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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Life My Book] 문명사회에서 여전히 반복되는 인간의 야만
[My Life My Book] 문명사회에서 여전히 반복되는 인간의 야만
  • 교수신문
  • 승인 2019.11.18 1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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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의 아이히만(원제 : Eichmann in Jerusalem) | 한나 아렌트 저/김선욱 역 | 한길사 | 페이지 418

부정 비리 의혹이 있는 사립대학 재단과 총장에 맞서 싸우다 얼마 전 저는 해직됐습니다. 진리를 추구하고 가르치는 교육자로서 어린 학생들에게 부끄럽지 않도록 최소한 양심을 지켜야겠다는 마음으로 시작한 일입니다. 작년부터 계속되고 있는 과정 속에서 무엇보다 견디기 힘든 것은 학교측의 탄압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충분히 예상가능한 일이었지만 힘있는 권력과 정의를 요구하는 약자의 싸움에서 권력 편에 서는 구성원들을 지켜보는 일은 예상하지도 못했을 뿐 더러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탄압보다 힘든 건 가치와 명분이 아니라 이해타산에 따라 어제의 동료들이 서로 등을 지고 원수가 되는 일이었습니다. 생전 처음 겪어보는 이런 낯선 경험을 통해 저는 한나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을 떠올렸습니다. 이분법적인 선악의 구분을 하자는 것이 아니라 인간으로서 품격과 존엄을 지키는 일이 선악에 대한 최소한의 판단 기준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정치 철학자 한나 아렌트가 쓴 『예루살렘의 아이히만』(1963)은 2차대전이 끝난 후 유대인 학살의 주범이라 할 수 있는 아돌프 아이히만이 이스라엘 비밀경찰에 의해 잡혀와 예루살렘에서 받게 된 전범 재판에 대한 일종의 참관기입니다. 아렌트는 그 당시 미국의 교양잡지 『뉴요커』의 재정적 지원을 받아 특파원의 자격으로 이스라엘에 갔고 아이히만의 재판과 재판 보고서를  토대로 아이히만의 전 생애와 2차 세계대전 속 독일과 유럽의 정치적 상황, 유대인들의 처지를 다방면으로 분석했습니다. 이 책이 제시한 통찰은 관용어처럼 익숙해진 『악의 평범성에 대한 보고(A Report on the Banality of Evil)』라는 부제에서 보듯이 아이히만이라는 인물 분석을 통해 평범한, 어쩌면 선량하기까지 한 사람도 예외없이 악을 저지를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상식적이고 이성적인 인간이 상식과 이성과는 정반대로 행동할 수 있다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불편한 진실을 전하고 있습니다. 동시대, 심지어 같은 해(1906)에 태어난 아이히만과 아렌트 두 사람 중 한 사람은 수백만의 무고한 사람들을 학살한 죄로 재판을 받고, 한 사람은 제삼자로 그 재판을 관찰하는 장면은 역사의 슬픈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미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악이 평범하다’는 의미는 악을 행하는 사람들이 일반적인 생각처럼 죄의식이 없는 싸이코패쓰거나 악마적인 성향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 누군가에게는 친절한 동료, 가족을 사랑하는 선량한 가장과 같은 평범한 사람이라는 겁니다. 이 책을 읽는 내내 마음 한켠을 불편하게 만든 생각은 다른 사람도 아닌 내가 유사한 상황에서 그 악을 행하는 장본인이 될 수 있다는 메시지였습니다. 이런 일이 실제로 지난 박근혜 정부때 문화체육관광부의 블랙리스트 사건으로 일어났던 것을 우린 똑똑히 목격했습니다. 누구보다 더 정상적이고 사회적 엘리트로 여겨졌던 교수, 변호사같은 사람들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심지어 진리를 추구하고 정의와 법을 전공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대체 그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아이히만의 사례를 통해 추측해 볼 수 있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로 요약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평소 생각하지 않는 무사유의 삶, 시키는 대로 행하는 삶이 습관이 돼버린 것입니다. 이는 어쩌면 진화생물학에서 설명하는 것처럼 진화과정에서 뼈 속 깊이 우리 유전자에 내재된 다수를 따르는 행동 특성에서 기인된 것이라 볼 수 있는 측면이 있습니다. 조금만 주의를 기울여 생각해 보면 충분히 무엇이 옳고 그른 것인지 판단할 수 있었음에도 그렇게 하지 않는 사고의 게으름이 어떤 자각도 없이 악을 행하게 할 수 있다는 겁니다. 법정에서 아이히만이 한 변명-“신 앞에서는 유죄라고 느끼지만 법 앞에서는 아니다”, “나는 유대인을 죽인적이 없다. 죽이라고 명령한 적도 없다. 나는 그저 명령에 따라 내 임무를 수행했을 뿐이다.”-은 심지어 논리적이어서 그의 말을 들으면 그를 유죄라 탓하기 어려울 것처럼 느껴지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그의 행동이 소극적 방관이든 적극적 동조든, 불이익이 두려워서든 이익을 탐해 협조한 것이든 타인을 도구화한다는 점에서 결코 합리화할 수 없는 범죄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습니다. 주의해야 할 사실은 아이히만 역시 처음부터 극악한 일에 동의하거나 실행할 생각이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는 점입니다. 그의 생각은 조금씩 잠식돼갔고, 그저 명령에 복종하는 것이 성실한 관료의 의무라 받아들이고 자신의 생각과 판단을 멈추기로 한 데서 비극이 시작된 겁니다.

김선진 경성대 교수
(디지털미디어학부) 

또 하나는 좋은 사회에 대한 지향점이 명확하지 않은 공동체 환경에서 이유를 찾을 수 있습니다. 도덕적 지향이 없는 사회에서는 개인들이 어떤 자각도 없이 악을 행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아이히만의 사례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사회는 개인에게 무엇이 옳고 그른지 판단의 기준을 제시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한나 아렌트의 이 저술이 무려 50여년 전의 얘기지만 최근 검찰 개혁의 요구가 커져가는 최근 우리 사회에도 경종을 울리는 책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검사 동일체 원칙과 같이 상명하복을 일상의 조직 논리로 여기는 문화로는 정의와 공정을 지키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검찰뿐 아니라 조직 논리에 함몰될 수 있는 공무원, 정당, 군대와 같은 단체에 속한 사람들은 반드시 한번쯤 읽고 더더욱 생각이 깨어있는 사람이 돼야 한다는 사실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고 느낍니다. 그래야 우리 사회가 21세기 문명사회에서 여전히 반복되는 야만을 멈출 수 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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