

권력 도모하는 밥상에서 즐거운 지식의 밥상으로 

30년전의 세미나에서 원로교수는 왕 노릇을 하며 때로는 우두머리로서 권위도 누렸겠지만 이제 우리는 초라하고 불안한 존재가 되었다. 연구실에 앉아서 디지털의 파일이 있고 세계망과 연결된다는 존재의식이 있으나 사실 그것은 우리를 하루라도 클릭하지 않으면 안되는 접속자로 만들 뿐 이었다. 그것은 들뢰즈의 표현대로 ‘기관 없는 신체’일 수 있다.


내가 살고 있는 영토에 편집증적 인간으로 정주하지 말고 좋은 음식이 열어놓은 광장에서 서로 만나는 것도 즐거운 일이다. 교수들의 식문화는 딱정벌레처럼 연구실의 껍질 속에 살고 있는 우리를 끄집어내어 아날로그의 존재로서 바깥세상과 접점을 삼고, 칸막이의 동료와 학생들과 대면하고 의사소통하며, 주인과 동시에 손님이 되어가는 밥의 공동체이어야 할 것이다.


끼리끼리 모여서 사적 권력을 도모하는 밥상이 아니라 경계를 넘나들고 즐거운 지식을 나눌 수 있다면 음식은 교수들에게 위대한 생명활동의 넉넉한 공간이 될 것이다.


다양한 카오스모스(chaosmos) 속에서 경쾌한 선문답이 오가고, 슬쩍 스쳐가는 말투에서 깊은 지식의 샘물이 작동하며, 부딪히는 젓가락 속에서 마음의 선율이 울리는 것이 교수들의 식문화여야 한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어쨌든 교수들에게 형식적으로 점심시간이 따로 없는 이유는, 우리들에게 바람직스러운 시간을 그렇게 만들어야 한다는 주문이기도 하다.

원용찬 / 전북대 경제학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